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여자가 꿈을 꾸었다: 강동주, 구명선, 김쎌, 이민선, 이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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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유토피아

<아는 여자가 꿈을 꾸었다>는 젊은 여성 작가 5명의 시선으로 존재를 바라보고 확인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아는’ 이라는 단어가 주는 익명성과 모호성은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전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속한 세계이며 곧 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전시는 꿈이라는 단어에서 기인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접근이나 페미니스트적 관점으로부터 적절히 벗어나있다. 같은 시대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작가들이 들려주는 지금의 여기의 나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공간이다.

구명선은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가녀린 여주인공에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를 입혔다. 무채색의 연필화는 현실의 화려함을 소거하고 과거의 꿈처럼 희미해진 기억 속을 헤집는다. 인물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작가가 일관되게 사용하는 방식으로 만화에서 놀라움이나 기쁨을 표현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인물의 표정이 공허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관객이 개입 할 수 있는 상상의 여지는 더욱 많아진다. <문뜩 떠오른 시간들>, <새벽이 흐르는 밤>, <누구나 마음속에 꽃 한 송이쯤은 있다> 와 같은 시적인 제목은 작품에 내재된 내러티브에 의문과 호기심을 갖게 하는데 작가는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대신 3인칭 시점의 짤막한 소설로 작가노트를 대신한다.

그녀는 가방에 꼭 필요한 것만 챙겨 넣기로 했다. 자존심 한 벌과 여분의 자기애 그리고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자신감 등등. 가방은 여행이 끝난 후에 담길 것들의 여유와 무겁다면 흔쾌히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애착으로 담겨졌다.

구명선의 작업이 개인적 경험과 문학적 상상으로 짜여진 한 편의 소설과 같다면 이민선의 작업은 은밀한 메타포로 채워진 비밀 일기와 같다. 작가는 본인의 이미지를 변형하고 신체와 사물과 합성하거나 일러스트적 요소들과 교배하여 상징적 알레고리를 만들어낸다. 신체 일부에서 새어 나오는 화려한 꽃 모양은 그의 모든 작품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는 바니타스를 상징하는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라깡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식 사유를 전복하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무의식과 환상이 개입된 해석을 내놓았다. 이민선은 현실적인 고민들을 자기 고백적으로 재현하고 의식 저편에 있는 공간에서 새롭게 편집하고 조작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과정을 거치는 듯 보인다.

김쎌은 보다 적극적으로 본인의 이미지를 작품에 등장시키는데 스스로를 세포(cell)화하여 존재를 무한히 증식한다는 의미로 셀러문(cellormoon)이라 명명한다. 작가는 신체의 일부(특히 손이나 눈)로 화면 전체를 덮는 평면 작업 <셀 신드롬>이나,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미세포의 요정’을 통해 본인의 신체를 작품의 유일한 재료로 사용하며 나르시스트적 에로티즘을 표출한다. 이는 나르시시즘의 부정적 의미와는 달리 작품의 신체의 발견과 아름다움을 통해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한다.


이현진의 작품 속 소녀들은 사회적 문제를 대면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한다. 소녀들이 우아하게 온갖 종류의 고기를 먹는데 집중하고 있는 영상 작업 ‘Meat eater’는 웰빙과 채식을 종용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반기를 드는 작품이다. ‘I quit supporting killers’는 스타벅스 로고에 등장하는 여신이 소녀들을 위협하는 괴기스러운 존재로 표현된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을 종용하는 사회적 테제에 냉소적으로 반응한다. 알베르 카뮈는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욕망하는 한, 삶은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 이현진의 작업은 삶의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는 작가의 이유 있는 반항이 담겨있다.


강동주의 작업은 주변과 일상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부도심_청량리 영등포 청량리’는 그가 태어난 청량리에서 영등포까지 그리고 다시 청량리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한 드로잉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여 어둠이 짙어지고 도심의 불빛이 생겨나는 동안의 빛의 움직임을 먹지에 기록했는데, 종이와 먹지에 남겨진 흔적은 각각 어두움의 소멸과 생성을 만들어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홍성에 머물며 거주했던 모텔 창문을 통해 풍경의 변화를 보여준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일몰의 순간은 익숙해진 낮의 풍경과 이별함과 동시에 낯선 밤의 풍경과 조우하는 시간이다. 빛과 어두움은 강동주의 작업에서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발견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타자성을 중심으로 현상학을 정립한 레비나스는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계 안에 있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정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진정성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레비나스는 향유하는 주체와 타인을 위한 주체로 구분한다. 향유하는 주체는 먹고 말하고 잠자고 걷고 하는 일체의 행위를 통해 존재 유지를 하는 나의 세계이고 타인을 위한 주체는 내가 아닌 다른 자를 향한 사유이다. 나의 세계와 타자를 통한 나 사이에 발생하는 연속적인 충돌과 갈등은 존재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근거가 되며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아는 여자가 꿈을 꾸었다’는 내가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가 겪었을 직간접적 경험을 다루는 5명의 작가의 상이한 관점과 방식을 살펴보고 이해하려는 전시이다. 진정한 삶은 부재한다는 절망적인 현실에서 끊임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타자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과정은 예술 행위의 출발점이며 진정성을 회복하는 방법이 될는지 모른다.

- 아트스페이스 휴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