장석준 개인전 - 닫혀진 하늘의 무지개

무지개의 몽상

“단순해져가는 패턴으로 삶의 공간이 조여들어 옵니다. 이렇게 계속되면 조용히 함께 가는 새벽길 끝엔 녹색과 빨주노초의 셔터가 드리운 이상한 동네가 탄생할 것입니다.”

패턴, 반복되는 무늬와 이미지는 일상의 표면 혹은 일상의 살결처럼 느껴진다. 장석준이 붙들고 씨름하는 무지개 도시의 모습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가 그려내는 무지개는 곤충의 눈으로 본 듯한 세계이거나 자폐증환자의 눈으로 본 세계이다. 규칙적인 리듬과 엄격하게 반복적으로 설정된 것만을 기억하고 또 그를 통해 안정성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만 비치는 신기루거나 엘도라도다.

누구나 동일한 현실과 실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함께 보고 함께 듣고 읽는다 하여 같은 심상을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항상 재구성되고 변형되고 변주한다. 이렇게 재조립되는 현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요구에 적합한 형태로만 존재하고 수용된다. 수용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은 배제되고 폐기된다. 이러한 수용자의 요구에 역행하는 운동은 모두 거부되고 부인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가 되어버린다.

“이 도시의 심심한 풍경을 주제로 주차장과 상가의 셔터가 파란 하늘의 무지개로 드리워집니다.”

작가는 도시를 이루는 수많은 이미지들 가운데 길가에 늘어선 상가의 셔터만을 기록하고 병치하여 푸른 하늘을 만들고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아파트의 이미지를 주차장만으로 만드는 상상력의 자폐성을 드러내고 있다. 순환하지 않는 것들을 주워 모아 새롭게 시선을 고정하고 이미지의 지평을 만드는 작업을 나는 장석준의 작품을 보고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그 세계의 주민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추정해 보는 나는 그럼 그 도시를 가보았다거나 아니면 이미 그 도시의 주민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장석준의 이미지가 닦아 놓은 길과 내가 그려나가는 길이 어느 순간 교차로를 이루며 만났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의식적 만남이 아닌 무의식의 한 순간이고 이는 우리의 일상이 직조한 무의식의 도시가 투영된 것이다.

친절하게도 장석준은 무지개무늬의 셔터를 꼴라주하여 우리가 무지개 도시에 거주한다고 눈치를 준다. 한편 주차장의 꼴라주는 무지개 도시 밖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 현실의 아이들은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만 보고도 아파트의 평수가 큰지 작은지 또 그럼으로 그 집의 거주자의 부와 계급성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석준의 주차장은 그 밖의 현실을 모조리 배제해버린다. 다만 상쾌한 녹색의 주차장들만이 홀로 존재의 지위를 얻고 모이고 모여 독자적인 아파트의 형태를 유희한다. 조각조각 파편으로 분해되는 사소한 공간과 이미지들의 단편들이 겹겹이 교직되고 중층의 구조로 조직되어 이전과는 다르게 숨 쉬며 다가온다.

요컨대 무지개는 이렇게 자폐적 시각으로 그려낸 도시와 오버랩된다. 다른 어떠한 요소도 어떠한 이미지도 배제된다. 그럼으로써 장석준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찬란히 빛나는 존재성을 갖게 된다. 그 빛의 길을 따라가면 주위의 풍경은 우리가 알던 도시가 결코 의도하지 않은 것을 고백하는 모습이다. 현대의 도시는 복합적인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비유되는데, 장석준의 이미지들은 마치 수술환자의 살을 가르고 뼈를 벌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성실한 시술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베를린의 어두운 골목길을 질주하던 어린 발터 벤야민을 가득 채색하였던 그 신비한 칼라들과 영적 순간이, 율리시즈로 분한 조이스의 더블린이 풍기는 현대도시의 신비가, 베일에 싸인 도시와 미궁의 알레고리가 아마도 장석준의 도시에도 내려앉은 것이 아닐까? 도시는 무수한 갈래의 변주를 통해 시적환상으로 변신하다. 그것은 궁극의 안정과 평화를, 동시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꿈과 비전을 상징하는 무지개의 외부를 은유한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이상한 현실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절망을 동시에 내포하는 신비한 현상으로 도시는 무지개를 품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는 과거 무지개처럼 어떤 인격성과 신화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본질적인 이미지는 사물-실재들을 배재하고 사라져 버리게 한다. 본질적인 이미지는 언제나 은유적이며 함축적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10. 28 - 2006. 11. 16

- Opening 2006. 10. 28 (토) pm 6:00

아트스페이스 휴 신진작가 공모 최종 결과

선정작가 : 이재욱

이상 1명의 작가가 1차 포트폴리오 심사 와 2차 작가 프리젠테이션을 거쳐 선정되었습니다. 공모에 참여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제출하신 포트폴리오와 자료들은 10월 31(화)까지 찾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주 일요일은 휴무입니다)

이샛별 개인전 - 봄날은 간다

“이샛별의 헌화가 또는 봄날은 정말 갔는가?”

대부분의 경우 원하는 시간을 또 그 시간에 보냈어야했던 것들을 재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비록 구성했다 하더라도 매번 뒤늦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할 뿐이다. 어린시절부터 나를 둘러싼 풍경은 그저 본래부터 그러했다는 안정감을 어느 순간 상실하며 아주 우연한 풍경이 나를 둘러싸고 벗어날 수 없다는 불안을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야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마치 누군가 네 엄마는 사실은 네 진짜 엄마가 아니었다고 일러준다면, 그때 일어나는 현기증과 공포와 같은 기분은 또 어떨까.

매순간 우리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 또는 사건들을 기억하고자 노력한다. 그런 노력은 그러나 매번 노력했다는 자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경우가 허다하다. 작가의 그림이 주는 인상은 그러한 눈부시도록 화사하고 또 코가 찡하도록 향을 발하는 꽃과 꽃보다 아름답다던 사람들 또 그 사람들보다 더 진한 향기와 매력을 발휘하는 계급장들 권위들. 꽃과 사람과 계급장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곧 우리의 기억 한줄기를 점하고 있던 세계이다. 꽃으로 가득한 세계는 일종의 무속적 염원의 세계거나 이상향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뿌리칠래야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추억과 회상의 파도 앞에 좋았던 호시절을 떠올리는 것이다. 물론 그 시절은 결코 실재하지 않았던 세계였고 다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워하던 곳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름답게 채색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시절을 예찬하거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시절은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임에도 너무도 선명하게 실존하게 된다.

우리가 보내온 시절과 현실들을 찬찬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형상화하면서 우리 자신도 어떤 참된 인식과 모습에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작가의 그림이 주는 미덕은 바로 우리가 보내온 한국의 최근세사를 강렬하게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또 그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고 또 우리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계기를 준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색상은 처연할 정도로 강렬해서 마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각과 청각에도 어른거리게 하는 형상의 힘을 보여준다. 꽃은 더 이상 꽃으로서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의 얼굴은 작가 자신의 초상이자 우리들의 아름다웠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과 공포의 권위를 가로질러 살아남은 자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또 계급장들은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한 질서와 권위가 요구되던 시절의 유산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매순간 시큼하게 코를 찌르듯 꽃과 사람과 군사문화가 어울려있던 호시절(?)의 성장기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그림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전달된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절의 풍광을 눈앞에 펼쳐 보이며 사계절을 순환하며 지침 없이 흘러가는 생의 물길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어떠한 권위도 권위로서 생사여탈권을 발휘하는 세계, 우리는 그런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한때의 혈기 방장한 자유의 시절을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이미지로 사방이 꽉 막히고 사지가 꽁꽁 묶여버렸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작가는 자꾸만 되돌아보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는 꽃만 보지 말 것을 또 사람만 보지 말 것을 아니 힘과 권위만을 보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그럼 무엇을 보란 말인가? 작가가 환기시키려는 것이 무엇인가?

어린시절 성장기에 보아온 동두천 미군기지와 하늘에 그려놓은 전투기의 비행들, 그리고 거리에 나선 군복에 예쁘게 반짝이는 계급장들. 꽃보다 더 예쁘게 눈길을 끌었던 계급장들에 대한 좋았던 기억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 성인의 문턱에서 점차 불길한 죽음의 힘을 상징하는 것들로 변해버린 이 군사문화의 별들. 우리 주위에서 무의식으로 그러나 자주 마주할 법한 사람들의 초상들.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 봄날의 화려한 외출. 그리고 군인들. 사람들. 사람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9. 26 - 2006. 10. 18

- Opening 2006. 9. 29 (토) pm 6:00

Parasite Services 1.0

Parasite services are the social program to be plugged into the South Korean OS (social system).
The art form and discourse in DOS has to function as a limited service. Parasite services, however, are appropriate for the art as an open source type and discourse. As a user, you will create algorithms for it.
You in parasite services are going to propose the service program that look upon the possibility of intervention to the South Korean system and that of patch or plug in/out to the software of social interface.

Parasite Services는 남한 OS(사회시스템)에 플러그인 될 수 있는 Social Software다.
DOS에 유효한 예술과 담론의 모델은 제한된 서비스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Parasite Services는 오픈 소스형 예술과 담론의 모델에 적절하다. 따라서 유저로서의 당신은 그에 걸맞는 예술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을 할 것이다.
Parasite Services 에서의 당신은 남한 시스템에서 개입 가능성을 조망하고 개발하여 사회 인터페이스의 소프트웨어에 패치하거나 플러그 인 / 아웃할 수 있는 서비스 프로그램을 제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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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In the late 90’s, the notion of tactical media has brought a semiotic battle over the disturbance and intervention based on media art.
Then what does mean that parasite services are the social program that is appropriate for the art and discourse as open source type ever?
So is it whether extending socio-political democracy in the shift of media environment or blurring borders of dichotomies, such as amateur vs. professional, private vs. public and alternative vs. mainstream?
Are you exploring the algorithm of a disturbance and semantic reversal, which is basis of a program to be patched and plugged in/out to social interface in Hong-Ik University and the front district of it?

A: That is such an intriguing question. (laugh)

Q: 90년대 후반 등장한 텍티컬미디어의 개념이 D.I.Y방법론의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교란과 전복적인 기호전을 치루어 왔죠.
그렇다면 파라사이트 서비스가 말하는 오픈소스형 예술과 담론에 적절한 사회적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매체환경의 변화속에서 사회정치적 민주주의 확장을 지향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아마츄어/프로페셔널, 사적/공적영역, 주류/비주류등의 이분법적에 대한 미학적 경계허물기인가요?
이번에 홍대/ 홍대앞 인터페이스의 소프트웨어에 패치하거나 플러그 인/아웃시키는 프로그래밍은 개입을 통한 교란과 의미전복의 알고리즘을 새롭게 점검한 것인가요?

A: 참 흥미있는 질문이군요. (웃음)

Parasite servic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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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Parasite Diagram. _1 Page
01. Teasure hunting of The Jack, The Jack. _2 Page
02. Parasite Parachute, Ryubiho. _1 Page
03. Guide for Cute Girls, Shinyoung Lyu. _3 Page
04. Tactical T-Shirts, Cha, Hye Lim. _1 Page
05. the Shadow Sticker, Chung Cho. _1 Page
06. Urban Camping, Taeyoon, Choi. _2 Page
07. Tactical Kettle, Yangachi. _1 Page

Parasite-TMN (Tactical Media Network) :
01. http://www.Parasite-TMN.ORG

- 일정 : 8월 11일(금) ~ 8월 18일(금)
- 초대일: 8월 11일(금). 오후 6시

이훈 개인전 - 꿈아닌 꿈

<이훈 개인전: 과거와 현재의 대차대조표>

심리발달은 갈등없는 통일성 속에 과거를 현재에 통합시킨다. 발달 속에서 과거는 현재를 승격시키고, 현재를 가능하게 한다. 반면 역사 속에서 현재는 과거에서 떨어져 나와,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인식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심리적 변천은 발달이며 동시에 역사다.(푸코)

1. 성장소설과 심리학은 근대역사에 나란히 출현했다. 전자는 괴테의 ꡔ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ꡕ(1796)를 대표로 꼽으며, 후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근원으로 삼는다. 프로이트의 ꡔ꿈의 해석ꡕ이 1900년에 발행됐으니까, 대략 1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정신분석학이 등장하기 전에도 양적 방법에 근거한 실험심리학이 존재했지만, 역사와 철학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의 적자로 간주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성장소설의 기본적 테마는 자아와 사회의 관계이며, 자아가 사회와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는지 압축해 묘사한다.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면, ‘사회화’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현대에 사회학을 출현시킨 역사적 동력이며, 윤리학이 사회학으로 대체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찍이 윤리학은 주체의 내재적 판단능력을 핵심뼈대로 삼았던 학문이다. 사회학의 출현은 그런 능력을 사회가 접수했다는 것, 한 마디로 주체가 스스로 결정할 사항은 별로 없다는 징후이므로, 근대를 수놓은 이성의 목소리는 공염불이 되고야 만다. 이때부터 주체의 고단한 대장정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사회(타자)에 질줄 뻔히 알면서 싸움을 벌이다 지쳐서 쓰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이 여기에 무의식이라는 결정적 쐐기를 박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란 말 그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정신영역이며, 이는 자아의 내부에 자아가 손대지 못하는 타자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이야기다. 외부에 있던 전선이 내부로 옮겨지고, 사회(타자)가 수행하는 정신의 식민화가 철저하게 진행된 것이다. 주체는 자신을 생각할 때조차 자기가 누구인지 의심해야 하는 항상적인 노이로제에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이렇게 100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정신의 왕국은 타자의 마법 같은 손길에 하나씩 무너져 갔으며,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는 이러한 침탈에 맞서 신경의 날을 곧추 세우고 저항하지만, 조그만 상처에도 득달같이 반응하는 자신의 더듬이만 고약스럽게 늘릴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신경을 잘라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지적대로 마음이므로, 이훈씨는 친절하게 ‘퇴행’하는 것이 어떠냐고, 형식적 특성 때문에 지루할 수밖에 없는 비디오예술로 조언한다.

2. 이훈의 작업은 100년에 걸쳐 벌어진 자아의 통합・분열 과정을 3년여 걸친 작업들로 한순간에 반복한다. 이것이 단순한 반복일지 새로운 의미를 내놓을지 따라가 보자. 먼저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의 구성과 동선을 살펴보면, 우선 부처님 손안의 손오공처럼 작은 화면 하나가 꼼짝마 하고 있다. 안 됐기는 <내 손안에서> 화면에 갇힌 자 역시 마찬가지다. 검은 방안에 갇혀서 이곳이 어디인지 밖으로 나갈 통로는 있는지 탐색하다가, 날뛰고 지르고 웃고 울고 한다. 그는 무엇인가 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엇이든 빗나간다. 말은 들리지 않으며, 감정은 동의를 얻지 못한다. 갇힌 자에 알맞은 운명이다. 두 번째 작업은 더욱 가라앉는다. 갇힌 자는 물에 잠긴 채 유영하거나 웅크린다. 옛적부터 물은 노골적인 모태의 은유였다. 그러니 갇힌 자는 어느 덧 물러서다 못해 어미의 자궁으로 회귀하는 서사로 귀결되는 것이다. 사실 퇴행은 만능열쇠 같은 심리적 해결책이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해결책이다. 모태 그곳은 만물의 기원으로서, 치유와 안전을 보장하지만, 영원히 머물 만한 곳도 머물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리고 병리적 행동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거는 잃어버린 조국처럼 우리가 되돌아오는 최초의 땅이 아니라 인위적이며 상상적인 대체의 과거인 것이다.”(푸코) 만약 이훈의 전시가 여기서 멈췄다면, 본성적으로 지루한 형식에 역사적으로 반복된 내용을 결합한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작업에서 퇴행의 고백을 솔직히 털어놓기 때문에 균형이 잡힌다. “뻔히 알고 있는 고백을 강요하는 것, 이 얼마나 음험한 형벌인가.” 다자이 오사무는 ‘음험한 형벌’이라고 했지만, 사실 예술가야말로 그런 형벌을 기꺼이 감내하는 몇 안 되는 종족이며, 유물처럼 살아남은 근대주체의 마지막 생존자다. 해서 예술가는 역주행마저 합법적으로 보장받은 면허증을 소지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3. 마지막 작업에서 전시의 동선과 작가의 역사는 짤막히 마무리된다. 흉터로 얼룩진 자기 몸을 뜬 다음에 살을 파먹는 개미의 영상을 투영시키는 것. 시뻘건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검정색 개미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퇴행했는지 개인사적 실마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선명한 순간이다. 퇴행을 주제로 퇴행하는 동선을 구축하며, 현재의 퇴행을 과거의 상처와 접속시킨다. 이렇게 하자, 지루했던 전작의 효과는 남달라진다. 과거와 현재의 대조가 명확해지며, 전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서 균형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과거와 현재의 대차대조표가 어떠한지, 거칠고 적나라하게 상처 난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세련된 영상에 말끔한 배우를 내세운 결과가 무엇인지, 그는 알아야 한다. 물론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을 세련되게 추억하기에는 과거의 구체성들이 생동한다. 세련된 형식은 생생한 질료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마련, 성장은 빌미로 구체를 대가로 요구했던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7. 29 - 2006. 8. 19

- Opening 2006. 7. 29 (토) pm 6:00

조영아 개인전 - DoGmatism 02 / Existing + Missing.

<잘 버무려진 진지함의 과잉>

조영아는 1999년부터 현재까지 DoGmatism 시리즈를 제작해왔다. 아마도 한 가지 주제를 혹은 모티브를 지속적으로 집중하고 작업해가는 것은 오늘날 현대미술가들에게는 흔한 모습일 것이다. 작가 또한 8년 이상 같은 시리즈를 몇 가지 다른 형태로 변주하며 작업해왔다. 그런데 조영아의 경우 다른 작가들과 그녀의 작업을 변별할 수 있는 지점이 매우 명확해 보인다.

하나는 그녀의 작업이 인류문명사에 대한 해석 위에 출발한다는 점. 물론 이런 접근은 많은 작가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이 문명의 기원과 그 무의식적 차원에 보다 날카롭게 집중하고 또한 자신이 선택한 표현형식에 일관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폭력, 잔혹, 혼돈 등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의식 또는 무의식의 차원을 영상한다.

또 하나는 퍼포먼서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매번 자신의 영상에 출연하며 또 그 연출이 매우 개성적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비현실적인 캐릭터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시키고 점차 강화한다. 그녀는 여성주의 이전의 단계에 서길 원하며 신디 셔먼이 개척한 길을 참고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한다. 잔혹성으로 점철된 인류의 문명과 문화, 그녀가 발딛고 있는 분단 한국의 비현실적 폭력과 불안의 풍경. 사이비 민주화와와 결탁한 미소짓는 세계화와 고도 자본주의. 또 그러한 현실에 영합하는 비판력을 상실한 국제주의 현대미술 등이 그녀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되는 영상은 그녀 특유의 과잉된 진지함과 모호한 신비성을 일으키는 연출로 문명비판적인 조소와 비판적 패러디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대 영상설치미술이 놓인 맥락과 분위기에 대한 우아한 패러디와 같다. 시대착오적인 진지함으로 일관된 도그마티즘 시리즈의 미덕은 바로 그 진지함이 과장되고 재탕되어야만 할 것 같다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패러디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유쾌한 시대착오적 편집증이랄까?

과거 무성영화시대에는 변사라는 직업이 있어, 스토리는 물론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라든가 어떤 보이지 감정을 대신 이야기해준다. 조영아의 영상에는 그런 변사가 등장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홍콩무협과 느와르를 적당히 섞고, 차이나풍의 의상과 다소 과장된 동작들. 30-40년대 무성영화를 보는듯한 복고풍의 패러디가 오히려 2006년 영상설치작품들의 경향과 상황과 비교하여 그녀의 도그마티즘 영상이 놓인 독특한 접점을 환기시킨다. 조영아는 작가의 개성적인 인상과 영상과 그 영상이 놓인 맥락이 어울려 우리에게 또 다른 영상작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7. 7 - 2006. 7. 26

- Opening 2006. 7. 8 (토) pm.6:00

2006 상상력 발전소 작가 2차 프리젠테이션 공고

1. 개요
- 2006년부터 진행하는 <아트스페이스 휴> 선정 작가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입니다.
-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에서 전체적인 진행을 하며, 외부작가나 기존 상상력작가 및 평론가/큐레이터 1명씩 참여합니다.

2. 참여작가 및 참여조건
- 7월 3일 2차 프리젠테이션은 한승구, 조영아, 이훈, 이샛별 총 4명입니다.
- 1년에 3번 진행되며 누구나 참관하실 수 있습니다.

3. 방법
- 프리젠테이션 시간은 발표 및 질의응답을 포함해서 40분 이내로 진행됩니다.
- <아트스페이스 휴>에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예전작업이나 최근작업의 진행상황을 주 내용으로 발표합니다.

- 일시 : 2006년 7월 3일 월요일 오후 1시.

- 장소 :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 대상 : 발표자(한승구, 조영아, 이훈, 이샛별), 상상력발전소 작가, 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

‘맛없는 음식’전

“저 사람 참 밥맛없어!”

A출판사에 다니는 정의씨는 상관인 놀자씨가 매일 일은 안하고 사장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료 수다씨에게 “저 사람 참 밥맛없어!”라고 말한다. 욱~하는 감정을 다스리던 정의씨는 동료 수다씨에게 오늘 점심은 어제 S방송에서 나온 맛이 ‘예술’이라는 근처의 삼계탕집에 가자고 한다. 여기서 이번 <맛없는 음식>전은 출발한다. 정의씨의 “저 사람 참 밥맛없다”는 말은 자신의 소중한(?) (식)욕구가 타인에 의해 억압 받는다는 것을 배출하는 표현이다. 동시에 맛이라는 감각적인 경험이 단순히 혀의 느낌만이 아닌 재미․만족 등 포괄적인 복합 경험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정의씨가 자신의 소중한 욕구를 희생하면서 날렸던 맛의 피날레는 S방송의 감각적이기만 한 맛의 향연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그렇다. 이번 <맛없는 음식>전은 기존의 문화 전반에 주로 활용 되었던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일방적인 경험과 기억이 억압하고 있는 맛의 복합적인 경험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감각적인 미감(味感)의 회복만이 아닌 인식 일반의 저변을 확장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정의씨여 어서 삼계탕의 독립국임과 삼계탕의 자주민임을 선언 하여라!  우리는 먹기도 전에 이미 정신이 배가 불러 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에도 좋다”라는 말은 ‘보기’에만 집중하고 있고, ‘보기’는 ‘좋은 것’을, ‘좋은 것’은 ‘좋은 것만’을 추구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특히나 미술, 문학, 영화 등 많은 부분에 있어 맛있는 음식-그것에 대한 기억과 작용-과 같은 탐미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경험과 기억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억압하고 있다. 이번 <맛없는 음식>전에서 작가들은 다양한 매체와 소재의 작품들을 통하여 억압된 인식을 들춰내고 관객들에게 돌려주게 된다. 작가들이 선보이는 ‘맛없는 음식’에 대한 작품들은 관객들 저마다의 경험에 의해 기억을 불러들이는 기제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작가들이 보여주게 될 ‘맛없는’ 경험은 음식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람, 사물 등 은유적인 부분들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다. 바이홍.

- 전시일정 : 2006. 6. 15 ~ 2006. 7. 1

- 초대일시 : 2006. 6. 17(토) pm 06:00

- 기획 : 바이홍

- 참여작가 : 방은겸, 이대철, 이소명, 이제

한승구 개인전 - Networked Identities

Networked Identities _ 타인에 대한 함수

생각과 움직임, 동작, 말,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나를 위해 결정되고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곰브로비치)

정신의 세계에는 분명 항구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폭력이라고 해서 말뜻 그대로 물리적 힘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외부에서 비롯된 무엇인가 내부로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사건이 발생한다. 외부의 존재는 역사를 달리하며 다른 가면을 썼다. 신의 얼굴도 썼었고, 이성의 얼굴도 썼었다. 이에 따라, ‘사건’ 역시 시기마다 다르게 현상했다.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잔인한 손길을 몸소 경험했던 아도르노. 그에게 외부의 존재는 기술 뒤에 몸을 숨긴 도구적 이성과 파시즘이었다. 그러니 아도르노에게 사건은 ‘마찰’이었다. 아도르노의 찌푸린 얼굴은 천성이 까다롭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슴도치마냥 손대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외부의 존재는 이제는 정말로 ‘폭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르시스신화는 철학에서도 여러 판본으로 재생되고 여러 의미로 번역됐다. 이 가운데 ‘자기애’는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이나, 오늘날 정신분석학은 새로운 해석의 단초를 부여했다. 그것은 바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의 존재다. 흔히 얼굴이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은 얼굴이 육체적 정체성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습게도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며, 거울처럼 다른 매개mediation가 있어야,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현대의 예술에서, 이러한 상황은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무심코 거울을 보다가, 낯설게 비치는 자기 모습에 놀라는 것이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얼굴을 그것도 맨얼굴을 온전히 전체로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온전히 그려진 얼굴을 지그시 쫓다 보면, 자신이 익숙하게 그렸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라깡의 기여는, 다른 이론이 강박적으로 ‘주체’로 돌아갈 때, 숨겨진 거울을 들추어내어, 거울의 기능을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는 거울에 비치는 ‘나의’ 영상이 아니라, ‘거울’이 비추는 나의 영상을 문제로 설정한다.

그저 타인에 대한 함수일 뿐이다.

이에 따라, 주체는 타자의 담론이 머무는 그릇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기술 때문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id’는 가상공간으로 들어가는 신분증이자 ‘신원확인’identification의 절차였지만, 역설적으로 신원확인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수많은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며 생성된 정체성들identities은 스스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을 망각하고 교란한다. 넘쳐나는 id들 속에서 주체는 스스로 길을 잃는 것이다. 초기에 사이버공간이 ‘사이비 공간’이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던 논란은, 현실원칙의 집요한 끌어당기기였겠지만, 이제는 문제거리는커녕 향수를 불러낼 정도다. 한승구의 작업은 이러한 상황을 곧이 곧대로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개념과 설정은 단순하다. 여러 사람의의 모형을 만든 후 얼굴에 얼굴영상을 투영한다. 이때 영상은 관객의 손길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매체가 다른 매체를 시험하고 변형할 때 수행하는 방식을 통해 매체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의 매개된 자아를 앞서 매개된 자아의 변형된 판본으로 이해한다.”(볼터・그루신) 한때 매체는 주체가 무엇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 후 매체는 (무의식적으로) 주체가 담기는 그릇이었다면, 이제 주체는 (의식적으로) 몸소 자신과 서로를 매체에 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흔히 가면의 기능은 가면 뒤에 있는 것을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면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아니면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이 숨겨져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스스로 가면을 쓰는 순간에,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 즉 가상공간 주체의 의식은 현실 공간 주체의 무의식이다. 가면이 은폐하는 것은 가면 뒤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면은, 가면을 가린다. 한승구의 작업은 그것을 발가벗기고 있는 셈이다. (4개의 소제목은 모두 곰브로비치의 <페르디두르케>에서 따옴)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김혜영 개인전 - 고여진 농담

“착각에서 시작해서 오해로 지속되고 진실에 끝이 난다.”(소세키)

1. 인간은 바깥과 호흡한다. 바깥이 세상이면 적응하고, 사람이면 대화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자명한 과정이다. 하지만, 역사를 뒤돌아 봤을 때,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2백년 정도다. 물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은 꾸준히 적응하며 대화했을 것이다. 허나 인간이 곧바로 ‘인간’은 아닌 것,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대화란 모름지기 대등한 존재들 사이에 이루어 법이다. 신들을 매개mediation로 소통하던 때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이 있었으니,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 한쪽 방향으로 가는 말은 결코 대화‘dia-logue’가 아니다.

2. 신을 내쫓고 들어선 인간의 시대. 오롯이 대화할 수 있게 됐으니, 이른바 진보의 시대다. 드디어 대화할 자격을 얻었는데, 김혜영이 묘사한 인물을 보아하니, 적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성적인 사람들>에서 두 명의 인물은 서로를 응시하지만, 서로의 내리깔린 눈길은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들의 밀착된 거리는 오히려 데면데면하게 그들이 사이를 벌려 놓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3. 니체가 의기양양하게 신이 죽었다고 외쳤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역사적 신’이 죽었다고 신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 자리에 곧바로 난쟁이 꼬마들이 얼씨구나 들어앉아, 신의 행세를 하게 됐으니, 홉스가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을 경고한 것은 당연했다. 이성의 비이성적 결과는 코앞에 어른거렸다. 20세기 꼬마들은 그 잘난 과학을 무기로 삼아, 자신을 태웠다. God bless you!

4. 이 기막힌 상황에서 카프카는 벌레가 되었고, 혼자서 성에서 길을 잃었다. 이른바 아이러니, 인간은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야 만다. 볼품없이 혼자 있는 김혜영의 인물들 그 모습 그대로다. 사람이 주위에 있어도 혼자고, 없어도 혼자인 사람들. 노래를 해도 소음이고 응시를 해도 엇나간다. 게다가 못생기기까지. 그들이 세상을 헤쳐가는 모습을 상상하기 괴롭다. 그들의 호흡은 거칠고 힘들다.

5. 신이 될 수 없는 난쟁이 꼬마들이 신이 되는 상황에서, 소통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신들의 사회는 역설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다. 김혜영의 인물들은 모험도 진보도 드라마도 없는 일상에서 어떻게 실패하는지 별다른 감흥 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비극적이질 않다. 일상의 비극은 희극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귀한 인물의 하강이 있어야 하건만, 이미 내려갈 대로 내겨간 난쟁이가 또 어디로 하강한다는 말인가.

6. 호흡이 힘들어지면, 곧바로 마찰이 발생한다. 그때 발생하는 열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도리 없이 거리를 멀찍이 두는 수밖에. 김혜영의 거리두기 전략은, 거기서 드러난 비틀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냉소가 뚝뚝 떨어지는 소세키의 ‘말씀’이 다행일지 불행일지, 죽을 때까지 조금씩 몸으로 확인해보는 수밖에.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4.27 ~2006.5.16

- Opening 2006.4.27 pm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