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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경 개인전 : 현자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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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경 개인전

2018.10.3.-11.6

 

코가네초에서 만난 현자들*

돌과 오브제 그리고 그 너머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다양한 형태의 돌들이 10여개 놓여 있다. 돌들은 전시의 제목인 현자의 돌처럼 보인다. 조금 작기는 하지만 여하간 돌들은 비현실적인 광택과 투명도를 보여준다. 금색의 돌과 쌀알들을 찍은 사진도 있고, 마치 마녀의 빗자루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에 빗자루와 대걸레가 거꾸로 꽂혀 있다. 지구본과 부채를 닮은 오브제, 흔드는 방울처럼 무속에 쓰는 도구들도 보인다. 우리는 작가가 샤머니즘과 무속신앙을 모티브로 연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한 오브제들 사이로 영상이 상영된다. 영상 자체가 처음에는 유령처럼 인식되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영상과 이런 기이한 오브제들은 결이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 현자의 돌(lapis philosophorum)이란 하나의 메타포이다. 실제 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자의 돌은 철학자의 돌(Philosopher’s stone) 또는 마법사의 돌(Sorcerer’s Stone)로도 알려져 있다. 돌은 금으로도 표현되며 손을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비극의 주인공인 마이다스의 손에 대한 이야기나 젊음이나 사랑의 묘약과 같은 이야기도 여기서 파생된 이야기들이다. 실제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서 신비주의나 연금술의 궁극의 목적을 성취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목적에 다가가기 위한 비밀스럽게 전승하고 공유하던 세계의 지식, 신적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지식을 알기만하면 인간은 평범한 인간을 초월해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 현자의 돌이란 연금술의 최고의 경지이며 목표이다. 이는 종교적 신념과 고대로부터 르네상스기를 거치며 형성된 유사과학(PSUDO SICENCE)과 근대과학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다. 근대 화학의 기원은 중세의 연금술이 아닌가.

전보경 작가의 오브제들은 조형적 또는 미적 대상이기보다는 곧 헤르메스와 신비주의자들의 신비한 도구들의 모음에 가깝다. 인간은 상징과 은유를 도구로 신적 세계에 진입한다. 인간은 불가피하게 신을 직접 대면할 수 없기에 신을 닮은 것 또는 신에 가까이 근접한 것을 통해 신과 만나며, 그것은 현자의 돌이란 상징으로 나타난다. 현자의 돌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인간이 지켜야한 십계명을 돌에 새겨준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들 또한 돌에 새기지 않는가. 여하간 돌에 새긴 문자, 언어는 성스런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실제 철은 녹슬어 사라지지만 돌은 특별한 천재지변만 아니라면 수많은 재료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을 견디는 영속성을 지니는 자연물이기도 하다.

현자의 돌이란 정신과 영혼, 또는 마음의 형이상학적 지혜와 지식을 은유한다. 마음 공부를 하는 이들이 돌을 쌓으며 마음의 정화를 구하듯. 그러니 전시장에 놓여있는 돌들은 돌을 닮은 어떤 것들이며 결코 물질적인 돌에 제한받지 않는다. 현자의 돌이란 정신과 정신이 연결되는 지식의 광장이나 도서관이며 성소(聖所)이기도 하다. 전시제목과 전시 공간 전체에 배치된 오브제들은 우리가 현대미술전시를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신비주의 그룹의 비밀스런 모임에 초대된 것인지 오리무중에 빠진다.

예술인간 또는 노동의 지혜

작가는 2016년 손으로 시트커팅하는 늙은 노동자를 알게된 후 미술관에 초대해 퍼포먼스를 협업한 후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후  2017년 3개월간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코가네초에서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한 분야에서 40년 또는 50년 이상 종사한 직업인들의 인터뷰를 찍었다. 수공업에 종사하는 노인들을 수소문해 찾아서 땅콩을 구워 과자를 만드는 노인, 일본식 디저트를 만드는 노인, 다과 만드는 노인, 배를 운항하는 노인, 늙은 이발사들. 그러나 이 인터뷰는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거나 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들의 노동의 과정을 찍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일상을 시로 짓고 그분들에 시에 맞춰 율동을 부탁했다. 그 율동이란 그분들이 평소 오랫동안 해왔던 노동의 모습을 율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번 전시에 상영되는 영상과 음율과 몸짓과 대화가 융합된 어떤 것들이 등장한다. 마치 이 노 대가들의 평생의 경험과 지혜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처럼 연출한다. 또 실제 그들의 일상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해온 자신의 직업과 경륜에 대한 철학을 마치 시처럼 또는 독백처럼 연출한다. 굵직한 노인의 목소리가 전시장에 울리고 영상 사이사이에는 앞서 기술한 다양한 오브제들이 풍경을 이룬다. 마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기이한 무대처럼 어둡고 흐린 빛으로 어른거리고 독백이 잔잔히 펼쳐진다. 노인들은 어떤 도구도 없이 빈손으로 자신들의 직업을 연상시키는 손동작으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자신들의 직업의 기술과 경험에 대한 지혜를 구술한다. 이들은 작가가 밝히지 않았다면 경험 많은 원로배우들처럼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콘트롤하며 느리지만 정확하게 구술을 이어간다. 나이를 먹으면 굳이 배우가 직업이 아니어도 마치 배우 그 이상으로 자신을, 자신의 삶을 연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세대간에 그리고 분야간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노동과 예술의 기원과 분화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그후 노동의 문제를 고민하며 기획하였다. 작가는 이들을 보면서 마치 연금술사의 모습을 떠올렸고 전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세속 너머의 탈속과 같은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게 되었고 늙은 노동자의 몸짓은 그들이 샤먼은 아니지만 신비한 연금술적 제스춰로 은유된다. 이 과정은 작가 자신이 받아온 미적 교육의 효과로 갖게된 미적 또는 문화자본의 문제, 예술가의 태도, 미적 감수성의 원천 또는 기원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과 노동은 예술가들의 오래된 주제이다. 작가는 하나의 기술과 노동으로 평생을 보낸 노인을 찾아 대화하고 설득하고 공감하며 장시간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평생을 익혀온 노인의 노동과 기술의 결과와 미적 감수성과 미술관에서 보여지는 감수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노인의 미적 감수성은 기성 예술계의 미적 감수성과 만났을 때 새로운 의문을 낳게 된다. 의문은 예술과 노동의 유사성과 차이 또는 동일성의 문제를 향하게 된다.

무엇보다 작가는 인물들의 창조성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사성과 동일성이 만난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창조성과는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창조성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 노인들의 창조성과 미적 감수성은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미술계의 그것이 아니다. 이들에게서 작가는 ‘예술인간’이란 생각을 떠올렸다. 예술인간을 작가는 노동의 관점에서 보려한다. 작가는 상아탑처럼 쌓아온 예술적 감수성, 창조성 등의 영역을 확대하려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손으로 만드는 수공예의 노동을 통해 현대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유용성과 무용성의 경계에 대해서도 성찰한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환원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교환가치에서 벗어나 있는 가치를 노출하려 한다. 연금술사처럼 느껴지는 이들 평생을 노동으로 보낸 노인들의 노동과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야 말로 현장의 돌에 가장 근접해 있는 존재로 변신(變身)한다.


* <현자의 돌 시리즈>는 2017년 일본 코가네초 지역에서 레지던시를 하면서 진행한 프로젝트이다. A=B=C=D 라는 도식은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 노동= 계급=교환가치=자본주의라는 주어진 도식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노동이 갖고 있는 미학적 가치를 추적하게 되면서 도식의 형식 논리의 오류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결과보다는 과정에서의 시간과 노력, 그 수고를 통한 자신의 일생과의 조응(correspondence)을 의미하는 노동은 기계의 단순반복 운동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터득한 창의성과 관계를 추구하고, 자신의 일 안에서 예술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발현하려는 노동 (예술)하는 인간은 자기 인생을 설계하는 삶의 미학으로의 원동력을 내제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미학적 발현이 자기 해방과 자기실현, 타인과의 공유의 가치를 통해 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이자 예술적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이 책에 담긴 인터뷰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작가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