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속의 이미지: 안상훈, 조현선, 하지훈

2.jpg


2018. 03. 07~04. 03

이미지로 위장된 의미의 탈주

회화 이미지는 영원히 평면 속에서 안식한다. 한때 회화의 사명은 완전하고 독립된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었으며, 그것만이 회화가 가치를 갖는 이유였다. 회화적 재현은 영원한 생명을 연기하고, 공간을 가장하지만 현실세계와는 분리된 저 너머의 세계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언제나 한결같은 그림 속 이미지는 영원한 이상향 같은 것이었다. 회화가 구현하는 것은 시각화된 이념이자, 감각의 저 편에 있는 이념의 세계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라 해도 우리의 삶과는 분리된 시공간에 남겨져 있었다.

오늘의 우리는 이미지 저편에 독립된 이상적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 저편에 완전한 신의 세계가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완전히 고립된 의미도 없으며 완벽하게 소통되는 의미도 없다. 우리는 이미 회화가 제공하는 이미지가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늘 위에 있던 신들의 세계는 천체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거리보다 아득한 뒤편으로 밀려났다. 이 시대의 우리들은 강력한 몰입을 이끌어내는 영화이미지 뿐 아니라, 현란한 CG가 가미된 3D 이미지에도 익숙해지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자제로 뒤섞으며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난 우리는 완전한 찰나를 영원히 남기려던 전통 회화의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새로운 방식의 회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안상훈, 조현선, 하지훈은 추상이미지를 제작한다. 그러나 미술사적 의미에서 전통적 추상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추상표현주의 처럼 행위를 기록하거나 특별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의 추상화는 이미지 그 자체로 남아 있으려 할 뿐이다. 이들 작가들은 시간과 공간을 풀어헤치고 재조합한다. 이들의 회화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미지가 결합된 정교한 콜라주이며, 현실을 참조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뮬라크라다. 그러나 이들의 시뮬라크라는 관습화된 환영과는 달리 재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 추상적 이미지이다. 기억과 해석이 만들어낸 복합적 시공간의 이미지는 화면위에서 울렁이며 세상을 향해 틈을 만든다.

안상훈 작가는 기억 속에 남겨진 시각적 인상들을 즉흥적으로 화면 위에 남긴다. 어떤 개념적 형태도 거부하는 듯 붓 터치만을 남기며, 어떤 행위의 궤적도 보이지 않도록 무작위로 화면을 채운다. 자동기술법 형식을 따르지만 특정 형식을 따른다는 의도마저 탈각된 방식으로 기억 속 인상을 화면에 남긴다. 순수회화의 자율성을 찾던 작가들마저 평면성과 순수성에 집착했다는 점에서 작품에서 내러티브를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상훈의 추상회화에서는 이런 형식적 내러티브까지 제거되면서 더욱 순수한 회화가 된다.

조현선 작가는 도시의 풍경에서 느낀 이미지들을 추상적 언어로 재해석하여 화면에 옮긴다. 재현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은 오히려 비재현적인 풍경화를 만들어 냈다. 화면 속에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 풍경의 축적체이자 시간의 복합체로 기록한다. 조현선은 원근법이나 상징적 형상은 일체 사용하지 않으며, 다만 정제된 색면과 선으로 화면을 차분히 구성할 뿐이다. 작업의 모티프가 된 시시각각 변화하며 혼재된 도시의 표면은 작품 속에서 얇은 색면과 리듬감 있는 구성으로 구현된다.

하지훈 작가의 작품도 풍경에서 시작된다. 작가가 포착한 자연 풍경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충분히 응축되고 숙성된 후 작품으로 형상화 된다. 순수한 추상이라기에는 작품 안 이미지는  응축된 바위 혹은 원석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빛나는 형상은 기대하던 자연의 이미지는 아니며, 상징적인 재해석도 아니다. 자연풍경에 대한 기억은 단단한 결정으로 응고되었으나 기대하던 풍경화가 아니라 오히려 정물화에 가깝다. 원래의 형상을 추론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하지훈의 작품은 추상회화의 영역에 자리 잡는다.

이들 세 작가가 창조한 이미지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추상화의 형식으로써 이전의 추상을 넘어선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같은 초기 추상화가들은 정신적인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추상을 발명하였다. 이들의 정신성이란 비물질적인 영원성과 같은 이념이었다. 추상화는 인식할 수 없는 신의 정신이 화가를 통하여 회화라는 질적 매체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추상회화에 대한 정의는 변화했으며, 추상과 구상의 구분도 해체된지 오래다. 오늘날의 추상화는 그러한 정신성과는 다른 의미의 정신성을 담고 있다. 즉 이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정신성은 기억 속에 남겨진 개인적 경험에 대한 인상과 직관에 관련된 것이다.

이제 세상으로 돌아온 화가들은 인상과 감각으로 축척된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작품에 남긴다. 작품 왜냐하면 추상이란 의도적으로 언어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때 진정한 추상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추상적 이미지는 의미로 통합되지 못하고 또 다른 이미지를 지시한다. 이미지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우리의 시도는 매번 좌절한다. 이미지를 의미화하려는 그 순간 또 다른 이미지로, 그리고 이렇게 포착된 이미지는 또다시 의미화 직전에 다른 이미지로 도망가 버린다. 이렇게 세 작가의 회화는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이미지 속의 또 다른 이미지로 전이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작품 제작의 과정과 작가의 움직임이 각각의 이미지로 기록되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 움직임은 지워진다. 뒤따라 온 이미지는 앞서 본 이미지를 포섭하며 새로운 비언어적 의미를 탄생시킨다. 그러므로 세 작가들의 회화는 이미지 속에 담긴 또 다른 이미지를 발견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전이의 과정 자체를 유희하며 작품을 감상하게 되며, 추상회화의 시간성은 우리의 실제적 시간 속에 침투한다. 이렇게 길고 긴 회화의 역사 속에 냉동되어 있던 이미지는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다시 살아 숨 쉬게 된 것이다.이미지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닮음이다.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재생산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자가 이미지가 하나의 의미, 혹은 지시체를 빗겨나가는 화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로 읽어내기 힘들기에, 이들의 작품은 감성으로 다가가야만 한다. 이렇게 의미화에 포섭되지 않는 이미지야말로 한 때 이룩하고자 했던 회화의 덕목이며, 회화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방법일 것이다.

- 아트스페이스휴 큐레이터 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