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돈휘 개인전 초우 모노폴리아 (CHOWOO MONOPOLIA)

고기와 과육의 파티 

 1.초우 

초우는 60년대 신성일과 문희가 주연을 맡아 빅히트를 친 영화의 제목이다. 내용인즉 출세에 눈 먼 자동차 정비공 신성일과 주불대사의 하녀 문희가 계급을 속이고, 사랑과 야망을 키워오다 배신에 치를 떨며 돌아선다는 이야기. 뒷골목인생들의 구질함과 한탕에 눈이 먼 청춘들의 덧없는 느낌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2. 모노폴리
알다시피, 이것은 우리나라에 부루마블로 소개된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내용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땅 매매에 관한 놀이.

1+2
처음 원고를 받고 들은 감정은 난처함과 곤혹스러움이었다. 본디 아다리와 구다리가 맞아 떨어졌을때 비로소 비평이 끼어들어갈 틈을 찾게 되는데 작가의왕룽일가에는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찾기 힘들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저의 차이 없이 일관되게 혼곤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선 서사를 살펴보자. 왕룽일가의 복잡한 계보를 이해하려면 우선 왕룽이 살고 있는 제주 남서쪽 130Km에 위치한 땅 마꼰도의 사회적, 환경적 상황을 숙지해야 한다. 인민재판을 앞두고 있는 왕룽이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서문통 현대극장에서 상영중인 조선영화 초우를 보면서 이야기의 막이 열린다. 뒤이어 왕룽의 자식들이 태어나고, 그는 설화에 등장함직한 호세우르슬라순이할망에게 진주를 건네받는다. 그 진주를 기름에 뒤덮인 황무지 배드랜드의 땅문서와 바꾼 뒤로 왕룽의 집안에는 돈이 마를 날이 없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혼란함 속으로 빠져든다. 처음부터 정체불명의 땅에서 인과관계를 배제하고 파생된 관계맺음으로 인해 왕룽일가의 계보는 한번 봐서는 쉽게 파악 되지 않는 복잡한 구도속에 놓여진다. 이 서사는 황당무계한 계략으로 가득차 있다. 잊지 말자. 작가가 만들어낸 왕룽일가의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날카로운 두통에 이르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을. 만일 당신이 진지하게 마음을 먹고 이 내러티브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은연중에 베일 뒤에 감추어진 몇몇의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S.벅의 대지는 물론이거니와, 마르께스와 커트 보네거트의 주인공들을 기억해 보자. 하지만 윤돈휘의 인물들은 진지하지 않다. 문학뿐 아니라 작가 자신의 생활, 작가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범상한 일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이야기를 굳이 해석(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과관계는 그저 이유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생략이라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마사루적 생략이라 이름 붙였다. 어처구니 없게 들리지만도 않은 것이 도무지 해석불가능한 대사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느닷없이 등장하는 아아 고독해. 마음에 구멍은 대가리도 지경이야 빵. 같은 문장을 보면 이것을 도대체 어느 범주에 끼워 맞추어 해석의 자리를 만들어야 할지 골치가 아파온다. 이런 의미라면 인과를 생략하고 중언부언으로 일관하는 우스타 교스케의 주인공 마사루에 버금간다 하겠다. 책 위에 책을 쓴다는 행위는 기록을 지움으로써 기록을 남기는 행위, 땅을 갈아엎고 땅을 재건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이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이야기가 하나의 덩어리로 받아들여지게 됨에는 작가의 텍스트를 가지고 노는 태도에 있다. 유심히 본다면 알겠지만 이 이야기에는 엄연히 막과 장이 있다. 하나의 시퀀스가 사라지는 지점에는 비워진 자리를 채워주는 또 다른 이야기 구조로 대구된다. 텍스트가 이미지로 전달됨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그 중에 가장 주요한 조건으로는 리듬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리듬은 내러티브를 분할하고, 막과 장을 나누며 합이 맞아 떨어지는 국면전환인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야기는 자연스레 다분히 신파적인 서사가 강조된다. 작가의 의도대로 라면 그가 순간의 미장센에 집착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3. 상상력의 폭동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1967)중 제10장에 이르면 상상력의 폭동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백년 전의 농민봉기를 백년 후인 현재에 재현하고자 하는 두 주인공 중에 하나인다카시의 말이다.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는 1969년부터상상력의 혁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오에의 예견적 자질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만엔원년의 풋볼>전반에 드러나는 리얼리즘과 알레고리적인 양의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카시의 폭력은 무의식 중에 발현되는 폭력이다. 다카시의 논리를 인용해 보자면 이러하다

나의 폭동이라는 말은 기분 좋은데. 물론 과대평가에 불과하지만, 미쓰, 골짜기 마을에서자이에 걸친 수 많은 사람을 어른에서 아이들까지 일제히 열중케 만들고 있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욕망이나 결핍감뿐만은 아니야. 오늘은 줄곧 염불춤의 북이랑 징소리를 들었지? 실은 그 소리가 모두를 흥분시키는 거라고! 저것이 폭동의 정념적 에너지원인 셈이지. 슈퍼마켓의 약탈 따위는 실제로 폭동도 아무것도 아니야. 시시한 소동에 불과하지. 그리고 그것은 이 일에 참가하고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거야. 게다가 그들은 이것에 참가함으로써 백년을 뛰어넘어 만엔원년의 봉기를 추체험하는 흥분을 느끼고 있어. 이것은 상상력의 폭동이야. 미쓰처럼 그런 상상력을 발동시킬 의사가 없는 인간에게는 오늘날 골짜기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따윈 폭동도 뭣도 아니지 않아?”  

다카시의 폭력을 상대방을 억압하는 폭력인 force로 봐야할지 상대방을 파괴하는 폭력인 violence로 봐야할지 불분명한 것처럼 초우모노폴리아에 등장하는 폭력 또한 그 태도가 불분명하다. 삶의 행진으로 등장하는 제례의식으로서의 카니발이다. 카니발성이긴 한데 역사의 반복과 재현으로 변질된 카니발이라 해야 옳겠다. 계급을 속이는 게임 초우의 땅과 계급을 만들어 내는 게임 모노폴리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 수평과 수직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어느 한 곳을 지향하지 못하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된 이곳은 답답하고 터질 것 같은데 끝내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지 못하고 꼬이기만 한다. 결국에는 세속과 통속이 만나 폭죽을 터트리며 교차점을 향해 도달하고 관성의 법칙에 따라 멈추지 못하고 달려가지만, 간질발작 같은 진행성 마비를 일으키며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르게 된다

황당함에도 계보와 서열이 있다고 믿는 관객이라면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당혹할지도 모른다. 흔히 갤러리에서 마주 할 수 있는이미지로서의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의 그림자 안에도세계가 존재함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인간종족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집 잃은 작가의 게임에 동참할 수 있다. 춘곤증이 불러온 봄날의 한갓 꿈에 지나지 않지만 혼돈의 잠자리를 제공하는 이곳은 초우모노폴리아이기 때문이다.

이미미 씀

 -전시기간:2008. 06. 07 - 2008. 06. 28 

 -Opening:2008. 06. 07 () PM 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