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 연구: 박준범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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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쾌감 또는 개념과 논리의 감각화

1. 경험과 텍스트

혼자서 무언가에 몰입한 순간, 좌우가 헷갈리는 경험을 한다. 운전 중에 갑자기 통행방향이 헷갈리거나, 햇빛이 강할 때 어떤 사람은 오른손으로 해를 가리고, 어떤 사람은 왼손으로 해를 가린다. 결국 믿음이나 관습도 사회적 환경에 의해 모태신앙처럼 학습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오른손, 왼손잡이도 선택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개인적 체험은 반박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개인이 경험한 것이고 실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문제와 그것이 외부로 발현된 것이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그것은 객관적인 상관관계에서 논의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그것의 진위여부를 완전히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확실성과 개인적 체험의 확실성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그러나 가끔 또는 자주 우리는 일상의 세계에서 이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예술행위는 개인의 체험의 변화와 확장과 그 특이성에 대해서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진보나 발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무한히 변동하는 운동과 그 과정의 축적을 통해 우리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과 우발적일지라도 완전한 경험이라는 이상적 상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적 경험의 상태란 개별자로서 예술가 개인의 체험과 관련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독자적인 경험의 세계로서의 이상적인 경험을 가리킨다. 이상적 경험이란 현실의 조건과 관계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술적 표현이란 일종의 과잉 주장에 해당한다. 여기서 과잉 주장이란 이미 논의의 장소가 개인의 체험의 영역을 벗어난 지점까지 개인의 체험을 확장해서 그 확실성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영역 밖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른 사람의 경험 또는 주장과 만나게 되고 충돌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 설정, 경험의 확실성이 객관화 되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박준범의 영상은 그러한 개인의 경험과 확실성에서 출발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표현들이 어떤 때는 강하게 제시되거나 또 어떤 때는 느슨하게 물러선 형태로 드러나다.

시청각이 함께 운동하는 영상 이미지는 개인의 경험 단계를 벗어나 일종의 소통을 향한 출구의 문턱에 서있게 된다. 그것은 텍스트로 번역되고 이해된다. 텍스트화하지 않은 영상은 단지 개인의 사건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사건이 되지 못한다. 개인과 개인들 사이를 교류하는 텍스트화의 과정이 박준범의 작업 내부에서, 그리고 전시장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2. 계획 그리고 우연 또는 오류

정확하게 표시 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의 수치화는 결국 ‘신중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선택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의 수치화이자,
최종선택을 위한 모든 단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박준범의 영상은 단순하다. 한 사람이 읽고 다른 한 사람이 적어나간다. 그렇게 정수인 소수를 분수 형태로 표기해나가는 과정이 기록된다. 정수로 나눠지지 않는 소수는 무한히 분열하고 배열되고 운동한다. 180×250mm의 모눈종이 칸에 일렬로 54개의 수(분수)를 읽고 쓰는 과정이 지속된다. 오른손으로 쓰고 영상이 반전되며 왼손으로 쓴다. 다시 왼손으로 쓰고 오른손으로 쓰는 영상으로 역전된다. 연출된 6개의 영상 가운데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의 영상이 그대로 상영되고 있다. 3개는 좌우반전 된 영상이고 나머지 3개는 정상적으로 촬영된 영상이다. 그러나 좌우 반전된 영상과 그대로 상영되는 영상의 구별은 관찰자에게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작가의 관심과 섬세함의 정도와 관객의 입장에서 일반적 조건에서 경험하거나 감상하는 수준은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건은 전후좌우(前後左右)가 변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위치와 방향을 상실한다. 영상은 수에 대한 또는 질서나 법칙에 대한 어떤 강박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자폐성을 보여준다.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또는 숫자를 기록해가는 방향과 숫자들 사이의 수학적 질서 등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무의미의 차원과 마주하게 된다. 이 수들을 기록하고 또 그것을 기록한 영상을 우리가 관찰하거나 감상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다른 영상들을 보자. 퍼즐의 형식을 사용한 작업으로 작가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을 따라서 서로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하나의 약속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기록된다. 참여자들은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작업과정에 참여한다. 시작점과 도착점만 정해져있다. 언어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과정은 무한히 변화하는 경우 수를 보여준다.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다문화사회에서 우리의 사회적 긴장과 상관관계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그의 영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미리 약속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참여자 개인의 사회성과 관계성, 태도와 행위의 개인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작가의 의도는 확정된 사건과 사건 사이에 벌어지는 불확정적인 운동 상태를 주목한다.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상수는 국가나 언어에 따른 환경적 요소가 아닌,
각각의 개인이었다. 개인이 이 작은 사회에서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반증하는 결과였다.

박준범 작가가 지속해온 작업은 대부분 비선형의 규칙을 따라 무한히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들이다. 어떤 영상은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어떤 영상은 무미건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현실 비판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계획된 작용과 반작용, 우연적인 작용들의 다양한 형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몽상적이며 문학적인기도 하고 기술적이고 수학적이기도 한 예술의 복잡하고 이중적이며 기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텍스트로 번역되는 영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논리체계를 갖게 된다. 박준범은 결과에 앞서 그 이전에 설정하는 가정(h​ypothesis)을 이미 갖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영상은 설정된 가정과 확실성을 향한 운동의 기록이다.

비전과 신념의 문제인데, 작가가 설계하는 연출은 정확성과 명료성을 드러내려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그 모호한 논리의 과정이 뒤틀려버린다. 미적 쾌감과는 거리가 먼 무미건조한 영상과 그 과정에 지적 게임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유머나 우발적인 쾌감이 생긴다. 작가는 자신이 설계했던 아이디어가 딱 떨어지는 순간 느끼는 쾌감이 있다고 표현한다.

오류나 무의미한 정보들을 가득 모아보면 실체에 접근하는 정보나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 교묘한 쾌감 또는 개념과 논리의 감각화

작가의 영상은 작가 개인의 발상(發想)과 사색(思索)의 과정이고 한 변곡점만이 제시될 뿐이다. 합리주의는 실험적 모험을 포기하지 않는다. 작가가 제시하는 수학적 표현, 기계실험과 같은 형태로 또는 공학적인 제스처로 영상을 제작하는 것은 일종의 수학적 논리나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패러디이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작가 개인의 깊은 신뢰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가 몇 가지 요소들을 미리 준비하고 나름으로 계산한 후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변화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연출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철저한 계획과 예측불허의 우연성이 결합하는 것은 현대예술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다만 작가가 바로 그 작업을 통해 어떤 계기로 그러한 사건과 재료와 의미와 메시지에 집중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내 작업은 비디오의 특이성과 그 작업 과정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행위다. 내 작업의 수치화된, 또는 건축적 표현, 구조적 해석, 앞서 말한 한 개인의 ‘인성, 성향’과 관계된 나의 유전자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수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 또 미적 쾌감을 느끼고 심지어 영적 또는 신비 체험을 하기도 한다. 자연과 세계의 완전한 운행은 완전한 존재를 설정하게 되고 또 반대로 우연과 혼돈, 예측 불가한 사건들은 인간을 벗어난 어떤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또 그럼으로써 숭고한 수준의 미적 경험을 하게 한다. 논리의 완전성이나 또는 논리 과정에 불거져 나오는 모순과 오류 그 어느 것도 모두 완전한 존재나 완전성의 실재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설명 가능한 것과 역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이 하나의 실재(리얼리티)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 기이한 논리는 예술분야에서 매우 익숙한 것이다. 전통적인 것이다.

기술적 완성과 예술적 완성은 다르다. 기술적 강박과 예술적 강박은 다르다. 우연과 혼돈의 섬세한 연출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적 감각의 문제이다. 그 감각을 뭐라 규정할 수 없지만 분명 매 순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임 설계자나 초정밀 집적회로 설계자들, 이론물리학자들이 느끼는 쾌감을 비유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교묘하게 계산된 또는 계산 과정에 있는 수식의 감각화이거나 개념과 논리의 감각화로 표현된다.

*파란색으로 표기된 부분은 작가와의 대화에서 발췌함.

- 아트스페이스 휴 운영위원장 김노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