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아 프리오리: 고등어, Jinny Yu, 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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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30~09.19

몸의 아 프리오리 / L’a priori du corps

“꿈꿀 겨를도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만이
견뎌낼 수 있는 역동성”
- 질 들뢰즈

예술에서 몸이란 무엇인가? 한편으로 그것은 예술가가 행위를 수행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가 완결시키고자 하는 최종적 대상이다. 수단으로서의 몸과 대상으로서의 몸 사이에는 그래서 일종의 분열 또는 불충분함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잔여가 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술의 ‘아 프리오리’(a priori)다. 아버지 유령과의 맹세로 인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오필리아에 대한 햄릿의 고뇌와 주저함을 한 번 생각해보라. 만약 셰익스피어의 왕국에 아버지와 아들의 연대만 존재했다면 비극이라는 예술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몸(햄릿)이 순수하게 욕망했던 또 다른 몸(오필리아)에 다다르지 못하는 수행성의 방황에서 시작되며, 그것이 또한 예술의 최종적 완성을 붕괴시키는 간계이기도 하다.
종착점에 이르지 못한 이 방황으로 인해 예술은 목소리를 가진다. 언어를 통해서건 이미지를 통해서건 혹은 몸을 통해서건 예술은 어긋난 운명, 뒤틀린 시간을 바로잡기 위해 언어를 주조하고 그것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예술의 언어와 일반 언어의 차이는 일상적 말하기가 중단되는 곳에서 예술의 말하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하기 위한 말하기, 이미 말해진 것을 취소하는 말하기,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밖에 없는 계속하기이다. 만일 예술이 이러한 아프리오리의 줄타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저 시대적 사용용도를 가진 지시적 기호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 시대를 터질 듯 채워놓고 있는 예술적 수식어로써의 기호들 말이다.

<몸의 아 프리오리> 전시는 이러한 기호들의 최면술과 환각술에 저항하면서 예술의 아프리오리를 탐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예술의 몸, 예술에서의 몸, 예술가의 몸에 대한 목소리들을 한데 모아놓고 그것들이 서로의 낯설음으로 인해 빚어내는 공동의 어떤 협화음을 만들어보는 것이 전시의 목적이다. 시각예술에서 몸은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페미니즘을 필두로 한 현대예술에 이르기까지 예술사의 가장 친숙하고 중심적인 주제로 다뤄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몸들은 시대적 감수성과의 길항관계 속에서 미적 이상을 구현하는 재현으로서의 몸이거나 시선이 탐닉하는 욕망으로서의 몸, 정체성을 항변하는 성(性)정치로서의 몸이었을 뿐이다. <몸의 아 프리오리>는 문화적 맥락이나 사회적 조건이 부여되기 이전의 몸으로 되돌아가서 비천하고 나약한 예술의 물질적 실존으로서의 몸을 펼쳐내려 한다.

타자의 응시와 관계에서 구성되는 신체의 불안을 매혹적인 도착적 감수성으로 탐구해 온 고등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내면의 억압들과 갈등하고 분투하는 예술가의 몸에 대해서 대형 연필드로잉 작업으로 펼쳐놓는다. 실재하는 사물과 공간의 낯선 얽힘을 통해 냉정하면서도 고요한 사진의 회화적 이미지를 구축해 온 이민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뜨거운 회화와 차가운 사진의 중첩을 통해서 예술에서의 몸이 겪는 분열과 불화를 제시한다. 한국계 케나다 작가인 지니유는 시각예술에서 회화의 물질성과 형식들이 차지해 온 권위를 해체하는 개념적 작업을 펼쳐왔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발화의 순간으로만 포착되는 예술의 몸에 대한 불가역적(irreversible)이고 비가역적(nonreversible)인 폐쇄성을 장례식의 제의(祭儀)를 차용해 영상작업으로 선보인다.

<몸의 아 프리오리>는 감각하는 물성으로서의 살로부터 시작해서 낯의 이성이 망각 속에 묻어두는 존재의 육중함을 거쳐 피로와 소진으로 추락할 때 부딪히는 존재의 바닥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래서 아마도 체념이나 무기력, 마비 혹은 표류 같은 것을 찾아나서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의 아프리오리에는 햄릿의 결심을 흔들리게 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어떤 저항이, 소비자를 유혹하는 상품이거나, 예술가 자신을 과시하는 포르노이거나, 시대의 우울을 망각하게 해주는 최면제가 되기를 거부하는 몸의 어떤 물질적 실존이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다. 이 목소리로 소환된 예술가는 베케트의 표현을 빌자면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믿는 바를 말할 수 없기에, 그렇기 때문에 거의 항상 말할 수밖에 없는” (사무엘 베케트, 『몰로이』, 김경의 역, 문학과지성사, 2008, 41쪽)자들, 한 마디로 세이렌에 매혹당한 자들이다. 의식이 망각하고 있는 살아있음의 동물적 무거움과 존재의 한없는 가벼움이 지금 여기 우리 시대에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역사 속에서 공유해 온 최초의 계약이자 평화의 조건이라고 답하겠다.

- 전시기획 이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