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s-scape: 심우현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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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정경(Eros-scape)

작가의 작가노트와 작업논문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심우현(1987~) 회화를 설명하기 위한 주요어는 에로스(=성애, eros), 로맨틱(=낭만주의적, romantic), 회화성(paintery), 그리기(painting)와 동작(gesture)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 근저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관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반영이 충실하고 폭넓게 깔려 있으며 그 세계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유동적인 에너지 상태의 에로스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심우현뿐 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 예술과 낭만주의의 상관성은 점점 증대되고 있으며 이 현상에 관한 다양한 매체 이론을 적용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디지털 시, 미디어아트 등의 연구 논문과 저술들이 창작자들에게 끼치는 뉴 미디어적 감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즉, 생생한 표현과 아주 섬세한 감정전달,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독창성이라는 가장 진보적이고 탈현대적인 동력을 낭만주의에서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주요 개념에 충실한 실제 작품의 형식과 소재, 즉 의식 세계 형성의 저변에 갈린 신화와 토템, 혹은 무속적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 색채의 사용, 스트로크, 화면 구성 등의 요소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작가가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풍경화의 장르 형식의 차용과 상징적 변용 작업들이 어떻게 자연 요소, 또는 자연물의 모방이 아닌 참조의 방식으로 실재에 근거한 심리적 상상계를 구축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매체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너무 오래되었고 진부함으로 치부되어 거의 실제 가치를 상실한 듯한 낭만적 개념들을 기계미학적으로 재생시키는 이 시도들의 의미를 밝혀볼 것이다.

먼저 심우현이 작업노트를 통하여 에로스와 로맨틱의 개념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의 작업은 만물의 탄생의 근원인 에로스(eros)를 중추로, 원시자연에서 날것의 에로스적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으며 이 유기적 에로스가 생물학적 충동에서 문화적인 충동으로, 또한 다른 국면으로 변증법적 사유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이 에로스가 갖는 힘은 양가적이다.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 아레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사랑을 관장하는 신인 에로스는 부모 신들이 지닌 상이한 능력처럼 서로 극단적인 성향인 ‘끌림’과 ‘쫓음’이라는 사랑의 상반된 힘을 지배한다. 그의 황금 화살에 맞은 신체를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화염처럼 사랑의 욕망을 끓어오르게 하거나, 반대로 납화살을 맞춰 무조건 상대를 증오로 밀어내게 하는 힘도 자유자재로 부리는 그의 장난스런 복수극은 요정 다프네와 오만한 아폴로 사이에서 벌어진 일방적 애정극도 참혹하게 빚어냈다. 프로이트에게 에로스는 성애나 자기 보존의 생의 본능을 의미하는 방어적 기제 용어이며, 소크라테스의 육성을 빌려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는 <향연>에서는 불완전함을 극복해나가는 자기 의지, 즉 완전해지기 위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바따이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 1897~1962)는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 전파 이후 종족 생산을 위한 성을 신성함과 생명으로, 쾌락을 위한 성을 저속함과 죽음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성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화적 뿌리를 캐려는 그의 <에로티즘(1957)>에서 에로스를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의 관계로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상식과 사회적 인습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부여되는 금기에 저항하는 모든 인식, 즉 위반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에로스를 바라보는 작가 심우현은 이미 우리들에게 예견된 죽음과 황폐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산과 창조로 나아가는 단순 변증법적 기능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도처에 편재되어 서로 끌리게 하고 세상을 구성하게 만들며, 우연한 조우가 거듭되어 낯선 사물들이 서로 만나게 하는, 그리고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장소와 배열의 근원적인 힘을 포괄하는 밀도의 개념으로 바로 이 에로스를 우리에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제안한다. 이것은 마치 이미 진리로 판명된 만물이 서로 끌리는 힘인 뉴튼의 만유인력과, 우주와 같은 진공 공간일지라도 빛과 에너지가 흐르거나 전달되도록 채워진 가상의 매개 물질 ‘에테르(ether)’의 특성이 혼합된 낭만화된 개념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에로스의 힘은 형체도 없고 생명 있는 만물이 탄생하기 이전의 카오스로부터 세계가 탄생하였고, 저 프로메테우스 빛이 미처 도달하지 않은 음영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 죽음의 세계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거부감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작가가 계속 앞으로 나가도록 이끌어 준다. 거대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이러한 마술적 힘의 근거는 존재론적인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로부터의 끌림의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에로스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세계 변화와도 맞먹는 혁명에 거의 대개 수반되는 잔혹한 폭력성은 은유적인 상징으로 대치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다시 플라톤에 의하면 표현은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 호소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물과 존재의 양상을 자기의 관점에 따라 결정짓는다. 18c 말엽 낭만주의에 찬동하였던 예술가들은 예술이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상상력의 영역이며, 이 상상력의 힘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에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지극히 깊은 통찰을 자의적이 아니라 필연성을 가지고서 말로 나타내고 있는 사유 방식인 것이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따라서 낭만주의 정신은 자신의 공상하는 것에 대하여 흡족히 여긴다고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주지적 입장의 계몽주의의 편에서는 ‘낭만적’이라는 형용사를 앞세우는 표현이란 근대의 위계적인 구조에서 일탈하는 탈 근대성-여기서는 진보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반동적이라는 의미-이자 저항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우현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부터 기인하는, 즉 자기로부터 비롯된 회화라는 확고한 원칙은 확실히 낭만주의적이다. 그가 작업논문을 통해 이미 밝힌 대로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법적 구조의 한계를 파악하고, 세계의 중심이라는 절대적 주관성을 내세운다. 본래 낭만주의는 예술가와 자연 사이의 신비스러운 교감 및 개인주의, 열정과 감수성, 상상력을 강조하고, 묘사적이고 섬뜩하며 이국적인 경향을 선호한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도 예술의 표현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개개의 작가 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었더라도 이성의 단계로부터 탈선을 감행하고, 설득의 방식으로 기호의 옮겨 쓰기에 대한 반기와 기계혁명에 의한 급속한 문화화에 대하여 ‘거리 두기’ 했던 그들 스스로 조차도 고전적인 묘사와 표현을 저버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심우현은 초자연성과 공포에 대한 관심을 보다 노골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심층부에 잠겨있는 사건, 기억, 이미지, 상징들을 얼룩, 연상, 살짝 드러내기로 화면 전체의 동적인 흐름에 거칠게 휩쓸리도록 한다. 마치 질투와 욕망으로 가득한 신과 인간이 함께 올림푸스 산정 아래를 거닐던 신화 시대로부터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운 드라마는 무시무시한 재난과 재해의 모습으로 현현되었던 것처럼 화면에 배치된 각각의 이미지 요소들은 우연한 조우를 통해 충돌하고 파열하며 강력한 에로스의 힘을 발산한다.

화면 속에서 공상적인 요소와 뒤섞여 변형된 신화와 화산 폭발과 같은 기록적인 재난과 사건, 짐승, 이방의 주제에 대한 온갖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기억에서 기인한 이국적인 성향의 상징물들의 위로 다른 색의 물감이 뒤덮여 삭제 혹은 지워지며 에로스를 통한 ‘관계 맺음’이 반복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낭만적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한 장소들은 고립된 체 사회 정치적인 개입의 거리를 유지하게 되어 이 세계의 심각한 문제는 가려지고 뒤덮이며 자연적 요소들을 닮은 붓질로 덧칠해져 은폐된다. 간혹 어떤 이미지의 부분은 소용돌이치는 표면을 다시 헤집고 불거져 나온다. 그리하여 이 화면에서 모든 위계 질서는 무너져 내린다. 화면 곳곳에서 모습을 일부분 드러내는 야생 짐승은 이성에 가려져 억눌린 성애와 같은 동물성의 혈통에 대한 은유의 방식이다. 비록 이것아 타나토스적일지라도 미지와 마주 대하는 작가의 두려움은 본능처럼 양자 사이의 긴장을 통해 드러난다. 이 새로운 은유는 언뜻 나이브해 보일 수 있는 화면에 긴장을 불러와 전체 요소들의 조화를 흐트러뜨리며 이성 본위의 합리성을 비판하고 전복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미디어의 계보학을 연구하는 조지아텍의 두 교수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의 공동 저작인 <재매개(1996)>는 미디어 역사의 통사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하여 ‘투명성의 비매개 원리’를 제안하였다. 이에 따르면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투시 원근법을 발명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그림의 화면은 다른 공간을 내다보는 창문이 되었으며, 그 투명한 창틀 너머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세계는 그 이전의 육안에 의존해 묘사해왔던 풍경들을 수치의 비례대로 변형시켜 자동 정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화가들은 실재감의 부각을 위해 나머지 필요성이 적은 부분을 축소시키거나 화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지워나가며 매체성의 투명화에 다가갔다.

그러나 비록 같은 삭제 방식일지라도 심우현은 저자의 흔적 지우기에서 ‘뒤덮음’은 투명성이 사라지고, 그의 작업을 감싼 분위기가 지극히 회화적(paintery), 즉 더욱 매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때의 붓은 머리로부터 이어지는 팔과 손의 연장, 즉 인공의 보철구이자 작가 신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그의 페인팅은 팔만 휘두르는 것이 아닌 다리와 전신을 움직이는 행위이며 붓질(stroke)은 연장된 손가락의 터치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동작 입력 장치를 통해 추가되는 유기적인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역동적인 화면을 따라서 강렬하면서도 대조적인 색점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관점을 인용하자면, 그림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구성체로써 새롭게 창조된 생태를 투영한다.

최근 심우현 회화에서 주로 사용한 색상을 살펴보면 적색조에 가까운 핑크와 자색조에 접근하는 블루가 다양하게 화면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낭만주의를 맹비난한 역설적인 낭만주의자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집필한 <색채론(1810)>이 설명하는 ‘물리색’ 이론에 의하면, 물리적으로 양극화된 색채 사이의 상승 효과로 인해 밝음과 어둠 같은 두 극단 사이에서 전체적으로 완성된 색채환을 이룬다고 하였다. 크고 작은 붓질의 흔적은 자연 요소를 연상시키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서로 연결되는 색점의 가까워짐과 떨어짐의 거리에 따라 표면으로부터의 깊이감과 음영의 차이를 느낄 수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대로 화면을 전체적으로 통일감 있는 유기적인 이미지의 추상적인 구성체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심우현 작품에서 선택한 구도에 있어서, 마치 조감도처럼 고각에서 아래로 내려보거나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화면의 시점은 마치 3인칭 롤플레잉 게임 속 공간의 시점, 좌우, 상하, 고저를 망라하며 자유자재로 이동한다. 또한 이미지 요소들이 시간의 선형적 순서대로 정렬하였을 때 연출되는 영화적 내러티브는 한 장면으로 빠르게 압축된다. 수 많은 정보가 흘러가고 또 소멸 직전인 세계는 이렇게 축약된다. 그렇게 압축된 자연과 현실을 따라 잡기엔 우리의 사유는 너무나 느리거나 무뎌졌다. 속도에 의존함으로써 중립적인 공간-유클리드 기하학-의 좌표 세계에 존재하는 완고한 물리적 규정은 효력을 상실한다. 정해진 상대적인 크기, 서로의 동떨어진 거리와 상관 없이 존재하거나 존재 했던 것들의 상관 관계들이 관계 맺고 거리 두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현상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우리 사고의 극적인 변속을 감행한다

<소멸의 미학(1991)>에서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는 개인의 의식 차원을 넘어 점점 빠른 속도로 소멸을 향해 질주하는 기술문명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현상들을 비평하면서 각 분야에서 유기체적인 활동의 정상적인 흐름이 끊기는 중단, 사고, 시스템 장애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피크노렙시(picnolsie)’를 폭넓게 사용한다. 실종된 시간과 기억을 복구하려 애쓰는 노력은 새롭게 체험한 비연속적인 시간의 체험감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이 미세한 발작 현상이 이미 기술사회의 문화생산양식의 숨겨진 무의식적 토대라는 점을 밝힌다.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 끊김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온전한 나인 상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 부재와 공백의 연결지점을 찾아 복구했을 때의 비현실감은 이미 해체되었던 속도를 재 조립함으로써 새롭게 축약된 현실감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체험은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심우현의 회화작업에서 천천히, 그러나 매우 정교하게 연출된다. 하지만 현재의 장소로 기억의 상징물들을 소환하여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파노라마(panorama)화와는 달리 심우현의 경우는 기억들 위에 현재 경험한 장소를 겹쳐 놓아 미니어처(miniature)화하여 비현실을 현재에 속한 것으로 만들며 때로는 서로 용해시킨다. 여기어 덧붙여 말하자면, 매체미학적인 관점에서 낭만적이란 것은 개인의 감정과 흥분이 여러 가지 교묘한 장치와 요소들을 통해 그것을 빗어내기 위하여 예술가가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정교하게 연출된다.

- 최흥철(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여덟번의 숨고르기: 김영미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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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베일 속으로 숨어들기
김영미 개인전_여덟 번의 숨고르기 展 전시

‘그렇게, 나는 나의 베일 속으로 숨어든다.’ 작가의 말이 묘한 울림처럼 의뭉스럽게 다가온다. 이미 작가는 이 게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심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작가에게 이 베일이란 단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비가시적인 막이 아니라 작가가 그 기능과 효과를 유념하고 있어, 그로 인해 더욱더 작업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특별한 효과를 지니는 베일로 선택된 것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베일 자체가 작가 작업의 의미 효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 이미 이런 심리적인 베일과의 상관관계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베일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작가와의 관계 속에서 재 정향된 읽기, 또 다른 해석이 요청된다. 작업 전반에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논리를 바탕에 두고 있는 작가의 경우 소위 말하는 정신분석학적 담론조차 일반적인 해석의 열쇠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풀려 하는 순간 다시 잠겨 지는 이중 효과를 지니는 것 같다. 작가가 이미 이러한 정신분석학 담론에 대한 일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 담론이 어떤 해결이 아니라 출발의 논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경우 이 베일로 인해 작업의 의미효과가 의도적으로 덧칠되고 두께를 지니게 된다. 적어도 비밀 같은 막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일은 시각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작업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하고 증폭시키는 어떤 효과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치 거울처럼, 작가와 작업의 의미를 계속해서 투영하면서 그 상관관계를 끊임없이 보여 지도록 하는 장치 말이다. 작가 자신, 혹은 세상에 대한 작가와의 관계, 태도를 포함하여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방식이긴 하다.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보는 이들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으로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는 그 관능은 바라보는 이를 애달프게 하는’ 그런 베일이기 때문이다.

이 묘한 베일 속에 보란 듯이 숨어 있는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가시성과 비가시성 전후에 자리하게 보는 이를 어떤 떨림으로, 애달픔으로 욕망하게 한다. 마치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알다가도 모르는 것, 알면 더 복잡해지고, 잡혀지지 않는 줄다리기 같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이며 심리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아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간극은 단지 좁혀질 뿐, 좀처럼 극복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극복되지 않으면 또 어떠하랴. 세상사 좀 꼬인들 삶의 의미며 가치가 덜해지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예술이 설 자리도 이토록 떨리고 애매한 그 간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 역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불안하고 균열된 심리에 대한 작가의 인식도 이러한 얼마간의 긍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균열과 간극을 그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경구마저 생각나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복잡한 경험에서 기인한 정신적 불안정성과 심리적 이상에 대해 수긍하고, 이를 극복하는 한 방법의 하나로 작업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 힘든 과정을 기꺼이 마주하면서 이를 대리하고, 우회하는 작업을 통해 온전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정공법의 길을 걷는다. 내밀한 트라우마조차 온전히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베일조차 선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베일은 거추장스러운 자기 가림막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자기를 새롭게 각인하고 감각케 하는 자기를 위한 색다른 장치일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 불투명한 가녀린 막 사이로 자기 전부를 온전히 감추지 못할 것임을 못내 알면서도 불안한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것은 비단 작가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의 소박한 심리일 것이다. 결국은 감춤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드러냄인 것들임을. 작가의 작업도 이러한 논리의 궤 속에서 작동한다. 다만 그 사이에 놓인 과정, 밀도나 강도가 남다를 뿐이다.

이러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드로잉이다. 드로잉은 하나의 형상이기 이전에 그 행위 주체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것들을 담아낸다. 흔적이고 지표(index)인 셈이다. 미분화된 개념의 밑그림이기도 하고, 어떤 의지와 정서적 표현의 얼개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작가의 경우 심리적인 밀고 당김을 길항하는 매개항으로 기능하기에 남다른 주목을 요한다. 의지의 작용이 채 미치기 전에 반복되는 선긋기는 심리적 강박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좋은 길벗이 되기에 충분하다. 강박이란 심리적으로 균열된 내부의 또 다른 자아가 외부에 반영되어 다시 주체로 돌아오는 정신의 작용이다.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하면서 작동하기에 반복의 형태를 띤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한 심리적 대응 또한 반복을 주요 기제로 할 수 밖에 없다. 집착적 충동이나 반복적 행위가 수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심리저변에 깔려 있는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치유하기도 한다. 작가의 드로잉, 선긋기도 이러한 강박에 대한 해소와 연관되어 있다. 사각형 형태의 패턴 모양 만들기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형태이긴 하지만 반복을 통한 차이화를 통해 점진적인 변화의 여지, 일정한 여유마저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혹은 강박의 불안감을 행위의 반복으로 도피하려 하는 것이고, 시각적인 반복과 균형으로 해소하려 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를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포르다 놀이(fort da game)처럼 언어적 작용으로 상실과 부재를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혹은 더 강하게 주체를 트라우마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하면서, 마조히즘적 방식의 고통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작가의 드로잉은 이 두 경우 사이에 자리하면서 작동한다고 보여 지는데, 단순한 상실과 부재를 반복하는 선긋기 이상으로 고통을 직접 대면하여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적극적인 행위, 곧 무의식적인 반복이 아닌 얼마간의 의지가 개입된 행위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여덟 번의 숨고르기가 자리하는 이유이다. 쫒기는 반복 강박이 아닌, 너른 숨을 쉬면서 긴 호흡으로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 그렇게 주어진 자기 자신과 온전히 대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라우마에 대한 단순한 해소가 아닌, 이러한 정신분석의 논리를 의지적으로 염두에 둔 개념적인 작업으로 읽혀진다. 이는 작가의 전 작업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 선긋기의 반복 강박의 논리에 깔려있는 밀고, 당기기가 다시 조형적인 흑백의 대립구조, 디지털 메트로놈 사운드의 청각적 진동으로 이어지면서 작업의 일정한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 조형성으로 머물 때조차 정지된 이미지의 고정된 의미가 아닌, 심리작용의 미세한 떨림을 반복하는 동적인 움직임으로 작업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 연동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효과는 작업 자체의 내용적 기반인 동시에 이와 관계하는 관람(觀覽)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같은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이와 연결된다. 움직임으로 이어진 애니메이션은 그 과정에 서로 다른 시간, 공간대가 교차하면서 작가의 지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상들, 현실과 비현실을 교란시키고 중첩시킨다. 심리적인 봉합일 수도 있으니 앞서 말한 선긋기의 강박해소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불안한 심리의 상태를 대리하고 우회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봉합이고 치유일 수 있는 심리작용들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이를 심리적인 것으로만 환원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심리를 기반으로 하여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감응(affect)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심리란 개인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특정한 것만이 아니기에 때로는 너와 나를 연결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너와 나의 개별 차이를 넘어 어떤 공유와 공감을 형성하게 하는 힘 작용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부단한 반복을 통해 균열된 심리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를 타인과 함께 공감케 하려는 심리적 의지의 작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한 심리란 타인에 대한 기댐으로 완화되기도 하는 법이다. 작가의 경우 이처럼 타인에 기대는 것 이상으로 작업을 통해 ‘타인화’ 혹은 ‘타인되기’의 과정도 더해지는 듯하다. 예전 작업에서의 ‘cheepy’라는 얼터 에고 설정도 그렇지만 이번 전시의 ‘Another Facet’ 시리즈의 경우, 고풍스러운 유럽식 스타일의 흑백 레드메이드 건축 오브제가 우선 겉모습부터 눈길을 잡아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존재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이국적인 빅토리아 스타일의 건물 양식도 그렇지만 흑, 백의 같은 쌍이라는 점도 이러한 알 수 없는 의미의 증폭에 관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하지만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부 구조가 더 의뭉스럽다. 자연스럽게 관음의 충동, 시선의 욕망에 빠져들게 하니 말이다. 빈 공간에 가구들이 얼기설기 엇갈래 배치되어 있는데다 이상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빛과 그림자가 음영진 채로 투영되어 있다. 누군가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의 배치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인데, 무언의 압박감이 은근하게 밀려오는 특정한 미장센mise-en-scene 효과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를 유아기적 선망의 공간일수도 있었음직한 서양식 건물에 심리적 긴장감이 충만한 이 빈 공간의 타인되기를 통해, 공간의 심리적 압박을 선 체험하면서 이를 다시 연동시켜 가시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비어있는 공간이기에 욕망으로 도달하려 하고, 그렇게 욕망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부재하는 비현실을 대면하고, 다시 현실을 넘나드는 과정 속에서 결국 이러한 공간 속의 타인되기는 ‘타자화 된 자기’, ‘자기화 된 타자’의 반복일 것이다. ‘타인되기’는 강박과 불안을, 그 해소를 다시 반복하는 제3의 인물로의 자기 전이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불안한 욕망을 해소하고, 다시 그 불안한 욕망을 욕망하게 되지만 타자라는 더 큰 울타리로 확장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러한 밀고 당김이 한편에서는 억압의 점증일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유희이고 향유일 수도 있음을 열어 놓으면서 말이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효과마저 작동되는 것이다. 모두의 문제, 더 넓은 보편적인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심리적인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레디 메이드 건축물 오브제인 ‘clock on the horizon’은 각기 다른 박자로 진동하는 메트로놈 소리가 더해지고, 흑과 백이 반복되면서 이러한 심리적인 동요와 그 반복을 증폭시킨다.(혹은 해소한다) 두 작업 모두, 그저 사물일 뿐일지라도 마치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작가 자신의 것은 물론, 심리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극적인 공간과 시간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바탕이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레디메이드인 점도 심상치 않다. ‘30days story’ 작업이 그렇다. 블랙 하드보드지의 패턴 작업 위에 잡지에서 오려낸 일상의 이미지들이 꼴라주 된 이 작업은 의지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작가의 얼마간의 조형적인 구성이 한 몫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연한 구성으로 엮어진 작업이다. 우연하지만 일상을 도배하다시피 한 이미지들이기에 이들 이미지들의 꼴라주는 유동하는 현재의 이미지의 풍경을, 무의식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현대의 삶을 연동시킨다. 우연한 이미지의 접합들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어떤 패턴이 반복적으로 자리하는 법, 현대인들의 끊임없는 욕망으로 뒤범벅이 된 바벨탑 같은 모습이 그런 것일 것이다. 이미지의 삶이 그렇듯 비록 허상이고 가상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현실의 삶에 일정한 영향력으로 자리하는 유동하는 욕망의 흐름들을, 욕망으로 덧칠된 하수사한 시대의 풍경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그 욕망의 끝에 대한 특정한 어떤 입장을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 욕망의 작동이 반복을 거듭할 뿐이며, 그 욕망의 풍경에 이 시대의 숱한 주체들이 부유하듯 매달려 있을 뿐이라는 암시 정도는 던지고 있는 듯하다. 작가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 대해서 말이다.

모두에서 말했듯, 작가는 여전히 어떤 베일 속으로, 그 불투명한 장막 속으로 숨어 들으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다.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반복을 거듭하여 반추하고, 성찰하고, 극복하려는 과정을 통한 과정이 그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은 것이 아니라 그 은밀한 개인의 감각과 사유의 상태를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시키는 것이다. 불투명 혹은 반투명에 대한 작가의 집착, 이를테면 린시드 오일이나 트랜시유를 그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갖가지 화폭에 다시 덧입히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단순히 작업의 보존을 위한 장치만은 아니다. 이러한 반투명의 과정은 자신을 일정하게 보호하고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가시화시키는 장치인 셈이고, 종국에는 타인들 혹은 어떤 공동체와 함께 공감하려는 노력으로 읽혀진다. 그 엷고 섬세한 막으로 인해 자신과 그 밖의 세상이 미세한 떨림으로 진동하는 것이고, 쉽게 보일 수 없는 작가 내면의 비가시적인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것이다. 투명함도 투명하지 않음도 아닌 거울처럼,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내밀한 감성들과 복잡하기만 한 심리들을 비출 수 있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고 보니, 또 다른 작업인 ‘star’에 내비친 저 아롱거리는 별 빛이 못내 아른 거리면서, 마치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간 심리 내면의 저 깊숙한 심연에 자리하는 어떤 못다 한 말들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 민병직(문화역서울 284 전시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