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CK: 유창창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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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 08.22

추락하는 것들의 유토피아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진부한 농담처럼 들린다.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만한 화두인데도 대부분 그 진지함에 질려버리곤 한다. 삶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실용적인 사고 습관이 이를 가로막는다. 삶을 통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우물 밑에는 독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우물 밖에는 사자가 기다리고 있으며,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쥐들이 쏠고 있어도, 흐르는 꿀을 받아먹어야 하는 게 인생 아닌가. 하지만 이런 톨스토이의 통찰 역시 인생의 굴레를 벗어날 방법은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철지난 비유를 한 위대한 지식인의 아는 척쯤으로 치부하고 금새 다른 일에 몰두한다.

유창창은 종말로 향하는 다양한 흐름들을 작품 속에 설정한다. 이 흐름은 중력에 의해 추락하는 것들, 물감과 함께 흐르는 풍경, 폭포, 생존을 위해 이동하는 동물들이다. 한 미친 기장이 조종하던 추락하는 비행기의 탑승객들은 죽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유창창의 ‘추락하는 비행기와 탑승객’ 시리즈는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이 닥칠 것을 예고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포옹 하는 연인들, 담배를 피우는 아이, 메롱을 하고 있는 아이, 머리가 빨개진 사람 등, 탑승객들은 낙하의 압력과 공포로 얼굴이 기괴하게 변형되어 있다. 한편 추락하고 있는 순간에도 웃음을 띠고 있는 미친 기장의 모습은 공포로 얼룩진 승객들의 모습보다 섬뜩하다. 기장이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미쳤는지, 혹은 원래 미쳐서 이 비행기가 추락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공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으로써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기장은 원치 않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승객들과 달리 유일하게 자신이 죽음을 선택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죽는 동시에 죽어 있던 미지의 것들이 소환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될 작품들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시리즈로 제작되었는데, 각 시리즈는 특정한 서사를 담고 있다. 작가는 작품에 착수하기에 앞서 주제별로 이야기의 커다란 윤곽은 잡아놓지만 구체적 내용을 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작가는 작업에 들어갈 때 캔버스에 작품의 서사를 만들 수 있는 포석(布石)이 될 만한 이미지들을 그리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둑에서 집을 짓듯이 포석의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덧붙여가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내면에 있는 파편적 이야기들을 화면 위에 끄집어내고, 마침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려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 다가오면 견고한 생각의 균열과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익숙한 농담 같던 질문은 영혼을 삼켜버릴 듯 다시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다. 지금까지 익숙하던 모든 것들의 조화가 깨지고 낯선 혼돈 속에 빠지는데, 이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이전의 조화와 익숙함에서 벗어나 객관적 정신이 되어 보기도 한다. 운명에 대해, 세상에 대해, 심지어 우연에 대해서. 아는 척 하면서 말이다. 다시 규칙과 조화를 찾기 위해 혼돈이 작은 점으로 보일 때까지 생각은 높은 곳까지 가본다. 질문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에 몸을 맡기기 위해서.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죽음 외에는 다른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도’ 시리즈에서 작가는 “지도에 뿌려진 정액이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한다”며 좀 더 내밀하게 숨겨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지도는 평면에 지구를 도식화, 기호화하여 표시한 것으로, 지도를 보는 이는 마치 신과 같이 외부에서 지구를 조감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지도에 캐릭터를 그려 넣거나, 기호의 본래 의미를 지우고 새로운 기호로 채워 지도를 재구성하면서 권력적 시선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지도 위에 그려진 새로운 이미지는 경도와 위도 속에 갇혀있는 엄숙한 지도를 간지럽혀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한다. 웃고 있는 지도를 다시 박물관의 죽은 유물처럼 쇼케이스에 담아 객관적 관찰의 대상이 되도록 한다.

유창창의 작품들은 생명체처럼 진화하는데, 예를 들어 추락하는 비행기와 탑승객 시리즈 중에 는 2009년에 제작되어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변형되고 있는 작품 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라는 제목으로 화면을 90도 회전하여 바로 서 있는 인물을 바닥 쪽을 향하게 한다. 이로써 홀로 군중 속에서 벗어나 있던 비행기의 기장 역시 추락의 운명을 맞이한다. 이처럼 작가는 가장 미적인 순간에서 ‘완성’하지 않고, 파국에 이르더라도 이야기의 끝을 맺으려고 한다. 2010년에 시작된 에는 동물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각각의 시리즈에서 작품 화면에 흐르는 물감은 방향성과 속도감을 더하며, 캔버스 위에 퍼지고 섞인 후 그 위에 덧칠해진 물감은 깊이를 만든다. ‘풍경’ 시리즈는 이렇게 그려진 강렬한 원색의 산과 하늘이 용암처럼 굽이치며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다. 풍경화 안에는 이런 혼란을 ‘알고도 모른 척’, 혹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척’하는 인물인 ‘척(Chuck)’이 등장한다. 풍경화 속의 척은 세상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며 세상의 일부로 살고 있다.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른 척 한다는 것은 복잡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이는 마주 본 거울 속 형상이 서로를 비추면서 반복되는 것과 같이 끝없는 기만이다. 기만적인 모습은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려는 보편적 인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상징적 인물인 척은 커다란 눈으로, 머리만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뾰족한 막대기 등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유령처럼 세상의 외부에서 관념으로만 존재하기도 하지만 풍경 속에서는 한 낫 작은 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불완전한 형상이 말해주듯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위장하며 불완전한 세계의 한 경계를 붙잡는다.

유창창은 죽음, 혼돈, 디스토피아 등 삶의 어두운 측면을 희화적으로 그려낸다. 척은 카오스 속에서 두려움을 회피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척이 당면한 파국은 생리적, 물리적인 죽음에 국한된 아니라, 인생의 균열을 마주할 때마다 낯선 공포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야만 하는 우리 삶과 역사의 마디들일 것이다. 추락하는 비행기의 기장처럼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마디들을 웃으며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작가는 이처럼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귀여운 만화 이미지와 화려한 색채를 이용해 유토피아적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유토피아는 없으며 욕망이 투사된 농담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된 역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의 권력을 조롱한다. 서로 결합할 수 없는 것들의 모순적 관계의 연결고리를 찾아 형상을 입히는 것이 작품의 과정이 된다. 균열이 만든 심연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림 속의 산은 높아지고 이 괴리를 메우기 위한 작업은 반복적인 것이 된다.

이런 역설들은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회화가 혼재되며 뒤섞인다. 일반적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만화 캐릭터는 진지한 회화적 형식 속에서 광대 역할을 하게 되는데, 즉 거짓된 조화 속의 균열을 드러나게 한다. 순간, 만화를 표면적으로만 해석했던 한계, 즉 아는 ‘척’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면의 비극이 드러난다. 그리고 곧 작품들이 실은 미친 기장처럼 웃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종국에는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웃고 있는 척 했다는 것을 말이다.

- 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