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의 민망함에 대한 연구: 속) 교수와 여대생

 누드의 민망함에 대한 연구: ) 교수와 여대생

아내가 아닌 여자 -> 모델과 작가 -> 교수와 여대생 -> 속 교수와 여대생 여기 열거한 제목들은 지난 3년여 동안 한계륜이 작업에 누드의 민망함에 대한 연구라는 대제 아래 자신의 작업에 붙인 부제이다. 제목들이 제시하는 도발적인 속성으로 해서 많은 이들은 불륜, 욕망, 사회고발적인 측면을 주요 골자로 해서 한계륜의 작업을 분석해왔다.  속편이라.. . ) 애마부인이나 속) 산딸기 등이 생각난다.  이번 전시의 전시제목에 연구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민망하기 그지없다.  ) 교수와 여대생작업이 속편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그것이 어떤 작업이 될지,  그의 작업 방향에 변화가 있을지는 작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알수가 없으며 아마도 우리는 전시 오프닝까지 답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그러나 미리 컨닝을 하자면 그의 비디오 시놉시스에는 옷을 벗기고 입히는 행위의 반복이아니라  한 교수가  마주앉은 여학생과 대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혼자 속으로 하는 생각의 전이경로가 자세히 적혀있었다.

 그의 비디오작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전조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작업에서 부가적으로 고려해야하는 부분은 무엇일까를 정의해 볼 필요가있겠다. 필자는 이번 글을위한 작가와의 대담에서 작업의도를 듣게되었는데 그는 앵그르의 <터키탕>이라는 작품을 보고 받았던 감동, 화면 그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성취하고 싶었다고한다. 다시 말해 너무나 달콤해서 질려버릴 듯한 미학적인 의 추구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앵그르의 <터키탕>은 누드의 아름다움을 고전적으로 표현한  걸작 중의 하나이다붓터치를 최소화 한 그래서 마치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과 같은 귀족부인들의  살결을 표현한 초상화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앵그르의 작업세계는 드가에게 가장큰 영향을 미친 예술로서 인체가 가진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는 들라크로아를 추앙했다고 해서 제자를 내칠 정도로 절제된 고전주의의 가치를 고수한 고전주의 회화의 대표 작가이다. 한계륜의 비디오 이미지 또한 미장센을 선호하는 작가의 취향을 반영하고있다는 지점에서 그가 추구하는 앵그르 미학의 교차점은 시작된다거의 흑백 비디오 이미지에 가까울 정도로 색상이 절제된 고해상도 (HD) 의 작업들은 연출된 무대 위에 세워진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한 것이다이러한 지점들은 단순하게 절제된 무대에서 연기하는 이미지를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한 동영상에서 보여지는 감성으로 구동희, 빌비올라, 유비호의 작업에서도 발견되곤하는 성향이다. 물론  이들의 모든 작업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편 앵그르는 초상화주문이 많아서 역사적인 사건을 그릴 기회가 적음을 항상 한탄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나폴레옹의 대관식>, <터키탕>과 같은 작업들이 앵그르에게는 가장 애착이가는 작업이 아니었을까싶다. 누드, 고전적인  색조와 표현 방법 그리고 사회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등 여러모로 한계륜의 작업은 앵그르와 연결지점들이 발견된다.

 한계륜의 비디오작업은 초현실주의와 같은 작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화나 조각 작품이 그러하듯이 내러티브에 방점이 찍혀있지 않다.  비디오라는 시간적 매체를 사용하고 이야깃 거리가 상상이되는 제목이 붙여지지만 이는 다만 그에게 편안한 도구와  전략적인 상황의 설정일 뿐.  스토리의 전개가 그의 작업에 큰 부분이 되기에는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성격들이란 상반된 지점들이 많다. 첫째, 너무나도 느린 아마 5분은 족히 걸리는 시간동안 옷을 벗()거나 다시 옷을 입은상태로 되돌아 가기 까지 10분이 넘게 걸리는 플롯이 그러하다.  비디오의 시작과 끝의 이미지가 서로 비슷하고 시작과 끝이 드러나지 않도록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끝없이 루핑에되어 보여지는 그의 작업을 전시장에서 관람하면 어디가 작업의 처음이고 끝인지 구분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하지 않는가 말이다더구나 옷을 벗는 장면에서 출연자들의 인체는 기술적으로(1천개가 넘는다는 주사선 하나 하나를 delay 해서 만들어냈다고한다.) 늘려서 마치 느려터진 회오리바람 모양의 vortex 가 되어버린다그러므로 언뜻 언뜻 보일락 말락하는 출연자의 누드연기는 무의미해지거나 축소되어진다. 미장센을 언급할때면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독일 감독 Robert Wiene 의 무성영화 The Cabiet of Dr. Caligari (1920)이다. 위키피디아의 정의에의하면 Mis-en-Scéne에 입각한 이 영화에서는 연출된 화면의 디자인이 감독이 의도하는 연기자의 내면의 상태와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계륜의 작업또한 누가 누구의 옷을 벗기고 입혔다 카더라가 아닌 행간을 읽어야 하는 지도모른다.

 옆으로 세는 듯 느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잠깐 시대적인 흐름을 이야기하고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흐름이 혹시 한계륜이 이번 작업에서 시도하고자하는 의도와 일치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비디오 아트를 무엇으로 정의 할것인가?  영화와 그리고 광고이미지와의 경쟁에서 비디오는 차별점을 혹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이전의 비디오가 그 차별점을 도큐멘타리에서 찾으려 했다면 현시점에도 도큐멘타리 비디오가 자신의 자리를 굳게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인가?   박찬경의 계룡산의 도사들을 도큐멘트한  <신도안> 또한  대중매체의 비디오 그래피와의 접점이 보이지 않는가?  헐리우드 영화를 예술적가치가 없다하는 것 만큼이나 무의미한 주장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비디오가  언제 영화에 대적할 수있는 경쟁력을 가진 적이 있었나? 적어도 수적인 경쟁에서 말이다그러나 물론 단편영화의 형식을 차용하여 내러티브의 전개를 택한 많은 비디오작가들의 노력이있었고 성공적인 작가도 많다. 얼마전 에르메스상 전시에 소개된 함양아의 작업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영화속 연기자가 대사로 전달하는 한시간이 넘는  줄거리의 기승전결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영화의 전체성이 전달하는 몇문장으로 집약될 수있는 메시지에 관심을 가졌나? 할리우드 영화의 그렇고 그런 결말들이 얼마나 우스운지 헐뜯으면서도 할리우드 영화를 열심히 보는것은 영화의 도입부분이 제시하는 설정이고 그 부분에서 이야기되는 과감한 대사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씬이 묘사하는 짧은 이야기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영화전체가 의도하는 주제와는 상관없는  각 장면의 인상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리고 다양한 감독의 문법을 비교 감지한다.

 그렇다면 2008년 이후의 관객들은   동영상 작업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감상하는 것일까?  이 시대 미디어 기술과 예술 모두는 관객의 미적 체험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변화한 양상이 예쁘게 보이지는 않지만 현학적이거나 계몽주의적인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의 조합이 행간을 통해 그리고 구조적인 배치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본다이 지점이 이시대의 동영상에서 관객이 가지고 돌아가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이러한 지점을 좋게 포장을 해서 얘기하자면  좀더 섬세한 행간에 잠재한 감독의 미적인 메시지를  감지하도록 하는 형식으로 예술이 발전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계륜의 작업으로 돌아가자한계륜의 비디오는 메시지 전달이 강한것이 아니라 설정이 강하고 이미지의 파편들이 주는 특정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그를 동시대적인 문법을 구사하고있는 작가라고 부른다.      

글 - 신현진 (쌈지스페이스 큐레이터)

전시일정 2008 11.08-11.29

전시 오프닝 2008.11.08 sat 6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