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산행 : 곽상원 이인성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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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11~05. 08

야간산행

나를 찾지 마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


시의 감상법과 시각예술의 독해 방식은 많은 경우 유사성을 갖는데, 특히 평면성을 기반으로 하는 회화는 더욱 그러하다. 곽상원, 이인성, 이 제의 작업은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고른 시어들로 쓰인 시처럼 섬세하게 읽힌다. 제한된 화면(언어)안에서 형태(시어), 색채(정서), 질감(운율)이 서로 뒤엉켜 일상적인 것들을 비일상적인 차원으로 옮겨 놓고 작가의 사적인 경험이나 감정을 보편적인 공감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서사적 재현에 몰두한 회화는 지루할 수 있고 주관적 감각에 의존한 회화는 공감을 놓치기 쉽다. 때문에 현실을 은유적으로 재현한 이들의 작업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곽상원의 작업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무겁게 가라앉는 무기력한 불안감이 아니라 불안과 고독이 토해내는 강한 저항의 에너지를 내재한다. <불이 되어버린 사람>을 보자. 사방은 온통 검은 화염으로 둘러 싸여있고 화면 중앙에는 앳된 소년이 슬그머니 태연한 얼굴을 내민다. 그는 숨은그림찾기 속 문제처럼 조용하게 숨어 있다. 배경과 인물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배경과 인물을 모호하게 분리하는 방식은 그의 다른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의문의 인물들은 화면에 밀착되지 않고 가볍게 밀어내고 있다. 물속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함과 고단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재료의 거친 질감을 드러내는 목탄화 역시 마찬가지로 막막한 배경과 모호한 인물의 대립항을 설정함으로써 그로데스크한 감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곽상원은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제시하지 않고 제한적인 색채와 형태만으로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이 같은 긴장감은 잠재된 불안과 고독으로부터 외부를 향한 에너지로 환원된다.

이인성은 특정한 장소와 인물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의 작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작가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설치된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뗏목 위의 두 사람> 속 두 인물은 각각 그물을 걷거나 망원경을 보고 있다. 반파된 뗏목에서는 물이 새고 발치에 엎드린 개는 모든 상황에 무심한 듯 관객에 시선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기이한 두 인물의 상반된 시선 끝에는 이인성의 작업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황색 점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가 만든 기이한 무대 장치에서 화면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하고 작품을 읽는 경쾌한 단초가 되어준다. 실제로 동굴 안의 맹수, 물 위의 배, 나무를 심거나 다리를 건너는 행위 등 그의 작업에는 몇 가지 소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데 그 가운데 등장하는 주황색 공들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전통 회화의 직접적인 도상에 비해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제는 일상의 순간, 기억의 감각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작가이다. 그는 이전 작업에서 주변을 관조적인 태도로 바라보며 수채화 같은 감성적인 작업을 보여주었다. 절반쯤 쓰다 만 일기를 그림으로 채운 것처럼 그의 작업은 사적인 감정을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이번 전시에는 <다섯 가슴을 가진 사람>, <입의 입>의 작품을 통해 토기라는 소재를 공통적으로 다루는데, 토기의 작은 주둥이를 통해 삶의 들숨과 날숨을 은유하며 보다 긴 호흡으로 주변을 사유한다.

“여자는 토기와 놀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쓰다듬다가 지평선까지 밀었다가 다시 안고 구르며 우애오우이 모두 다른 모양의 입에서 고오-오-오 바람이 인다. 노래하고 싶어요. 태초의 울음부터 오늘의 피로까지.” -이제, <토기이야기> 중

가슴 사이사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토기들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가슴에 숨통을 틔워주는 듯 작은 숨소리를 낼 것만 같다. 작가는 때로 작은 토기를 빚고 그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작은 주둥이를 낸다. 주둥이를 통해 토기의 안과 밖이 호흡을 주고받고 호흡을 통해 작가가 부여한 생명을 획득하게 된다.

안락하지 못한 나무에 기댄 힘없는 뒷모습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소년의 작은 턱 끝에서 우리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곽상원, 이인성, 이 제의 작업은 조심스럽게 일상을 흔들고 그 벌어진 틈으로 오래 전에 사라진 기억을 소환하고 굳어진 감정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어두운 산 속에서는 바스락 바스락 오직 나의 발자국 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다.

- 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