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 김미래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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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세상의 드로잉

내 말은 매우 무질서하고 계통이 없을 것입니다. 내 머릿속이 질서가 없고 계통이 없고 뒤죽박죽인 것입니다. 저는 엉망진창이고 뒤죽박죽인 세상 안에서 글을 써야 되니까 내 머릿속은 계통이 없는 것이 맞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통이 없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김훈

계통 없는 그림, 이미지, 뒤죽박죽의 구성과 선, 선들의 중첩과 충돌과 약간의 대상과 사건의 재현. 김미래의 드로잉들은 날카로운 또는 계획 없이 신경질적으로 그어댄 검은 얇고 선들인 어딘가를 향해 막 분출하고 있다.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약간씩 다른 표정과 시선으로 마치 관객처럼 그려져 있다. 이 구경꾼들 앞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연출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는 알 수 없다. 김미래는 개인이 바라보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어리숙하면서도 동시에 날카로운 느낌으로 표현한다. 종이를 사용한 스톱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 연극적 장치, 뭔가 알쏭달쏭한 미장센, 이것을 미술이라고 보아야하는 지 불편한 종이쪼가리들과 그 위에 그어진 상대적으로 거칠고 조악해 보이는 선들. 마치 프레스기 위에 놓인 종이 위에 의도하지 않았던 스크레치들이 깊이 패어든 것처럼. 그녀의 성장과정에 자국을 남긴 어떤 경험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소설가 김훈이 성장하는 과정에 치열하게 경험했을 우리 사회의 깊은 상처와 풍경, 발터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늦은 시간 밤길을 달려 집을 향하는 과정에 겪는 어떤 불안과 공포, 짜증과 불편, 그러나 집에 결코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존재는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고 쉽게 찢어지고 흩어져버릴 만큼 무의미한 것, 멀리서 보면 화려하고 거대한 세상이 가까이 들어가면 조그맣고 추레할 뿐이다.

김미래의 작업은 어떤 일생의 충격과 사건을 기록하고 이미지화하고 있다. 그것은 단말마적 외침, 비명, 소음 등이 뒤죽박죽 뒤섞인 내면의 풍경. 의성어는 더 이상 의성어가 아니고 의태어도 이전의 의태어가 아니다. 거의 모든 언어가 동등한 자격과 의미와 권위를 평등하게 나눠 갖듯.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사건과 현상, 의미를 담기 위해 고안된다. 드로잉은 미술가들이 만들어내는 신조어이다. 얇은 선으로 채워진 드로잉, 견고하지 않은 종이로 대충 얽어놓은 오브제와 설치. 애초에 조형적 완성, 어떤 종착지, 기승전결의 과정을 거친 결과를 보여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전시는 듬성듬성, 얼기설기 늘어놓은 드로잉으로 채워졌다.

오늘날 소묘와 드로잉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소묘는 전통적인 아카데믹한 재현미술의 한 수업과정 내지 형식이다. 그러나 드로잉은 그 의미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확장되어 거의 개념미술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전통과 연결고리는 희미해지고 마침내 폐기된 것처럼 보인다.

진지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전통적인 형식과 의미에 반응하기보다 어떤 거리두기를 해내면서 삐딱하게 바라보기를 선택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시선의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견지하는 의지다. 김미래의 작업에서 국제적인 또는 국내의 미술계 현실과 조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모색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세상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니? 좀 긍정적으로 보렴.’, 또는 ‘당신에게는 깊이가 없소’ 같은 말에 콧방귀를 펑하고 뀌는.

- 아트스페이스 휴 운영위원장 김노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