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Q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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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냐 삶이냐 그것이 문제구나!

예술은 그냥 노는 거다. 예술은 정말 노는 거에요. 제가 퍼포먼스에 대해 말을 많이 했는데, 고무줄이다, 엿장수다, 모든 게 제 마음대로다, 어린아이 옹알이다, 이렇게 예술에다 대입시키니까 경계도 없이, 꿈을 꾸는 것 같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교통체증이 벌어지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악한 중국산 장난감 장사꾼의 유혹을 매번 물리치지 못하고는 깃발을 달고 뱅글뱅글 도는 자전거인형을 산다. 기왕이면 남녀 한 쌍씩 맞춰 산다. 길을 걷다 골목에 버려진 돌맹이며 칠판이며 박스며 종이꾸러미며 심지어 부러진 삽자루까지. 그 용도나 기능,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쓰레기들이 마치 멋진 화이트큐브에 연출되어야 할 기가 막힌 오브제인양 운명처럼 다가온다. 거부할 수가 없다. 운명이니까. 그리고 예술이니.

이번 개인전은 한큐(윤진섭) 개인에게는 매우 뜻 깊은 기획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한지 40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 예술가로서의 삶과 함께 격려하고 힘이 되었던 동료 선후배 예술가들과의 과거와 현재를 찬찬히 되새길 수 있는 전시로 준비되었다. 40여년간 활동하며 만나온 예술가들과의 대화, 그들과의 교분 과정에 남겨진 편지, 오브제, 선물 등 다양한 흔적들이 한큐의 작업에 녹아들어온다. 예술에서 사람의 나이는 참으로 숫자에 불과하다. 정신적 유대를 통해 한큐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보다 10년이나 앞선 선배이자 전설적인 ST그룹의 최연소 맴버로 이끌어준 이건용, 성능경 선생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며 예술과 개인의 자유를, 자본과 권위로부터의 저항을 보여준다.


누구나 예술가는 다 그렇겠지만 제도화되는 것이 체질적으로 싫었고, 일탈행위를 많이 했습니다….
변치 않고 기념물처럼 고정된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그러므로 죽은 예술이 거주하는 미술관은 장례식장이다.

한큐는 작가, 전시기획자, 비평가, 교육자 등 팔방미인의 재기발랄함으로 1970년대 홍대 회화과에 입학한 20대 초부터 당시 관습적, 고답적 미술계를 혁신하려는 실험정신으로 주목받는 이건용, 성능경 등 선배 작가들과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해 온 윤진섭 선생의 예명이다. 한큐 외에도 매번 다른 예명을 사용하며 하나의 정체성에 구속받지 않으려는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 우리 예술의 수준을 아시아 최고의 반열에 올렸던 추사 김정희(1786 ~ 1856)의 아호가 334개나 된다고 한다. 추사(秋史),완당(阮堂), 예당(禮堂),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노융(老融), 과농(果農) 등. 한큐는 이러한 선례를 유쾌하게 수용하여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굳건하게 권력화되고 자기정체성에 매몰되어버리는 것을 죽은 예술이라 비판하고 그 해체의 방식으로 예명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혼선과 함께 정주하지 않는 개방된 예술가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려했다. 70년대 이후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하며 다변화되어온 한큐의 활동 배경은 이건용, 성능경, 이승택, 홍명섭, 이강소, 김용익, 김구림, 등 70~80년대 엄혹한 전체주의적 사회분위기를 냉소하거나 공모전이나 대학중심의 미술활동과 거리를 두며 자유로운 개인의 생각과 취미를 표현하는 작가들의 도전과 실험정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념미술, 퍼포먼스, 이벤트, 대지미술, 관객참여 등 한국 현대미술의 외연과 그 내용이 깊이지는 시기에 미술계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건용, 성능경 이 두 분을 대학생 때 만났다. 1970대 중반, 학생의 신분으로 이건용 선생과 이벤트를 같이 하다가 당시 인기 절정인 전위예술그룹 의 회원으로 영입되었다. 홍대의 대선배이기도 한 이 분들과는 호흡이 잘 맞아 사전에 협의를 하지 않아도 퍼포먼스를 함께 하면 무지하게 신나고 언제나 즐겁다.

한큐의 개인전은 오랜 기간 진행했던 드로잉, 아포리즘, 오브제, 사진기록 시각, 청각, 촉각을 건드리며 거의 모든 매체를 활용한 작업의 아카이브 형태로 연출되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거의 돈이 들지 않는다. 아니 아예 들지 않는다. 그저 주위에서 줍거나 얻거나, 선물 받거나 하는 살아있는 관계의 흔적들과 그에 대한 작가의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 해석, 코멘트, 약간의 감각적인 드로잉으로 구성되니 돈이 들지 않는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작가만의 유쾌한 지혜이고 노하우이다. 작가는 전시기간 동안 수시로 전시연출을 변경, 변형하고 첨언, 첨부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조금씩 매일 바뀌는 전시장과 그것이 연출하는 분위기는 유기적이며 유동적인 한큐의 삶과 생각을 마치 들이 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변화처럼 제시한다. 쉼 없이 변화하는 복잡다기한 예술가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 언어와 개념과 표현이 화학적으로 융합한다.

cricuartist(크리큐라티스트)는 critic(비평가), curator(전시기획자), artist(작가)의 합성어이다. 최근에 나의 삶을 총체적으로 묘사하는 키워드로 설정한 용어이다. 나는 이 세 가지의 삶을 살아왔다. 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작가로서, 80년대 후반부터는 전시기획자로서, 90년대 이후에는 비평가와 전시기획자, 작가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예술적 삶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일상적 삶 또한 내 삶을 구성한다. 밥을 먹거나 술 마시는 것 또한 내 삶의 일부다. 예술적 삶과 일상적 삶은 생활 속에서 믹싱이 돼 춤을 추는 가운데 발효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구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술은 경전이 아니며 그냥 심심한 물과도 같다. 그렇다. 예술은 발효이거나 물이다 썩지 않는 물-이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하나 발효된물은 불이 필요하지 않다. 예술은 춤춘다. 우리의 머리위에서, 가슴팍 안에서, 그 안에 오직 삶만이 존재한다, 단지 살아갈 뿐이다.

한큐는 한 개인이 성인이 되고 한 사람으로서 자기정체성을 갖게 되고 변화하는 세상과 갈등하고 타협하며 보내는 모든 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한한 삶과 운명과 예술과 사람에 대한 신뢰와 낙관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한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제 중년의 마지막 시기를 지나며 작가로서, 비평가로서, 기획자로서, 교육자로서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어쩌면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모양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는 예술은 없으므로.

그의 개인 이력은 사전에 정교하게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곧 한국 현대미술의 한 축을 이룬 실험적 개념미술가들의 활동과 겹쳐있다. 그러기에 한큐 개인의 삶은 자유로운 개인의 세계에 속하면서도 여러 세계가 공존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세계이기도 하다. 한큐 스스로도 예술가로서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자평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날계란을 던지고 검은 정장을 입고 대학로를 종횡무진하고, 하이힐을 신거나 히잡을 두르고, 당뇨로 고생하면서도 그 치료과정을 예술의 한 과정으로 삼아 작업을 하는 그의 낙천성과 힘 있고 유쾌한 표현의 근간에는 작가의 생각처럼 상당히 신비한 어떤 운이 작동하지는 않나 상상하게 된다.

내 친구인 고스톱 도사가 어느 날 말했지. 운칠기삼(運七技三), 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돼. 순간, 나는 무릎을 쳤어. 그렇지. 인생은 운이 70%고 실력이 30%야. 성공을 하려면 운이 따라 줘야 해.

- 아트스페이스 휴 운영위원장 김노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 개의 시선 : 고민지, 서용인 2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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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개요
아트스페이스 휴는 지난 2011년 파주로 이전한 후 시대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이슈와 대안을 찾고, 휴+네트워크 창작스튜디오와 긴밀한 협업관계를 유지하며 새로운 작가와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지원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울과 지역의 미술적 인프라를 연동할 수 있는 활동과 네트워크를 마련하며, 2012년 “유별난 탐구생활”, “엄청나게 쓸모있는 예술공작실”, “오픈스튜디오”, “아카데미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매해 입주작가 네 명을 선정하여 진행되는 전시 중 올해의 첫 번째 전시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 개의 시선’전은 입주작가 고민지, 서용인 두 명의 각기 다른 세계관을 지닌 작가들이 하나의 주제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마주보고자 기획되었다. 두 작가는 전시 제목이 담은 역설적 의미에 질문을 던지며, 일상의 흔적과 존재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대답하고자 한다.

▶2014 휴+네트워크 창작스튜디오 릴레이 개인전 일정
고민지, 서용인 2인전 2014. 03. 12 - 03. 21
김영미 개인전 2014. 03. 26 - 04. 04
심우현 개인전 2014. 04. 09 - 04. 18
정기엽 개인전 2014. 04. 23 - 05. 02

전시 소개
●고민지에게 일상은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거울이다. 시간 속에서 축적되고 자신의 기억 속에서 망각된 것들이 물리적 흔적으로 남는 곳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잃어버린(망각된) 흔적들을 포착하는 순간들은 작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순간들이다. 그것들은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것들이다. 그러한 우연은 자신의 일상과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이며 각성이다.
우리의 일상은 우연보다는 필연적이기만 하다. 그러한 필연적 질서가 남긴 것들을 작가는 우연을 통해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들 속에서 우연의 의미를 사유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거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기를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되는 작업들은 작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면서 발생하게 된 사물들이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작업에 사용되어지는 물질들에 대한 작가의 성찰에서 비롯되고 있다. 계란요리를 하고 남은 계란 껍질을 수집하거나 성냥을 사용하여 타버리고 남은 성냥개비들 그리고 원두커피를 내리고 남은 커피 찌거기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수집된 사물들은 작가의 삶으로부터 축적되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었던 증거이자 사실들이다. 그것들은 2차적 의미들로 포장되어지거나 예술품이 되기 위해 가공된 것들이 아니다. 이 사물들은 전시장에 전시되면서도 뒤샹의 변기작업처럼 어떠한 상징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작가는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의도로 제시되는 것을 거부한다. 사물 그 자체로 남아있기를 요구하고 있다. 작가는 그 사물들 속에서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쉽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서용인은 하나의 사물을 동일한 거리에서 반복적으로 감각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감각의 차이들을 통해서 작가는 지속하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운동성을 포착하려 한다. 그렇게 포착된 형태들은 규칙적인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형태는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필연적이고도 동시에 우연으로 규결되어지는 동시성 속에 머문다. 그렇게 포착된 흔적들은 현상의 증거가 되어 존재에 대한 사유를 불러온다. 사유가 머무는 지점은 작업의 형식이 이루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작가에게 사유는 형식이며 형식은 사유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으로부터 존재가 이루는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사유하면서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해하려한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의 일상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반복됨은 필연을 그리고 그러한 반복됨으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는 우연이다. 또한 이것은 구조로써 질서이자 사건으로써 차이를 의미하고 있다. 작가는 자본주의사회가 조작된 환영적 차이를 통해 평등을 이루려고 하는 사회이자 환영 속에 머무는 무기력한 구조라 생각하며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지루한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기위해 필연적 우연성인 참된 차이를 발견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참된 차이란 차이를 이루고 반복되지만 결코 새로움이라는 환영적 가치로 조작되지 않는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루한 것은 자본의 필연적 구조 속에 있으면서 새로움이라는 환영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환영이라는 새로움을 극복하는 것 그리하여 필연적 우연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작가의 의지이다.■서용인

작업노트
이 끔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가치기준이 아닌 참된 차이를 갈망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일 것이다. 나에게 예술은 단 하루라도 나로써 존재하며 그러한 자본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는 생각한다. 자본 종주국 미국, 영국 등의 주요 상위 1%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그것을 운영하는 자본가들 그리고 그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미술시장을 조직하고 조작하는 1%로의 딜러들의 손에 종속되어버린 미술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끌려 다닐 것인가! 언제까지 이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반복할 것인가! 예술의 가치가 돈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자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회복하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서용인(작업노트 중, 2014)

삶을 초월한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 힘든 환경이 조성 되었고, 이렇듯 비옥하지 못한 상황에서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예술을 찾는 것, 작업 자체를 삶을 지속해나가는 방법이나 수단으로 삼는 예술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좁아진 작업 반경을 모토로 내부, 즉 나 자신으로의 관찰로 이야기의 방향을 옮기려 한다. 작품에서 무엇을 피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일상의 사건, 사물들을 늘여놓거나 다시 조합하는 일들은 아직 많은 예술품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의미보다도 진실 되며 퇴색될 염려가 없는 본질 그대로의 것을 표방하고자 한다. 일상을 예술로 끌어오고 예술을 삶 자체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방식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예술 사이를 오가거나 혹은 그 둘을 꿰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에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논리에 종속되어 결정되어 지지 않는 작가의 존재, 작가의 정체성에 갖는 불안에 대한 대답 중 가장 실용적이고 솔직한 답이 될 것이다. ■고민지(작업노트 중,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