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Clash - 얼굴의 시간, 시간의 얼굴

“Media Clash 매체/충돌”

오늘날 대안공간이 맞닥뜨린 조건은 지난날 대안공간이 시작했을 무렵과 판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처럼 기존의 미술계 바깥에 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대안공간이라는 ‘형식’ 이상을 보여 주는 것, 즉 내용의 측면에서 ‘대안’의 성격을 조금 더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트스페이스 휴>는 특히 가파르게 변화하는 매체의 환경을 이에 따라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현실의 자락에 주목하고자 한다. 매체가 난무할수록 현실이 말라붙는 역설적인 상황을 짚어보고, 매체가 정신없이 쏟아내는 정보와 기호에 파묻혀 세상의 길을 잃었을 지라도 어떻게 잃었는지 추적해 보는 것이다.

“얼굴의 시간, 시간의 얼굴”

새로운 천년을 맞을 즈음, 많은 죽음이 예언됐다. 주체의 죽음을 시작으로, 이념, 예술, 역사 등등, 수많은 순례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 가운데 특히, 역사의 죽음은 근대성modernity과 관련해 생각해 볼만하다. 왜냐하면 ‘시간’ 개념과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근대성을 가장 일찍 감지했던 보들레르는, 흥미롭게도 어떤 개념보다 시간을 끌어들인다. 언뜻 충돌할 것만 같은 ‘순간’과 ‘영원’의 결합이야말로, 근대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근대’modern는 말뜻 그대로 ‘항상 지금’이라는 것, 무엇 때문에 이 시간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어, 순간과 영원을 동거시켰을까. 하기야, 날로 바뀌는 패션의 ‘유행’처럼, 항상 새것이 넘실댄다면, 단지 상품뿐만 아니라 삶도 인간도 관계도 예술도, 매일같이 유행을 쫓아서 바뀌어야 한다면, 이해하기 곤란한 결합은 아니리라. 마치 요지경처럼 순간순간 시점이 바뀔 때마다 급작스레 이미지가 바뀌는 것처럼, 또한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이 광장 이편저편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것처럼, 항상 바뀐다면야, 덧붙여 바뀜들에 목적도 없다면야, 변화무쌍한 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되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시간, 시제 없는 시대가 연출될 수밖에. 이제부터, 흐르지 않는 시간, 멈춰 버린 역사, 언제나 현재라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때부터 현대인의 고질적인 시간강박이 생겨난다. 어쩐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같은 것 같다는 것. 이 같은 테마는 여러 판본으로 온갖 장르에서 되풀이된다. 항상 새롭다면서, 기묘한 동일성의 논리가 관철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 같은 ‘손해’를 만회하려는 듯, 항상 충격적인 사건만 쫓아다닌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대’라는 형용사가 자주 사용된다. 놀랄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 기대할 만한 대상을 갈구하기 때문이다.”(다자이 오사무) 결국,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지루한 일상 역시, 항상 충격적인 사건만 고대하는 현대인의 순진한 욕망 역시, 동일성이 주무르는 현실의 양면인 셈이다. 게다가, 개인의 ‘시간’만 그런 게 아니다. 사회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어제의 모습이 오늘날 나타나고, 오늘의 얼굴에서 엊그제 흔적이 드러난다. 이러다 보니, 일종의 시간의 역설이 발생한다. 동시대에 여러 시간들이 출현하는 것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손쉽게 확인된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같은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이는 1960년대에, 어떤 이는 1980년대에, 어떤 이는 2010년대에, 저마다 따로따로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를 발판으로 삼아서 다른 시간들과 다른 사람들을 풍경으로만 응시할 뿐이다.
이렇듯 <얼굴의 시간, 시간의 얼굴>은 시간의 문제를 함축하는 얼굴에 주목한다. 얼굴이란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창문 같은 것이다. 이 창문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지 어떤 길을 걸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얼굴들을 모아 놓으면, 인간군상이 펼쳐지면서, 마치 점이 선을 이루고 형을 만드는 것처럼, 사회의 얼개가 마련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오늘날 시간은 길을 잃는다. 옛날처럼 무엇인가 공유할 만한 것을 나눠 갖지 못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했던 얼개는 얼개가 되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얄궂게도 이 같은 양상은 일상에서 익숙하게 만나는 얼굴에다 흔적을 남겨둔다. 시간이 길을 잃는 것처럼,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다 똑같아 지는 것이다.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며 시작했던 근대적 문명이 아니었던가. 김상우 (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 전시일정 : 2006.4. 8 ~ 2006.4. 22
- 초대일시 : 2006.4. 8(토) pm 06:00

책임기획 : 김상우 (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참여작가 : 강홍구, 김옥선, 김윤섭, 김정환, 김지연, 노순택, 박강훈, 박경주, 신혜선, 안세홍, 이상엽, 이현우, 인효진, 임선영, 장미라, 전종대, Area Park

김병직 개인진 - 블루

블루의 시학

사물, 세계의 표면, 존재의 그림자가 블루를 둘러싼 신비이다. 블루는 은유의 머리이고 몸이고 꼬리이다. 이 블루는 깊은 푸른색이거나 단정한 파랑색 또는 녹색이나 보라로 넘어가기 직전의 모호한 블루일지 모른다. 무수한 스팩트럼을 보여주는데 결코 19세기 인상파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유통되는 수학자나 화학자의 표준화된 블루가 아니다. 이 블루는 디지털영상 미디어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보편적인 결핍을 채워줄 구원자로서의 블루이다. 결핍이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이상한 이야기가 점점 자주 들리는 시기에 작가 김병직이 바라보는 블루는 사실 작가가 의도했다기 보다는 그 블루가 작가를 호명했다고 보여진다. 위대한 미디어의 세계에서 발원지가 불투명한 소문 또는 장광설과 호언장담과 무수히 마주하고 무한히 변주될 때 한 순간 작가의 뇌리에 빛이 비추었으니 곧 블루다. 블루는 칼라가 아니다. 블루는 영상언어, 이미지, 기표들을 실어 나르고 마법을 부리며 변신시키는 테크놀로지로서의 블루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도 기계도 아니다. 블루는 하나의 은유이고 신비일 것이다.

분명 김병직의 블루는 현대미술이라는 심해를 가리킨다. 그 블루는 작가를 삼켜버리고 또 다른 무엇을 토해낸다. 영상미디어예술 소위 비디오아트를 하나의 색채심리학으로 만들고 또 심미적 비평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의 블루는 프랑스의 미술가 이브 클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클라인은 기상천외한 작업과 퍼포먼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라는 물감을 온몸에 바르고 캔버스에 몸도장을 찍었었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는 해괴한 해프닝이고 가십거리이며 대단한 볼거리였다. 그런데 그 블루는 비평적으로는 현대미술의 경계를 흩뜨려 놓은 블루였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는 어제의 현대미술이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현대미술이 내일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브 클라인의 시대에 현대미술은 일반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되었는데 이브 클라인의 블루가 그 이상한 정점에 있는 것이다.

김병직 또한 자신의 블루로 자신을 지워내기를 반복하는데, 내게 그의 블루는 어제의 김병직과 오늘과 내일의 김병직이 다르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병직의 블루를 둘러싼 퍼포먼스는 이브 클라인의 초현실적 멋이 사라진 보다 회색의 사물들처럼, 일상적이고 사무적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 양자의 블루는 어떤 공통적인 지점을 향하는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제의나 부두교 등과 같은 종교적 제의에서 사용하는 광적狂的 블루와 비교해보면 더 뚜렷해진다. 제의적 블루는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 세계와 인간을 묶고 인식하고 이해하게 하는 어떤 입문入門과정에 사용된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몇 날 며칠을 블루를 온 몸에 칠하면서 신, 자연, 조상 등 다른 존재와 만난다. 그 과정에 제의 참여자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넘나들며 대지의 흙과 땀과 오물과 배설물로 뒤섞이고 범벅이 된다. 저 끝없는 세계의 바닥으로 또는 저 끝없는 세계의 지붕으로 비상하고 추락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이 과정에 인간과 자연과 신과 기타 모든 것이 다른 질서와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세계와 영혼의 왕국을 만든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 김병직의 블루는 그런 점에서 조형적 색채의 문제를 어떤 원형적 신비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블루의 의미는 현대미술이 조형적 세계에 머물지 않고 삶과 현실의 문제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블루는 색채학이나 비평의 수사학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도달하고 직관이 된다. 블루는 다른 세계로 부터의 호출이며 손짓이고, 작가에게 아니 세계의 모든 사물들에게 블루는 블랙홀이며 화이트홀이다. 이 과정에 세계의 결이 드러나고 해체되고 다시 교직交織된다.

세계의 구멍

블루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들이 있다. 블루, 블루벨벳, 블루라군, 청연… 심해를 오르내리며 불가사의한 대양大洋의 중력을 빛과 소리에 담아낸 영화들. 일상에 가려진 가혹과 비정의 세계, 심오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보여준 기이한 영화 이미지들.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미래의 인간들과 변종생물체들을 그린 묵시적 애니메이션. 최초의 여류 비행사의 꿈과 사랑과 좌절을 다룬 영화. 그 밖에도 무수히 많은데 어째든 이 영화들의 대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 깊은 정서의 운동과 심미의 세계, 또 현실의 어느 지점에 유기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를 은유하곤 한다. 그래서 블루를 제목으로 하는 영화들은 보고 난 후에 결말이 분명치 않고 보는 이에게 한걸음 현실에서 물러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여운을 남기곤 한다. 이 분명치 않은 이야기의 단절과 여운은 일종의 빛의 세계와는 반대편에 존재하는 어두운 구멍과 같다.

그 곳은 세계의 끝이거나 존재의 사람짐 혹은 나타남의 종착지이고 곧 블루의 세계이다. 여기서 김병직의 블루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욕망하는 그래서 다시금 세계의 시작, 작가 자신의 탄생의 순간, 원형적 구멍,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의 시학이 된다. 블루가 상징하는 심해深海는 지구 생명체가 탄생하는 자리이고 곧 생명의 자궁이 아닌가. 김병직은 블루를 통해 자연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이러한 시놉시스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원현상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이 경계에서 등장한다. 괴테는 1790년부터 1810년까지 약 20년간 색채의 문제를 연구하여 1810년 5월 18일 “색채론”을 세상에 내놓는다. 괴테는 색채가 관찰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객관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아이작 뉴턴에 반대하였다. 그에게 색채현상은 밝음과 어둠의 양극적 대립 현상이며 무엇보다 관찰자인 인간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세계는 빛과 밝음의 원현상과 암흑과 어둠의 원현상의 대립이고 이것이 인간이 직관할 수 있는 색채현상의 두 기둥을 이룬다. 여기서 블루는 암흑과 어둠의 원현상으로 나타난다. 밝음의 원현상은 황색으로 나타나는데 이 두 원현상 사이에 흐림이라는 원현상이 존재한다. 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세계의 대결이 색채의 세계에서 펼쳐지며, 여기서 색채는 자연과학자의 손에서 벗어나 화가와 시인들의 심리학이 되고 미학이 된다. 데카르트, 갈리레이, 뉴턴의 자연과학이 풀어내는 색채의 세계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 신의 무한한 세계가 기계의 사유로 환원되는 위험을 괴테는 경고한다.

무한無限

나는 괴테가 일찍이 열어놓은 색채의 사유를 김병직의 블루에서 떠올렸다. 김병직의 블루는 자신을 사물들의 질서의 연쇄에서 지워버리거나 회화와 사물의 관계를 재설정한 현대미술의 사과를 다시 호출하는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던 이전의 세계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블루의 성찰은 존재론이나 미의 형이상학의 문제로 나아가는 길을 향하는 듯하다. 또 거기엔 사물, 존재, 세계의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두 대립하는 현상이 무한의 문제로 나아간다고 보여진다. 김병직의 세계에 거대한 쓰나미가 덥치듯 이 무한의 세계가 강림한 것일까? 그가 서있는 정교한 대지는 일순간 푸른 대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작은 섬처럼 변모한다. 작가는 일상과 우주의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를 모두 꿰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의 설계도에 푸른 잉크 한방울을 떨어뜨리는 데, 그것은 설계도를 위 아래로 가르며 명쾌하게 조직하는 것들을, 현재와 미래의 ‘메트릭스’의 세계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끈끈하게 삼켜버리는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3.2 ~ 2006.3.21

- Opening 2006.3.4(토) pm 05:00

2006 상상력 발전소 작가 1차 프리젠테이션 공고

1. 2006년부터 진행하는 <휴> 선정 작가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램입니다. <휴> 기획팀에서 전체적인 진행을 하며, 외부작가나 기존 상상력작가 및 평론가/큐레이터 1명씩 참여합니다. 1년에 3번 진행되며 누구나 참관하실 수 있습니다.

2. 2월 24일 1차 프리젠테이션은 손동현, 이학승, 김병직, 김혜영 총 4명입니다. 발표자 4명을 제외한 2006 상상력 발전소 작가분들은 꼭 참석하여주시기 바랍니다.

3. 프리젠테이션 시간은 발표 및 질의응답을 포함해서 40분 이내로 진행됩니다. <휴>에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예전작업이나 최근작업의 진행상황을 주 내용으로 준비하시면 됩니다. (기타 다른 내용으로 준비하셔도 무관합니다.) 프리젠테이션형식에 제한은 없으며, 빔프로젝터 외에 장비가 필요하시면, 사전에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4. 24일 발표 작가 4분께서는 21일까지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아트스페이스 휴> 웹하드) * 기타 문의 : 아트스페이스 휴 03-333-0955 / 016-449-1162

- 일시 : 2006년 2월 24일 금요일 오후 2시

- 장소 :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

- 대상 : 발표자(손동현, 이학승, 김병직, 김혜영), 상상력발전소 작가, 미술에 애정과 관심을 가진 모두.

이학승 개인전 - Sleeping whales

1. 햇빛을 받아 해안은 온통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 고래들이 뭍으로 올라와서는 헐떡거리며 죽어갔다. 그렇게 차례차례 해변으로 올라온 고래들이 죽음의 제의를 펼치는 동안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경이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옆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가 치고 있었지만 고래는 해안으로 해안으로 밀려왔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익사체였다. 자연이 인간에게 잠시 허락한 장엄한 신비. 사람들은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치르는 죽음으로의 여행을 바라볼 뿐이었다.

종종 해외 토픽에 실린 고래들의 이 이상한 죽음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그 원인이 잠수함과 군함들이 바다에 쏘아 댄 음파탐지기의 강한 음파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정 주파수의 음파로 정상적인 삶과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고래들의 의사소통체계를 인간이 만들어낸 파괴적인 인공 음파들이 파괴하고 혼란을 일으켰고 고래들은 미쳐서 해안으로 올라온 것이었다.

고래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코끼리 또한 매우 고유한 음파를 통해 생활하는 것이 최근 알려졌다. 코끼리들은 대단히 낮은 저주파를 내는데,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영역의 음파는 넓은 아프리카 평원의 수 킬미터씩 떨어진 코끼리들이 자신들의 위치와 방향을 가늠하고 서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고래의 집단 자살의 예처럼 코끼리들의 의사소통 체계에도 문제가 생기면 현재 코끼리들의 생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재앙으로 파괴될지도 모른다. 이름모를 거대한 협곡 사이의 동굴을 향해 죽음을 앞둔 늙고 병든 코끼리들이 무엇에 홀린 듯 자신을 이끌어 간다는 오래된 이야기는 더 이상 전설이 아닌 현대 인류가 만들어낸 재앙의 전주처럼 들린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각종 소리들, 잡음들, 전파들, 음파들이 자연재해를 낳고 있다. 인간의 이기적인 소리의 독점과 남용은 자연과 자연사물의 질서와 운동을 비틀고 왜곡하고 마침내 인간 자신이 자기 존재의 위치와 방향을 상실하고 미쳐버리는 것이며 인류의 자살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나리오처럼 보인다. 소리의 문제는 매우 경쾌하고 즐거운 쾌락과 유희의 주위를 맴돌다 점차 삶과 죽음의 문제로 미끌어져 간다. 환경운동가들, 생태과학자들, 예술가들이 연대한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존재의 고향을 향한 원형적 노스텔지아에 귀기울일 것과 우주 가운데 쉼 없이 요동치고 운동하는 세계의 소리에 조응하고 순응할 것을 명령한다. 고래들과 코끼리들이 상생하는 소리의 세계는 인간의 귀와 마음에 아름다움과 쾌감을 일으키는 화음의 세계를 아주 작은 세계로 만들어 버린다. 이 거대한 피조물들은 인간의 귀가 결코 알아챌 수 없는 오래된 신성한 언어를 기억하고 사용해 왔다. 인간은 그 세계를 잠시 기웃거리며 지나치는 객일 뿐이다.

2. 이학승은 갤러리에 작은 방송국을 차리고 자신이 편곡한 고래들의 음악(?)을 갤러리 내에서 송출하고 수신하는 과정을 연출한다. 이 작은 방송국의 한 구석에는 소음과 인위적 음파에 반응하고 몸을 떠는 기이한 새가 그 과정을 더욱 극화한다. 이 과정은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소리를 더듬어간다. 갤러리 천장에는 작은 휴대용라디오 수 십대가 매달린 채 빙빙 돌며 관객의 머리 위에서 웅성거린다.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린 기억의 단편들이 아우성을 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거기서 파장과 리듬이 생성된다. 아마도 의식적으로 노력해서라기보다는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갑자기 우리의 의식을 호출하는 어떤 순간을 만나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들로 가득한 문명과 역사의 소리가 아닌 만물의 고유한 소리와 우주의 노래를 은유한다.

송출되는 음악 중에는 언젠가 작가가 런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유랑 악사의 기이한 악기와 그 악기의 독특한 소리들이 고래들의 노래와 함께 편곡되어 연주된다. 고래의 울음소리에 빠져들었듯이 작가는 이름모를 악사의 소리에 매료되어 소리를 수집하고 재구성하였다. 그것은 호출이고 영감이기에 소리들이 스스로 작가에게 찾아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길거리 악사를 통해 어떤 비의적인 순간에 들어섰고 이전 경험의 세계에서 밀려나와서는 전혀 다른 세계의 문턱으로 이끌렸던 것이 아닐까.

세계는 점차 인간의 소리로 가득 차버린 세계는 자신의 본래 소리를 상실한 채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존재의 침몰과 망각의 승리였다. 망각은 인간이 자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건을 단지 무의미한 중얼거림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흰 고래는 결코 멜라닌 색소가 생성되지 않은 돌연변이가 아니다. 흰 고래는 과학과 의미의 존재가 아닌 상징과 은유이다. 흰 고래는 생과 사를 둘러싸고 울리는 소리의 현현이다. 흰 고래는 어디에서 자신의 소리를 되찾을 것인가. 아니 인간 자신, 작가 자신은 어디에서 자신의 소리를 되찾을 것인가.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2.4 ~ 2006.2.22

- Opening 2006.2.4(토) pm 05:00

sound.graphic.한글. - 김윤태 사운드-영상 퍼포먼스

small_132.jpg

sound.graphic.한글. - 김윤태 사운드-영상 퍼포먼스
2006. 1.20 ~ 2006.1.25
opening 2006.1.20(금) pm 08:00

김윤태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 동대학원 졸,
현 동대학원 시각디자인과 박사과정
허클베리핀, 수퍼스트링 드러머.
yunta2@hanmail.net

guest artist
1.20 금 _ 강해진 (violinist in super string)
1.23 월 _ 이한주 (media artist, avant-garde musician)
1.25 수 _ 임지영 (violinist in swallow)

techical artist : 이형민, 손우람

손동현 개인전 : 파압아익혼(坡狎芽益混) : 행복의 나라

1. 1970년대, 한국에서 행복의 나라로 가려면 장막을 걷어야 했다. 그때의 장막이란 광장의 입구를 가로막은 억압의 장막이었다. 광장이 열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함께 모이지 못한 채, 혼자서 숨죽여 목 놓아 울었으리라. 한대수의 노래가 애끓는 듯한 이유가, 김민기의 가사가 애절한 듯한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1980년대,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조금씩 광장은 열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열리진 않지만, 적어도 옛날처럼 혼자서 애끓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당히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하며 합창을 했다. 적어도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서로 행복했으며,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함께 행복해 할만한 시대가 이제 곧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1990년대, 상황은 야릇했다. 행복은 행복이되, 그 행복은 아니었다. 그 동안 열심히 싸웠던 때문인지 일했던 때문인지, 오늘날 알다가도 모르게 됐지만, 어쨌건 간에 사람들은 집을 사고 차를 샀다. 거리는 자동차로 뒤덮였고 사람들은 유원지에 모여들었다. 거리를 울리던 목소리는 자동차의 소음으로, 광장을 채우던 토론은 텔레비전의 광고음악으로 갈음됐다. 시대와 사회에 불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옛날만큼은 아닌 것 같았고, 어쨌든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한국은 본격적으로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했다. 당연히 대중문화는 자본이 노 젓는 사위에 몸을 실고서 대중이 부르는 소리에 대작하며 꽃을 피웠다. 지금까지 문화에서 주체였던 적이 없었던 대중은 드디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2000년대, 각종 소문과 예언과 미망이 난무하며 호들갑스럽게 세기가 전환됐다.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가 개막됐다. 풍요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가, 한바탕 좌절을 겪은 후라서 그런지, 문화에 몰입하는 정도는 더해지면 더해졌지 결코 덜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매체가 쏟아내는 기호와 정보는 나날이 세기를 더해가며 일상을 두루두루 침투했으니, 영상을 숨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온갖 매체에 득실대는 영상과 인물을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늘 행복해 보일까, 생각했다. 우스개 소리지만, 어쩐지 그들이 우리네 행복을 빼앗아 간 것만 같아서, 은근히 얄미웠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그네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같이 어울려 웃자고 놀자고 끌어당긴다. 그런데 어쩐지 그들이 활짝 짓는 미소는 언제나 비슷해 보인다. 그네들이 속삭이는 밀어도, 그네들이 놀리는 몸짓도 신기할 정도로 서로를 닮았다. 하지만 ‘동일성의 복수’는 이제부터다. 왜냐하면, 행복하려면 저렇게 자세를 잡고서 저렇고 표정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체가 매개한 경험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수없이 반복되는 행복한 모습과 똑같은 자세의 영상은, 그 때문이다.

2. 손동현의 작업을 곰곰이 보고서 그렇게 익숙해진 ‘행복’이 떠올랐다. 약간 이상한 일이다. 손동현의 고백대로, 다르게 볼만한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형식에 서양의 질료가 결합한 모양도 흥미롭고, 요즘 유행하는 ‘한국팝’의 경향도 재미있다. 드디어 한국화가 환골탈태하는구나, 게다가 한국화에 바탕한 한국팝이라니 등등,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지평이 존재한다. (솔직히 변신한 한국화도 요즘의 한국팝도 알맞은 문제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화’를 기법과 재료로 한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더욱이 오늘날 그 개념이 유효한지조차 의심스러운 실정이고, ‘한국팝’ 역시 시대와 공감하는 일정한 ‘양식’으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젊은 세대의 감수성의 문제로 보는 게 알맞다.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태여 ‘지배종’determinant으로 부른 까닭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무채색 바탕에 여러 인물의 갖가지 표정을 보다보니, 어느덧 저들의 초상이 감성의 범례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행복의 성화icon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날 회화의 창문에 열린 세계는 매개된 경험이 지배하는 곳이며,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매해야 살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행복이 아니라 ‘너’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니, 언제나 정신은 행복하되 모르는 채 굶주린 상태다. 진부한 것에 행복할수록, 지루한 행복이 반복되는 것이다.

3. “너무 행복해서 몸이 다 마비될 지경이에요.”(피츠제럴드) 그래, 일찍이 감각은 사유하지 않는다 했거늘, 어쩌면 행복이란 정신의 몫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ꡔ행복한 책읽기ꡕ라는 김현의 소박한 제목과 희망과 반대로, 행복해 지려면 책을 읽지도 생각을 하지도 말아야 하겠다. 그렇다고 과연 감각이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재즈의 시대’가 영원토록 지속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은.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1.4 ~ 2006.1.18

- Opening 2006.1.7 (토) pm 05:00

2005 아트스페이스 휴 연말 파티

small_130.jpg

이번 파티의 드렛스 코-드는 화려한 볼탓치와 쌍콤한 왕점, 그리고 섹시한 수염입니다. 거기에 레이스 브라우스까지 입어주신다면 당신이야말로 센스 대마왕! 게다가 여러분들을 위한 파티 뮤지션, ‘아마추어 증폭기’가 연말 엔도르핀 증폭을 위해 대기중에 있습니다. 춥다고 방바닥과 사랑에 빠지지 마시고, 파티에서 이 겨울을 불싸질러 보아요. 명심하세요! 당신은 방바닥과 이루어질 수 없어요.

-시간 : 2005. 12. 21 pm 6:00

박은선 개인전 - 세크리파이스_Sacrifice

1. 요즈음 세상은 무척이나 험하게 돌아간다. 신문의 사회면 소식을 찬찬히 읽다보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기 일쑤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아니면 그냥 모르는 사람을 죽여대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나 되는 대로 죽으라고 불까지 질러댄다. 국제면으로 넘어가면, 더욱 가관이다. 한두명 정도로 끝나지 않고서, 더러운 전쟁에 휩쓸려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이 한꺼번에 죽어나간다. 온갖 종류의 죽음의 굿판이 방방곡곡 얼씨구절씨구 벌어지는 것이다. 이따금 생각해 본다. 여기가 과연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인지, 도대체 사람이 살만한 곳인지. 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암만 해도 너무나 의심스럽다. 시끌시끌하고 복잡다난하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일상을 떠올리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이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일상의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란 어렵지 않다.
아이의 세계가 대표적으로 방증한다. 오늘날 그네들의 세계는 지옥 같은 정도를 넘어서 지옥 자체다. 어른의 세계와 전혀 다를 게 없다. 똑같이 죽음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 어쩌면 훨씬 강도가 높은 지도 모른다. 도덕 같은 규칙이 확립되지 않은 탓에 벌거벗은 폭력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꿈나무니 순수한 동심의 세계니 하는 것은, 모두 다 옛날이야기다. 사회가 꿈꾸었던 행복한 꿈인 것이다. “어린이의 교육형태 속에 사회는 그 꿈을 감추고 있으며, 반대로 성인들에게 부과하는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한 사회 속에서 실제 현재와 불행들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푸코) 문제는 오늘날 사회가 꿈조차 꾸지 못하고, 불행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보호’는 역설적으로 보호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형성된 구호가 아닐까. 적어도 사회가 보호할 여력을 상실한 징후로 보는 게 적절하다.
예를 들어, 아이의 세계를 까맣게 물들인 왕따를 생각해 보자. 왕따란 한 사람에게 모든 죄악을 전가하는 것이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는 모든 재앙의 근원으로 설정된다. 접촉도 금지되고 대화도 거부된다. 왕따된 사람은 살아있는 금기가 된다. 그러므로 왕따현상은 일종의 희생제의다. 옛날에 희생양을 요청했던 존재는 그래도 신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재난의 대가로 희생양을 요구했기에, 요청 자체도 지명 자체도 얼마간 정당하게 수용됐다. 어느 누가 신에게 대적하며 정당성 운운하겠는가. 현대 사회는 물론 신의 존재를 제거했지만, 오늘날 자행되는 수많은 더러운 전쟁에서 확인하듯, 거대한 폭력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희생양을 똑같이 요구한다. “희생물은 그러므로 상상적인 신에게 봉헌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폭력에 봉헌되는 것이다.”(김현) 그런데, 문제는 들통이 났다는 것이요, 더불어 정당성도 잃었다는 것이다. 왕따는 정확히 그것을 재현한다. 질서란 폭력 위에 세워지고, 질서를 유지할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들은 정확히 알고서 실천하는 셈이다. 사회는 수많은 희생양으로 세워진 핏빛 집인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나도 하는 것이다.    

2. 박은선의 작업들은 흥미롭게도 음식의 형상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떤 것은 배추를, 어떤 것은 인삼을, 어떤 것은 사슴을, 어떤 것은 생선을, 저마다 띠고 있다. 당연히 얕잡아 보이기 쉬운 형상들이다. 모두 다 하강한 존재들인 탓이다. 하강이란 존재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작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웃기지도 않게도 전혀 우스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쩐지 조금은 숭고한 느낌에 엄숙할 정도다. 이 같은 아이러니의 정체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희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태도도 공손하기 짝이 없다.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바친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에게 바치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네들의 의도는 분명히 감지된다. 그것들은 기도하며,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은선의 작업들 사이에 발생하는 미묘한 차이가 확실해 진다. 작업들을 분류하면, 첫 번째 계열은 (대체로) 기도하는 식물형상으로, 두 번째 계열은 공양하는 동물형상으로 갈라진다. 알다시피, 예부터 희생제의는 순수한 피를 요구했다. 차마 사람을 요구하진 못할지라도, 동종의 존재를 받쳐야 한다. 즉 동물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계열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오며, 기괴한 느낌을 강화시킨다.
앞서 지적했듯, 현대 사회 역시 희생양을 대가로 세워진 거대한 폭력덩어리다. 폭력만 생각하면, 현대의 합리성이란 전쟁의 합리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어쩌면 불행하게도 신화의 시대보다 훨씬 강력해 졌는지도 모른다. “계몽은 과격해진 신화적 불안이다.”(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박은선의 작업들은 이 같은 희생양을 드러내는 은유이자 폭로이며, 우리네 현실이다. 또한, 그러한 희생양에게 받치는 기도이며 공양이요, 우리네 재현이다. 그러니, 형상들이 살갑기보다 징그러울 수밖에.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2.13 ~ 2005.12.28
- Opening : 2005.12.17 (토) pm 05:00

서낭의 공간 Media Art Project SeoNang

문예진흥기금 후원전 커뮬류션_미디어아트 프로젝트:서낭의 공간

이 전시는 한국의 서울과 미국의 시애틀에 있는 관람자가 동시에 참여해 쌍방향 소통을 갖는 텔레마틱 아트 프로젝트입니다. 4명의 미디어 아티스트가 공동으로 작업했습니다. 서울의 아트스페이스휴와 시애틀의 DXARTS studio에 있는 두 개의 비디오 인터랙션 장치를 통해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침 11시에서 오후 3시 사이에 시애틀의 참여자와 함께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분들을 11월 26일 토요일 낮 12시에 아트스페이스 휴로 초대합니다.

- 작가 : 강은수(Eunsu Kang), Wesley Smith, 협업작:Graham Wakefield, Rama Hoetzlien

- 후원 및 협찬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DXARTS, (주)제니텀엔터테인먼트컴퓨팅, 아트스페이스 휴

- 전시기간: 2005.11.26-12.05 (12월 4일 일요일 하루 전시장이 문을 닫습니다.)

- 전시시간: 아침 11시 - 7시 (권장 관람시간: 아침 11시 - 낮 3시)  * 아침 11시부터 낮 3시 사이에만 미국 시애틀에 있는 관람자와의 쌍방향 인터랙션을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 opening: 2005. 11.26, 토요일 낮 12시

- 전시장소: 아트스페이스 휴

- 전시 기획의도

‘서낭의 공간’ 프로젝트는 두 원거리 지역의 참여자들이 비디오 인스털레이션을 통해 제 3의 공간에서 만나는 국제 텔레마틱 프로젝트이다. 이번 시도에서는 한국의 서울과 미국의 시애틀을 거점으로 서로 른 언어와 문화와 시간대를 가진 이들이 참여한다.

서낭은 한국에서 마을의 터를 지켜주는 신(神)인 서낭신이 붙어 있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나무는 예로부터 두 지역 사이의 경계를 나누고 지키는 역할을 했으며, 지역사회에서 추방된 여자나 병자들이 그 아래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현대의 기술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은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모바일 기기, 온라인 메신저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소통을 한다. 사이버 세상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교류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심지어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 곳은 실제 공간의 모방이자 여러 실제 공간 간의 접점인 동시에 실제 공간과는 다른 레이어에 위치한 제 3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인간의 면대면 소통에서도 존재해왔다. 자신의 표현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사이에는 치고 만나는 지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지점은 완전히 새로운 레이어로 재탄생되며, 타자에 대한 이해는 늘 주관적 해석으로 존재한다.

이런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한 제 3의 공간을 ‘서낭의 공간’이라 명명하고 그 공간이 가진 긍정적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서낭의 공간’을 시각화한 실시간 인터랙티브 비디오 프로그래밍과 관객참여형 미디어 인터페이스로 구성된다. 시애틀과 서울에 위치
한 관객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통해 서낭의 공간’을 열고 또 그 안에서 함께 서낭을 확장해나갈 수 있다.

- 작가소개

강은수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아티스트이다. 전세계에 걸쳐 60회 이상의 전시와 영화제 등에 초대되어왔으며 3회의 개인전을 후원하에 열었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와 소외된 정체성의 표현을 주제로 비디오 인스털레이션, 인터랙티브 미디어 프로젝트의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이화여대에서 MFA를, University of alifornia, Santa Barbara의 Media Arts and Technology Program에서 MA를 취득했으며, 현재는 Seattle에 있는 University of Washington의 the Center for Digital Arts and Experimental Media (DXARTS)에서 전액 지원을 받는 PhD 학생으로서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연구중이다. 2005 한국 문예진흥원 신진예술가 지원 선정, 2004 UCSB 휴머니티/소셜 사이언스 리서치 그랜트 수상, 2003 인사미술공간 웹/모바일 아트 프로젝트 공모등에 당선된 바 있다. http://kangeunsu.com/

Wesley Smith는 Johns Hopkins 대학에서 Electrical Engineering을 전공하고 Photography at Ecole National Superieure des Arts Decoratifs에서 사진을 공부한 후 미국에서 활동중인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두번의 개인전을 미국과 파리 에서 가졌으며 비디오와 소리를 이용한 퍼포먼스 제작에 참여해왔고, Randal Packer와 the Media Deconstruction Kit을 제작하기도 했다. 현재는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의 Media Arts and Technology Program에서 비디오 화면
의 변형과 3D화에 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Max/MSP 프로그램의 개발 테스터이자 많은 오브젝트의 개발자이며 2004, 2005 Nation Science Foundation IGERT fellow(수상자)이다. http://www.mat.ucsb.edu/~whsmith/

Rama  Hotzlien은 Cornell Univirsity의 Game Design Institute의 공동설립자이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아티스트이다. 생물학, 화학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에 관련한 많은 소프트웨어를 제작해 왔으며,  게임 엔진인 GameX의 기획자이자 개발자이다. Cornell University에서 ComputerScience와 Fine Arts를 동시에 전공했으며 현재는 Universityof California, Santa Barbara에서 Media Arts and Technology Program에 재학중이다. 2005  Siggraph에 참가했다. http://www.rchoetzlein.com/

Graham Wakafield는 electronic music의 graphical interface를 연구하는 작곡가이자 퍼포머인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는 University of London의 Goldsmiths Collage에서 Masters in Composition을 취득했으면 현재 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의 Media Arts and Technology Program에 재학중이다. http://www.grahamwakefield.net/

김시원 개인전 - 늑대너구리 불량한 사물

불량 오브제의 욕망과 잃어버린 사물의 귀환

아니다! 잃어버린 것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일 것이다. ‘기억’이라는 집합명사는 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다. 나는 기억에 의해 비로소 내가된다. 만일 어제를 또는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사태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는 사태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기억이 멈춰버린다면 나는 지금이라는 영원 속에 갇혀버린다. 기억은 즐거운 것들을 현재 있음으로 소환하기도 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잊고 싶은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하기도 한다. 기억의 운동은 우릴 사방으로 분리하는 사물에 각인하고 반향한다. 기억은 곧 사물의 기억이 된다. 그럼 사물은 무엇인가? 원자론자들이 믿는 물질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초월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인가. 어쩌면 결코 일상 속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사물을 어디다 사용할 것인가. 그것이 기억과는 또 무슨 상관인가. 본질적이며 원형적인 사물의 사유는 그 내포하는 의미를 무한히 변주하며 끊임없이 확산해버리니 그것을 포착하고 표현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진다. 모호한 의미와 대상은 운명인가? 오히려 사물의 의미를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것들로 제한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의 경험과 표현을 업으로 하는 제작인들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로 사물을 제한한다. 또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로서 사물은 우리 주위에 널려있어야 한다. 아니 비록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도 분명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은 비로소 오브제가 된다. 오브제로서의 사물은 상상력이 넘치는 제작자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며 또 표현의 구체적 재료가 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모든 형태의 이미지들 또한 오브제로 환원된다. 이미지는 분명한 하나의 사물이 된다. 이 세계에서 오브제 사냥꾼들은 자신의 모든 감각과 예지력을 동원하여 이리저리 사냥터를 배회한다. 어떤 의미에서 김시원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일상을 야생의 사냥터로 삼아 포획한 사냥물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끝없이 옆으로 새고 예측할 수 없는 경로를 따라서 진행하는 과정이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한다. 그 모티브란 아마도 아주 하찮고 사소한 것들도 분명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무한한 세계를 지닌 것들이 아닐까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적 사유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이상한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세계는 구획되고 사물은 오브제가 된다.

김시원의 작업은 좀 불량해 보인다. 상처가 배인 것들이 또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생의 끈끈한 액체가 우리의 신발 밑창에 진창을 만든다. 이 걷기 불편한 그래서 심기 또한 불편해지는 것들이 그의 세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오래 전에 사용기한이 지나버린 싸구려 용품들이 탁탁한 공기를 호흡하며 슬슬 망각의 구석에서 기어 나와서는 우리의 비위를 건드린다. “제기랄…제기랄…제기랄!!!”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보통의 세계와 그 보통의 세계의 보통의 원리와 체계를 향해 투덜댄다. 그의 오브제들은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삐딱한 상상의 이미지를 실현한다. 이 우울한 키취들은 어느 것도 닮지 않은 것들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자리를 모색하는 듯 하다. 언뜻 이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오브제들은 무엇인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하기엔 왠지 상투적이라 머쓱하다. 뭐 새로운 해석은 없을까? 새로운 의미는? 아니 새로운 감상과 감각은 없단 말인가? 오브제들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가 비슷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어지럼증이 배속에서 또아리를 틀어대는데 이건 분명 어떤 갈증, 공복의 감각일 것이다. 모더니트스들이 권태로 표현했던 그 배고품이라는 감각. 어떤 대상도 삼켜버리는 공허라는 터무니없이 강렬한 욕망의 거처에서 작가는 잃어버린 것들, 망각의 세계에 사는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으는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1.10 ~ 2005.11.22

- Opening 2005.11.12(토) pm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