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나(최현주) 개인전 _ 시간급구 (Time urgently wanted)

시간급구 : 시간-은유 또는 시간-텍스트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14, 17)”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난나(최현주)는 물론 시간의 문제에 천착하는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인식이다. 현대미술이 철학적 시선과 사변의 세계 속에 또는 그 언저리(edge)에 터 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이미 아득히 오래전부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를 놀라운 직관의 힘과 함께 고도의 지적 성찰로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예술이 철학과 이웃하는 것은 사실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현대미술가들의 오랜 전통이자 미덕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질문에 대한 답변에 머물기 보다는 새로운 질문에 과감히 매달려 왔기에, 시간을 둘러싼 비의적 또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예술가들의 주제로서 매우 적절하면서도 오랜 역사를 갖게 되었다. 현대미술은 당연이 시간을 다루고 그 안에서 사색하는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
 
시간에 대해 수많은 이해와 통찰이 있어왔다. 시간은 부정의 운동이며 시간은 파괴의 신이다. 시간은 죽음과 파멸의 은유이다. 언제나 존재를 넘어선다. 사물들,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시간을 만들어내었다. 시간은 일종의 연쇄이거나 배열과 순서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은 지루함이나 흥미진진함을 낳고, 빠르거나 느린 경험으로 나아간다. 시간은 운동인데 이 운동은 어떤 면에서는 ‘지양Aufheben’과 관련된다. 과거를 현재가 밀어내고 현재를 도래할 미래라는 현재성이 밀어내는 운동. 사건이 사건을 밀어내고 사물이 사물을 밀어낸다. 변증법적 운동은 본래 이러한 지양의 운동의 다른 이름이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Die Bestimmtheit ist Negation.’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거나 시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본래의 시간을 지양하는 것이다. 신화시대와 고대와 중세와 근대의 시간들은 그렇게 지속적인 부정과 지양을 통해 규정되어 왔다. 난나(최현주)는 시간을 거래하고 유통시킴으로써 전통적인 시간을 지양하는 셈이다. 시간은 타자가 되어 거래가능해지지만 이는 동시에 인식 불가능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간은 애초에 인식 불가능한 또는 거래 불가능한 신화와 과학의 경계에 있어왔고 난나(최현주)의 작업은 이를 일상의 언어로 또는 세속적 산술의 대상으로 변주하였을 따름이다. 교환을 통해 시간 또는 시간의 의식을 지양하고 이러한 일련의 지양을 통해 현대미술의 규정들을 지양해나간다.

게오르크 루카치에 따르면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을 형상화의 계기 속에 생생하게 드러내지 않고서 중요한 예술작품이 탄생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루카치의 세계에서 예술 또는 현실의 미적반영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가능하다. 예술은 시간 안에 놓여있다. 시간이라는 거인의 전능한 세계에서 예술은 작은 난쟁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예술은 시간을 벗어나거나 자유로이 변형한다. 그리고 예술은 시간을 넘어서 스스로 거인이 된다. 시간과 거래의 은유를 통한 의미의 전치는 하나의 사건이다. 현대는 자본과 시장의 사건들로 조직되어 간다. 현대의 모든 사물은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로 빛을 발한다. 예술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모든 것이 교환의 가치로 수렴되고 환원된다. 예술은 정치경제학에 포섭된다. 어떤 오류도 발견할 수 없다.

도대체 미술가들이 현대성과 도시의 현실을 떠나 어디에서 창작을 한단 소린가? 현대예술가들은 세속화의 중심 또는 최전방에 있다. 이미 전 지구가 도시이고, 더구나 자본과 시장은 도시의 혈액이며, 예술가들의 혈관에도 자본이 흐르는 세계에서 말이다.

오늘날 텍스트로서 예술은 교환의 조건하에서 숨쉰다. 텍스트의 밖이 불가능하듯 예술은 교환의 가치 밖에서 불가능해졌다. 자본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는 현실에서 어느 예술가도 벗어날 수 없다.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현실은 오히려 창작의 이상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니 즐겨라? 시간의 소유와 거래에 대한 작업은 현대예술이 처한 존재론적 구조와 태도에 대한 난나(최현주)의 불가피한 선택이란 소리다. 어쩌면 난나(최현주)의 작업은 시장(Market)의 패러디를 통해 저잣거리의 예술이 어떻게 유쾌하게 변주되고 거대한 문제를 대하며 갖게 되는 하나의 의문의 길을 향해 문을 열어놓는 행위일 것이다.

작업이 비평의 지점에 놓이는 순간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 인식과 이미지에 대해 <판단정지>를 끌어낸다. 그리고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사고파는 거래의 운동에 집어넣는다. 여기서 시간이라는 거대하고 인식 불가능한 대상은 존재론적으로 낮은 위치로 하강한다. 시간은 물질화 되고 대상화된다. 시간은 소유가능하고 교환가능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양화되어야한다. 그럼으로써 산술(Calculation)의 전경에 놓인다. 이제 시간을 둘러싸고 근대적 의미의 원근법적 사유와 표상이 가능해지면 시간은 힘 또는 권력의 위계 또는 운동의 계열과 연결된다. 아! 천변하는 놀라운 시간의 얼굴이다.

난나(최현주)의 작업은 시간의 소유와 거래를 선언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알리는 동시에 그 몰락과 파국의 징조를 암시한다. 예술사에서 이미 자본주의 승리를 알리는 즉위식이 이미 무수히 있어왔고 또 마찬가지로 자본의 패배 또한 있어왔다. 난나(최현주)에게 예술은 모든 것을 사고파는 거래기계인 셈인가? 현대미술에서 시간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열려있다. 시간은 텍스트가 되고 중심도 주변도 없는 전능한 텍스트로서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대미술의 유통 가능한 가설과 수사적 은유를 제시한다.

폴 리꾀르는 은유의 힘이 부적합한 속사屬辭를 할당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론적 적합성을 만들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전통적으로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장소’의 은유를 언어적으로 사용해왔는데, 우리는 ‘시간의 거래’라는 은유를 통해 또 다른 예를 발견한 셈이다. 좀 더 경쾌한 딜버트의 법칙에 따르면 난나(최현주)의 작업은 과거에 있어왔던 다양한 은유와 내러티브의 전략을 반복하며 우리의 상상의 여백을 채우는데, 이를 마케팅 용어로 ‘가치부과’라고 한다. ‘시간급구’는 전형적인 ‘가치부과’의 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