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경 개인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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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Downfall, 162×227㎝, acrylic on Korean paper(Hanji), 2016




오세경 개인전

2018.8.15-9.18

  

불의 경계

영화 <버닝>을 기억하는 몇 가지 장면들은 모두 불과 함께 등장한다. 시커먼 밤 한가운데 거대하게 불타는 비닐하우스나 용산참사의 참혹상을 그린 임옥상의 <삼계화택->을 정신 없이 바라보는 주인공의 뒷모습은 불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내재된 분노가 동시에 읽힌다. 불은 존재의 소멸이자 역설적으로 존재를 가장 치열하게 증명하는 수단이며 불교에서는 육체를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 지난 몇몇의 작업이 그러했듯이 오세경은 불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해석해 적절하게 작업에 녹여낸다. 그의 근작 <아수라>는 상어를 먹는 개가 불타는 해변에서 교미하는 뱀을 바라보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아마도 호주에서 드물게 목도되는 상어를 먹는 개의 모습과 지독하게 뒤엉켜 교미하는 뱀의 사진이 어떠한 이유에서 합성이 되었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떠도는 이 기이한 이미지의 조합은 작가가 체감하는 세상의 혼란과 경계의 무너짐의 재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이레시아스는 교미하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을 보고 지팡이로 암컷을 때려 죽이고 그 순간 여자로 변한다. 그리고 7년 뒤 같은 장소에서 교미하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을 보고 이번엔 수컷을 발로 밟아 죽이고 다시 남자가 된다.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을 모두 경험한 테이레시아스는 누구보다 뛰어난 통찰력을 갖춘 예언자가 된다. 여러 문화권을 통틀어 뱀은 지혜, 부활, 영생의 상징이며 두려움과 성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경외심의 대상이었다. 몸의 일부가 이미 불에 타 소멸되고 있음에도 맹목(盲目)적으로 불을 향해 달려드는 뱀의 모습은 경외심의 대상의 타락이며 이는 작가가 오랫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절대적 가치와 이념이 붕괴되는 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은유한 그의 이전 작업 <짝꿍>에서도 질서와 원칙이 무너지는 상황을 불에 비유한다. 배 위에 두 여학생이 마치 기도하는 모습으로 불붙은 우산을 들고 있고 우산은 삽시간에 타 들어갈 것처럼 위태롭다. 이들에게는 다른 어느 곳도 기댈 곳이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무책임이, 미디어의 거짓말이, 국가의 무능함이 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배는 곧 침몰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미술학원에서 또래의 학생들을 매일 마주했던 작가가 느꼈을 침통함은 아마 더 남달랐으리라. 작가는 거의 모든 작업을 영화를 찍듯이 상황을 연출하고 대상을 촬영한 다음 그 사진을 기반으로 거의 실제에 가깝게 묘사하는 수고를 이어오고 있다. 불의 이미지는 이 같은 그의 고집스러움을 비집고 나와 재현의 대상과 공간을 단숨에 작가의 사적인, 가상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늘 궁금해 하는 작가의 진의, 그 답이 존재한다.

경계를 나눌 수 없는 불의 끝자락처럼 쉬이 흔들리는 그림자의 모서리처럼 오세경의 작품 속 여학생의 이미지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하게 경계에 서 있는 불안한 대상처럼 읽힌다. 약속된 상징처럼 반듯하게 입고 있는 교복은 다양성을 통제하고 과도기의 분출하는 내면을 억누르는 제도적 장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거인>처럼 냉혹한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무장한 전사처럼 읽히기도 한다. 오세경 작업의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교복 입은 여학생’에 대한 해석은 여학생의 성적 대상화라는 의구심을 낳기도 하는데 이는 영화의 맥거핀 효과처럼 관객이 오해하도록 작가가 고의로 흘려놓은 단서와 같이 고정된 관념과 해석의 경로를 따라 관객의 곡해를 끌고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맥거핀 효과의 긍정적인 미적 묘미는 작품 감상의 끝에 이르러 완전히 다른 결론이나 이해로 전화되는 반전에 있다. 오세경의 작품의 의미는 여학생 이미지가 관객에게 왜곡된 관념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이를 해체하는 힘이 작품에 있는가에 달려있다. 많은 경우 구체적인 형상들은 불필요한 호기심을 자극해 작업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거나 자칫 함정에 빠뜨리곤 한다.

작가의 시선의 끝에는 크고 작은 사적 경험과 사회적 사건들이 닿아 있는데, <몰락>은 플래시 카메라를 이용한 보도사진의 형식을 취할 뿐 아니라 당시 논란이 된 실제 사건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작품의 발상이 된 것은 그 즈음하여 한 남성 잡지가 내놓은 표지인데, The real bad guy’라는 문구와 함께 여성의 신체 일부가 자동차 트렁크 밖으로 나와있어 납치와 성범죄를 연상하는 장면이었다. ‘나쁜 남자’에 대한 지나친 해석과 여성의 현실적인 공포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잡지 전량을 폐기하는 것으로 논란은 마무리되었고 이는 작가에게 깊게 각인된 하나의 사건이 된다. <몰락>의 경계는 중앙에 있는 여학생을 중심으로 밤과 물의 경계로 나뉜다. 플래시를 받으며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처럼 밝게 빛나는 여학생은 모종의 작업을 마치고 매무새로 정리하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뒤로 축 늘어진 맨발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신체는 앞서 언급한 불온한 표지의 완벽한 전복이자 복수이다.

“어른이 되면 사리분별이 명확해지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보니 구분할 수 없는 경계 투성이고 쏟아지는 일에는 순서가 없었다.” 작가의 말처럼 어른이 되는 일은 어쩌면 씁쓸한 핑계거리를 보태는 일일지 모른다. 타협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서로의 면을 세우고 뒤 돌아서 쓸쓸하게 읊조리는 것이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아트스페이스휴 큐레이터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