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홍 개인전 Known or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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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5 .23 ~ 06. 26

Known or Unknown

사건과 의미,
세계의 그물망에서 도약(跳躍)하기

예술가들의 판단과 행위는 자기 주체적 결정에 의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경계 또는 결이 있고, 무한의 힘들과 수많은 차원들이 있어 우리의 의식을 때로는 미묘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간섭한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분명하게 나눠지지 않고 의식은 물론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의 형태로 언제든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을 무어라고 부르고 규정하든 한 작가의 행위의 결과들은 특별한 감각과 의미의 세계를 품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민성홍 작가의 작업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현대미술에서 조형성, 설치, 조각, 오브제의 레퍼런스에 속하지 않은 부분들이 민성홍 작업의 본질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 작가의 작업에 대한 모든 설명, 모든 이해란 곧 가설이기도 하다. 작가 개인의 역사가 있고 사회의 역사가 있고 시대마다 관점과 역사적 감정이 달라진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다층성과 다성성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시간성 위에 놓여야 의미가 발생한다. 의미란 곧 시간성의 실체를 통해 가능한데 이는 시간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미시적이기 때문에 평균적 차원의 의미, 이해, 소통이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하나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행위 순간들의 집합일 뿐이다. 사건들의 집합. 그물망이란 어쩌면 이러한 작가의 씨줄과 날줄의 행위를 통해 의미의 망이 형성된다는 은유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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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홍의 이번 전시 작업 중 가장 큰 설치작업인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그물망과 오브제들은 단선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대단히 복잡하고 심오한 네트워크로 얽혀 있다는 이해와 감각을 자극한다. 도자기로 만든 눈이 없는 새 머리들이 잘린 채 솟대처럼 세워져 있고 그 새 머리 주위에는 이리저리 구슬들이 연결되어 얽혀있다. 또 솟대처럼 얇은 기둥에 매달아놓은 새도 있고 공중에 매달린 새머리도 있다. 무슨 호러물 같지만, 사실 불꺼진 갤러리에 눈 없는 새머리가 목이 잘린 채 이리저리 세워져 있다면 공포스럽긴 할 것이다. 그러나 갤러리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거나 영상작품처럼 전시 공간에 불이 꺼져 있더라도 일종의 규약처럼 불이 켜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현대미술이라는 사전을 가지고 다니면 마치 법전처럼 오랫동안 약속된 감상과 평가의 규약을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예술이 언어, 특히 문자에 갇혀버리며 벌어지는 일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민성홍의 설치가 보여주는 울퉁불퉁 유동하는 대지 또는 지반. 폐허를 떠올리는 오브제, 분위기는 개인의 표상이 곧 당대 사회의 문화예술적 표상임을 떠올리게 한다.

새는 오래전부터 태양과 관련되었다. 원시인류는 태양을 불타는 새가 날아간 것으로 상상했다. 태양과 신을 상징하는 새란 인류학적 상상력 또는 원형적 상징의 의미를 지닌다. 새는 신이거나 신의 사자 또는 신의 은유이다. 주술적인 구슬꿰기와 함께 새머리는 샤머니즘이 무의식적 층위의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의미가 발생한다. 작품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작품의 중층적 의미란 작가 자신도 모르는 의미의 결이 생기고 다양한 경로로 확장될 수 있는 소위 열려있는 예술이란 관념과 연결될 수도 있다. 본래 예술현상에서 작가의 개인사적 사건이란 그의 예술적 사건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눈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눈이 없다는 의미를 넘어서 텅 빈 허공, 무(無), 다른 세계 또는 다른 차원을 은유한다. 텅 빈 눈이 예쁘게 채워진 눈 보다 더 많은 의미와 차원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눈이 없기에 구체적인 새의 상태를 독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 머리 형태를 찬찬히 살펴보면 긴부리, 짧은 부리, 굽은 부리, 다양한 칼라 등 자연 생태환경이 좋은 곳에 서식하는 새처럼 보인다. 도시나 거주지 주위의 비둘기나 참새 등 익숙한 새들이 아니다. 물론 오리도 있지만. 여하간 연출된 새들은 대체로 우림열대나 바닷가 새들로 보인다. 마치 목이 잘린 지구의 자연환경을 비극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파국을 맞고 있는 묵시적 환경변화의 흔적들처럼.

민성홍의 도자기로 구운 새의 머리에는 많은 균열이 있다. 크랙은 하나의 문신이기도 하다. 이는 비약하자면 신(神)의 표현 또는 발화(發話)로 이해할 수 있다. 불의 연금술에 의해 만들어진 파열과 균열은 우연성과 사건의 차원에서 세계와 우주의 운행법칙과 은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매우 전통이 오래된 사고방식이다. 문신은 그림이고 그림은 몸과 마음과 세계의 변화와 현상을 은유한다. 상고시대부터 인류는 불의 발견과 함께 그 열기로 깨어져 나간 뼈들에 나타나는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의 충돌의 결과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세계의 숨겨진 법칙을 발견하려했다. 점을 치는 것이다. 연금술과 점성술은 같은 세계관과 인간관, 운명관을 공유하고 있다. 우연적 사태와 필연적 사태, 인위와 무위의 사태가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이 되고 그것이 곧 해석이고 동시에 하나의 표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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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홍의 사유 배경에도 이러한 다양한 사유의 도전들이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영향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미술가들이 사용하는 조형적 장치들, 장식과 오브제들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이나 메시지 또는 유의미한 장식성의 한계를 넘어서 인류학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성과 관련해 관찰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장식은 결코 빈곤한 유물론에 근거한 형식적 표현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음과 양의 교접, 대지와 하늘의 만남, 생명의 표현. 장식이란 곧 이러한 의미를 담는다.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해온 대우주와 소우주의 관계, 우연성과 필연성은 사실은 하나라는 가설, 동양의 연기론(緣起論), 철학적 사고를 받아들인 개념미술가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성(Synchronicity, 同時性)’과도 관련된다. 20세기 초 정신분석의이자 신화와 상징 연구에 큰 업적을 이룬 칼 융(Jung)은 ‘인간의 정신은 따로 떨어진 정신이 아니라 서로의 에너지로 상호 작용하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광대한 네트워크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칼 융은 앞서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행해진 ‘점을 쳐서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를 서구 근대과학의 ‘인과법칙’이 아니라 ‘동시성의 원리’로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오묘한 ‘동시성의 그물’을 통해 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암시’를 준다고 주장한다. 이 차원과 저 차원, 무수한 차원이 연결되어 있어어 순차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알게 된다. 심지어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이미 그 사건에 대한 인식이 앞서서 발생할 수 있다.

동시성은 현대물리학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양자얽힘’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잘 알려진 양자물리학의 상식이다. 양자얽힘이란 하나의 물체가 어떤 외관상의 에너지 이동 없이도 다른 물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한 끝에서 벌어진 사건이 우주의 다른 한 끝에서 동시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동양의 초월적 사유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비인과적 연관’ 또는 ‘심오한 우연의 일치’로 이해되는 ‘동시성’의 개념을 통해 서구 근대 정신의 논리와 인과법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신 현상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는데, 근대 과학적 인식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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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유명한 권투만화의 주인공은 뛰어난 권투실력에도 불구하고 유리턱이라고 불릴 정도로 턱이 약했다. 턱에 상대의 주먹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너무도 뛰어나 그의 권투실력은 어떻게 하면 약한 턱을 보호하면서 상대를 이길지 치열한 연구와 노력의 결과였던 것이다. 민성홍의 작업에는 유리턱보다 더 약한 유리심장이 있다. 턱이 유리처럼 약해도 불안한데 심장이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면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그냥 깨져버릴 것이 아닌가. 얇은 유리판 위에 검은 비닐로 얼기설기 엮여있는 검은 심장은 마치 무슨 연금술사의 연구실에서나 볼법한 기괴한 분위기다.

이 검은 이미지의 꼴라쥬는 불가해한 삶, 생활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려낸 이미지를 꿰매는 사진 시리즈는 작가의 행위, 일반적인 사람들의 선의를 갖는 행위가 그 결과 역시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린다. 신의 간계, 운명의 장난, 선한 행위가 낳은 파국이라는 모순과 비극 등등.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계획되고 예측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힘들의 비가역적 운동으로 인해 우리는 상처를 받고 상처를 꿰맨다.

유리알 유희, 구슬을 엮고 꿰는 것은 어떤 연결을 의미한다. 이 연결은 본성적이다. 하나하나의 사물은 연결되어야 우주적 사건, 의미를 획득한다.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레르, 모더니즘 이전의 감각의 논리이다. 이는 모더니즘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이고 논리이다. <산해경山海經>의 기이한 존재들의 괴신난력의 에너지를 소개하고 있다. 현대인은 그 논리를 결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유사성을 지적으로는 이해해도 결코 감각적으로 또는 존재론적 차원의 깊이까지 느낄 수는 없다. 현대인이 현대성을 획득한 것은 바로 그러한 상상의 논리를 댓가로 지불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예술행위가 이러한 과거 인류의 사유의 모험의 한 갈래로 흘러나왔다는 설을 떠올리면(예술의 종교 기원설) 민성홍의 작업이 보여주는 조형적 연출과 이미지들이 전통적인 미술사나 미학의 범주를 넘어서 종교적이며 인류학적인 상상력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눈이 없는 새머리, 절연, 해체, 분리 된 조각들의 재조립. 토템, 검은 유리심장, 나뭇잎이 모두 뜯겨진 채 사람의 영혼에 흉터가 남는 것처럼 이미지화된다. 눈이 없는 형상은 가시계(자연계)가 아닌 비가시의 세계를 보기 때문이라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해석들이 있다.

-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김노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