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 철수와 영희 - 오석근 개인전

교과서의 뒤 그리고 전이轉移된 사랑 

 철수와 영희(영이)는 한 때 우리의 성장하는 의식(意識)의 무대를 활보하였다. 철수는 영희를, 영희는 철수를, 그리고 우리는 철수와 영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오석근의 사진을 통해 우리만 그들을 바라본 것은 아니라는 이상한 각성을 하게 된다. 사실 철수와 영희 또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과서 시리즈를 보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연결되는 특수한 한국의 현실과 이미지가 지닌 보편적인 심미적 효과가 잘 어울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철수와 영희는 융(Carl Gustav Jung)의 ‘페르소나persona(가면)’를 떠올리는데, 이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는 원형적인 집합적 무의식의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철수와 영희는 우리(나와 너 그리고 그 너머)의 실존적 상징이며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원형상(archetypos)으로서 철수와 영희는 나를 대신하고 너를 대신하며, 나와 너의 거울상이 되어 나와 너를 주체(主體)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철수와 영희의 역할 놀이를 통해 외상적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는 사실 특수한 개별자들의 병적 징후라기보다는 인간 일반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또 그것을 통해서 비로서 주체로 거듭나는 선험적 조건으로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된다. 철수와 영희는 해방이후 20세기 중후반을 살아온 평균적인 한국인의 집합적 트라우마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정상적(?) 의식 이면에 은폐된 어떤 ‘것(It)’을 드러내는 통로이다. 동시에 주체를 향한 어둠에 쌓인 좁은 통로는 오석근의 사진이 향하는 길이다. 이는 사진이미지의 존재론적 자리인 ‘있음의 결핍’ 또는 죽음, 현재 여기 없음의 부재(不在)를 표현하는 길과 오버랩하면서 욕망(결핍)을 드러낸다. 주체가 부재하는 주체 이전의 시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우리들의 의식은 원형적 유형과 이미지의 상호모방을 통해 무한히 복제되고 확대된다. 교과서 속의 철수와 영희는 현실세계의 수많은 철수들과 영희들을 호출한다. 의식의 여명기黎明期에 철수와 영희는 ‘철수와영희’라는 ‘원형적인 상처(傷處)’가 현상한 얼굴이자 나와 너라는 개별자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철수와 영희가 친절하게 인도하는 길은 새마을의 길이였고 수출금자탑에 빛나는 경제개발기의 우리의 초상이다. 철수와 영희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20세기 버전이지만 보다 윤리적이며 계몽된 모습으로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의 대중교육을 위한 또는 관리되는 사회를 위한 역할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이와 영희가 계몽적 대중교육의 화신이자 전도자로 분주했던데 비해 지난날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랑의 상처를 껴안고 단순하지만은 않은 인생의 단맛 쓴맛을 맛보았다  

 배제해온 것들이 꿈틀꿈틀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괴기스럽다. 그 거대한 존재성에 비해 한 없이 해괴하고 엉뚱한 모습은 희비극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철수와 영희가 벌이는 사이코드라마의 정서情緖는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숨기고 부끄러워한 시간들이 사실 철수와 영희가 벌이는 검은 유희는 ‘존재의 결핍’의 다른 얼굴이다  

 국정교과서 속의 철수와 영희와 나와 너가 그리고 우리가 벌인 계몽적 사랑은 사실은 일종의 전이轉移된 사랑이었고, 한국 사회가 열망하고 사랑하였던 대상이 사실은 무의식적으로는 다른 대상을 반영하는 것을 향하였다. 그것은 국정교과서에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 어떤 결핍된 대상이었다. 그러니 오석근의 철수와 영희는 한국인의 정상적 의식형성기에 버린 것들을 추스르고 재현하려한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라캉(Jacques Lacan)의 이상한 말이 떠올랐다

 “사랑,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전혀 원치 않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다.

  김노암(전시기획자)

전시일정 2008 08.02-08.23

전시 오프닝 2008.08.02 sat 6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