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우 개인전 만성적 판단유보

벽 앞의 선풍기

글.김노암(전시기획자)

2009년 오늘은 1999년으로부터 10년이 되는 해다. 밀레니엄이 도래했고 어느새 우리 곁을 지나쳐갔으며 이내 저 멀리 내달리는 뒷모습을 본다. ‘밀레니엄키드’라고 할 만한 이들이 학교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미술 현장을 종횡무진 한다. 오재우 또한 ‘밀레니엄키드’ 또는 ‘밀레니엄 제너레이션’이라 부를 수 있다. 한 작가를 ‘밀레니엄키드’니 ‘밀레니엄제너레이션’이니 말하는 것은 엄격한 또는 무모한 규정을 위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보다 적절한 지점과 수준을 찾아 이해와 감상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포괄적인 시각을 위한 것이다. 나아가 보다 효과적으로 오재우의 작업을 분석하기 위한 첫 단추로 이용한 후 용도폐기 될 기술적 용어이다. 실제로 곧 그렇게 되었다.

오재우는 선풍기, 정치, 벽, 국기, 분단현실, 어머니, 커텐, 미싱 등으로 확산되는 언어들, 삶의 기억들로 뒤엉킨 의식을 드러낸다. 개인이되 개인이 아닌 경험과 이야기들이 가득한 것이 또 인생일지 모른다. 그리고 예술은 그것에 이미지와 표현의 날개를 달아준다. 우리 주위는 예술보다 세계와 현실이 감각적으로 보다 더 섬세하고 날카로우며 직관적인 까닭에 미술가들의 의식은 연원이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하다. 불안하다. 방향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오재우의 작업을 어떤 갈래나 방향으로 접근해야 할지는 여느 젊은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미지수이다. 첫 개인전인 만큼 작가로서의 어떤 구체적인 위상과 장소를 적용하기 어렵다. 단지 이제 막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보다 구체적으로 한 젊은 미술가의 작가로서의 성장가능성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이번 전시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술사를 돌아보거나 또는 경험 많은 선배들의 조언을 떠올려보면 예술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해석의 입장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예술을 통해 또는 삶을 통해 만나는 리얼리즘이요, 다른 하나는 표현과 형식을 통해 만나는 조형주의이다. 달리 이야기해보면 예술가를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 예술가는 오랜 시간과 과정과 많은 내러티브로 이해될 수 있는 가하면, 다른 예술가는 짧은 기간에 단번에 비약적으로 접촉하고 그리 많은 내러티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야만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두 입장이 상호 엉켜있어 그것을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각 안에서의 사건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기획하는 이들의 경험에 비추어 직관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우리는 단지 그 잠시의 직관이 만나는 장소로서 이용할 뿐이다.

앞서 말한 바, 오재우는 아직 어느 부류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예술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길은 무수히 많으며 또 그 만남의 깊이 또한 무한한 만큼 한 작가의 변화무쌍한 감각과 활동을 한 두 단계의 경험만으로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재우가 몇몇 전시에서 보여준 직관과 영감, 표현형식을 찾아 구성해내는 감각을 신뢰할 뿐이다. 그리고 또 지켜본다. 젊은 미술가가 이른 나이에 보여준 가능성을 언제나 신뢰하고 기대하기에 우리는 너무도 크고 무거운 지난 시기의 경험과 역사, 그리고 명멸해 간 많은 이들을 기억한다. 젊은 예술가와 예술의 이념이 독단이나 어리석음 또는 치기어린 만용에 쉽게 빠져드는 것을 보아왔다.

여전히 세계현대미술의 변방에서 조금씩 투쟁하고 기록하며 어떤 예술적 해방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우리 앞에 주어진 가능한 과제라면, 오재우라는 젊은 미술가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그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전시 기간: 2009. 08. 01(토) - 2009. 08. 21(금)

-opening : 2009. 08. 01 (토) PM 6:00  

The Chronic Withholding of Judgement
 

An Electronic Fan Standing at the Wall
 

Written by Noam Kim
 

As we face 2009, already 10 years have passed since 1999. The millennium we encountered has passed away and we soon see its figure from behind. The so-called Millennium Kids pour out of schools and move energetically into the contemporary art scene. Oh jae woo is one of these Millennium Kids from the Millennium generation. It is not for the sake of rigorous or reckless regulations to call artists such names. It rather aims to promote a route of understanding and appreciation within a more comprehensive vision while also finding relevant and pertinent points. Furthermore, it can also be seen as a technical term, temporarily playing a role as the first step in an analysis Oh’s work in efficient methods were eventually abandoned and were soon processed in this way in more practical terms.
Oh discovers the consciousness which gets tangled with the memories of life and words that diffuse to such terms like electronic fan, politics, wall, flag, divided reality, mother, curtain, a sewing machine, and so on. The stories and experiences that are individual or don’t occur at the same time would be this so-called life. Art provides the sensitive language for this description. An artist’s consciousness is full of luminal and marginal parts since reality is more sensitive, delicate, and strategic than art. Therefore, their senses are uneasy and insecure. They seem to easily lose their bearings.
It is still unknown the specific route or direction to approach Oh’s work like is the case with many other young artists. It is also difficult to identify him with a certain specific phase or location. Oh is just about to take an initial step as an artist. In a more delicate sense, this exhibition could setup a fundamental base for forecasting his potentialities and future as a young artist.
We can recognize that our attitude or understanding toward Art has been largely divided into two methods while looking back on some advice from elders or at the traces of art history. One is Realism encountered through Art or life and another is Formalism encountered through expression and form. In other words, we can divide artists into two kinds. An artist can be read through the layers of time and other numerous narratives while the other method doesn’t need so many narratives, but rather prefers momentary appreciation. Of course, it is not proper to only simplify objects. One can say that dividing art into groups only appears within a larger notion, as they usually become entangled with one another. But it provides a chance to think with the aid of their experiences helping to direct us in practical terms. We only use it as a location for a temporary encounter between instincts.
Based on these words, Oh can not be yet defined or put into a certain group of artists. There are numerous ways to understand and appreciate Art and therefore it is not easy to prospect an artist’s changeable sensibilities and activities while experiencing only one or two steps of their process. We only can trust the artist’s sensibility to find and make up their proper route or language for expression, as well as their instinct and inspiration, which have been viewed in previous exhibitions. We still look at the artists and forecast certain points about their future. We remember numerous artists who have glimmered during past gloomy days and through the course of many experiences, as we always trust and have come to expect the exciting potential of young artists. We have seen many cases with young artists where the concept of Art has fallen into arbitrary decision, dullness, or senseless foolhardiness.
If our task is to find possibilities of artistic liberation while comparing to and documenting the margin of the international art scene, the purpose of this exhibition is to observe and evaluate Oh’s potentiality as a young artist.
 

-Exbihition: 2009. 08. 01(sat) - 2009. 08. 21(fri)
-opening : 2009. 08. 01(sat) PM 6:00  
 

작가 노트

<만성적 판단 유보>

글.오재우(작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

이 지겨운 말로 표현되는 현대 사회는 많은 부분들을 너무나 쉽게 지나치게 한다. 자신에게 쉽게 스며들어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 혹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은채로 살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쉽게 납득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사물들이나 상품들 이미지들의 사회적인 맥락을 이용해서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사회의 거대한 모순들에 개인적인 의문을 제기해 왔다. 개인의 영역으로 규정되는 부분과 사회적인 모순들 사이에서 예술적 매개를 시도해왔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나의 개인사를 통해 그리고 내가 접했던 일상의 사물들과 기억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커튼들 그리고 강하게 기억에 남는 이미지들. 대학을 들어오면서 선물 받게 된 양복과 항상 대립구도를 가지는 사회적 환경 같은 선풍기들. 이 개인적인 삶에서 비롯된 오브제들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여 사회적 맥락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국가적 상황, 또 좌우의 대립이 극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군인의 자식으로, 또 전역한 사회인의 아들로, 또 다시 의무적인 국방의 의무를 하는 한 개인으로, 또 다시 사회인으로 살아온 나에게 국가와 개인의 문제는 남들과 다른 의미로써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국가가 ‘요구’하는 혹은 사회, 집단이 ‘요구’하는 문제와 개인이 ‘선택’한다는 문제 사이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스펙타클 안에서 개인사라는 미세한 영역은 자연스럽게 침범당하고, 당연하게 사회의 군상으로 통합되는 것이었다.

수많은 가치의 난립 속에서 개인의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태에서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어떤 대답을 기대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을 산다는 것’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것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를 고민해왔다. 하지만 완전히 만족할 만한 답도 뚜렷한 해결책도, 그리고 만족할 만한 선택과 행위도 힘들어 보였다. 판단은 지연되었고 대답을 위한 목마름만이 더해갔다. 나는 만성적으로 판단을 유보시킬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처한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예술이라는 것은 그 질문들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조충연 개인전 Afourium(에이포리엄)전

전시 서문

A4risation

글.김노암(전시기획자)

푸른 하늘에 구름. 고층빌딩 외벽에 반사된 창공에 생긴 비현실적 검은 구멍. 창문이 하나 있고, 곧 하얀 A4용지들이 날린다. 마치 점거농성중인 누군가 던진 전단지 같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은 우리나라 사회현실의 한 단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조충연의 A4용지는 더 이상 실용적인 오피스용품이 아니라 의미 있는 전략적 매체가 된다. 분명 상상력은 습관과 일상의 어두운 면이다.

“모든 일상의 정보들은 A4risation(화)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듈화되고 변환되어 일정하게 적재되고 소통된다.

우리가 경험한 도시적 삶의 다양한 양태들이 A4로 수렴되고 치환되어 재매개되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뉴미디어 계보학의 복잡성을 파악하는 어떤 한 지점일 수 있겠다라는 가정을 세워본다.

조충연작가의 이번 전시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기반하고 있는 첨단정보사회의 예술가들 또는 예술적 상상력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반성의 계기를 통해 무심결에 우리의 손을 들린 A4용지는 정보적 가치와 해킹, 프로파간더, 전복, 해체 등으로 연이어 미끄러지며 현기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작가에게 그것은 동시에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의 징후로 읽힌다.

“정보의 위상학적인 변화들이다. 수렴된 정보들은 접히고 겹치고 펄럭이고 주름지며 돌돌 말린다. 그때 그것을 접고 있는 몸과 의식이 말리는 것인지 종이가 말리고 접히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평면적인 정보가 가졌던 지표성은 어느 순간 극적인 국면을 맞는다. 어느덧 정보는 기의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는 기표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도약을 한다.”

예술은 끊임없이 무언가로부터 이탈하며 자신의 영토를 구체화한다. 배제와 배제의 과정이 곧 예술의 전개과정이었다. 마침내 예술은 창백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20세기를 장식한 한편의 빛나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리고 무수한 에피소드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며 지나간다. 그러나 예술사적으로 예술은 한 번도 기술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의식이 그러한 시각과 판단을 보다 과장하여 학습한 것이다. 기술과 동거하던 예술이 분리되어 흘러흘러 전자정보, 디지털, 미디어의 이름으로 다시 기술과 조우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예술 찾기는 여전히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의 출반선상에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에게 기술은 예술과 인간해방에 꼭 필요한 파트너였다. 미디어에 얹힌 재현장치는 미적이자 정치적이다.

기술의 전유(專有)는 예술가들의 숨은 욕망이다. 그것은 상상과 환영의 표면에 자리한 검은 구멍이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무언가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낼 가능성들이 튀어나온다. 정보는 어쩌면 기술의 또는 예술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정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펙터클이 뉴미디어아트의 최전선(最前線)에서 진행 중이다. 사실 눈에 보이는 전선(戰線)을 그릴 수 없이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작가 노트

Afourium(에이포리엄)

글.조충연(작가)

프로젝트 구상의 시작은 지금은 잠복근무 중인 텍티컬미디어네트워크의 A4프로젝트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보의 기본단위로서의 A4에 대한 뉴미디어적 접근으로 기업이나 기관 내부의 정보 부스러기인 이면지를 해킹하고 그 정보를 재전유하는 기획으로 진행되었었다. 이번 전시는 그때의 이슈들에 대한 개인적인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단지, 아니 내 기억에 또렷이 남는 한 여름날 빌딩 창 밖으로 던져져 부서지던 A4들, 담겨진 내용 이상을 그려내듯 공중에서 부유하였고 배경으로 흐르던 몇 마디의 발언들,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사각 종이들을 잡느라 던진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발언자는 A4와 함께 공중에서 산개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사람들은 팔랑팔랑 구겨진 A4를 들고 다니다 나름 자신들만의 화일 방식으로 접어 변환시켜 옷안에 넣고 저장한다. 가끔 그것은 뜨거운 유월의 햇볕을 막아주는 가리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확장된다.

모든 일상의 정보들은 A4risation(화)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듈화되고 변환되어 일정하게 적재되고 소통된다. 20세기 초 수동식(신체의 행동양식 안에서 규정된) 타이프라이터 규격에 맞춘 A4의 기본 사이즈는 비율로 정의되고 자기 복제성 혹은 동일성의 방식으로 종이를 반으로 접거나 자르면 보다 작은 크기의 크기로 각각 이전 크기의 종이의 짧은 변에 평행하도록 반복된다. 마치 기학학적 프렉탈의 연속적인 자기 유사성을 담았던 것처럼 사회적, 공간적 알고리즘 체계를 드러낸다.

우리가 경험한 도시적 삶의 다양한 양태들이 A4로 수렴되고 치환되어 재매개되고있지 않을까? 그것이 뉴미디어 계보학의 복잡성을 파악하는 어떤 한 지점일 수 있겠다라는 가정을 세워본다.

모더니즘적 효율성체계안에서 모듈 혹은 기준, 규정으로 정의된 A4는 종이라는 물질성을 가지면서 가상의 매개가 된다. 우린 많은 것들을 종이로 시뮬레이션한다. 종이인형, 종이비행기, 종이집, 종이호랑이, 종이옷 등등. 언어와 함께 종이들도 표상으로 조직된다. 이때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보의 위상학적인 변화들이다. 수렴된 정보들은 접히고 겹치고 펄럭이고 주름지며 돌돌 말린다. 그때 그것을 접고 있는 몸과 의식이 말리는 것인지 종이가 말리고 접히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평면적인 정보가 가졌던 지표성은 어느 순간 극적인 국면을 맞는다. 어느덧 정보는 기의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는 기표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도약을 한다.

정보매체, 아니 정보의 자체의 기본단위로서 A4와 가실재의 물질성을 가진 종이가 실재의 가상이나 가상의 실재적 재현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 매개와 실재의 분리 불가능성을 통해 매개 행위가 또 다른, 많은 다른 매개와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재매개화(remediation)의 과정이 이번 프로젝트의 주된 관심이고자 한다.

-전시 기간: 2009. 07. 04(토) - 2009. 07. 24(금)

-opening : 2009. 07. 04 (토) PM 6:00

-opening performance: 2009. 07. 04 (토) PM 6:30

<관객이 참여하는 A4 퍼포먼스: 이소영(안무 및 움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