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오차: 김하연 박아름 박현정
Monday, February 18, 2019
우연오차: 김하연 박아름 박현정
2019.2.20-3.26
(위부터)
박아름, untitled, gouache on paper, 100×140cm, 2016
박현정, image(76), acrylic, watercolor, pastel, color pencil on paper, 49×34cm, 2018
김하연, 생각, oil on canvas, 60×60cm, 2018
오차 속에서 실존하기: 《우연오차》가 제시하는 그림의 생존법에 대해서
황재민(미술평론)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보통 오차는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로 착오(Mistake)란, 관측자의 부주의 혹은 실수에 따른 오차다. 둘째는 정오차(Systemic error)인데, 정오차는 발생 원인이 분명하여 수정이 가능한 오차를 뜻한다. 마지막으로 우연오차(Random error)는, 착오를 제거하고 정오차를 보정하고 난 뒤에도 남아있는 오차를 뜻한다. 오차는 항상 존재하며 모든 측정과 관측은 오차를 포함하지만, 착오와 정오차가 수정이 가능한 오차에 속한다면 우연오차는 제어할 수 없는 변수로서, 인간의 능력으로 보정이 어려운 자연 세계의 일부다.
전시 《우연오차》는 그림에 대한 전시를 기획하며, 오차, 개중에서도 우연오차의 존재를 미학적 주제로 포용한다. ‘그리기’는 뇌와 몸과 인간 정신이라는 협업 구조 안에서 작동하며 인간 몸이 도출하는 오차를 현시하고, 이렇게 물질화되는 작품-실재는 언제나 인간의 이상을 배반하기에, ‘우연오차’는 그림을 호출하는 열쇳말로 자연스럽다. 허나 그림에서 오차를 찾으려는 접근은 이제 맥락을 한 가지 더 포함해야 한다. 전자 기기의 스크린 내-외부에 존재하는 (비)실재의 매커니즘이 이제 이상에 버금가는 가상을 실체화하며 인간과 인간의 기술을 각종 오차와 오류의 영역으로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이후’, (비)실재의 등장이 인간을 오류투성이의 주체로 상대화하듯, 인간의 인간적 오류는 경험을 평준화하는 디지털-경험 안으로 섞이지 않는 회색 지대를 구축하면서 새로운 실존의 방법을 보증하려 한다. 《우연오차》 역시 이와 같은 회색 지대를 반영하는데, 전시에서 그림은 온전한 조작이 불가능한 물질적 실재를 나타내는 미학적 결과물로써 ‘우연오차’를 만들어낸다고 가정되고, 그것은 디지털-경험 이후의 세계에서, 그림이 그림으로서 실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박현정의 그림은 느리고 정교하게 그려진다. 그림의 이런 성질은 작가가 다루려는 소재와도 연관이 있는데, 박현정은 “생각의 모양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하고 느리고 정교한 것은 이를 위해 추구되는 자기 훈육 과정의 일부다. 이렇게 그려지는 모양은 그 누구도, 심지어 작가조차도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발견된 것’이기도 하다. 박현정은 자신의 그리기를 “가능하면 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설명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의 모양”, 말하자면 내면의 모양을 짐작하는 일에 있어 “가능하면 정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면과 관련된 이런 그리기의 방법은 이를 테면 오래 전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시도했던 방법을 떠오르게 한다. 그들은 내면이란 그 누구도 온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해 가능하면 정확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했는데, 이에 비춰본다면 박현정이 자신의 그리기에 대해 갖는 기술자적인 태도는 과거의 이런, 조작된 방만함에 대한 대단히 희미한 답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현정이 그리는 그림은 스크린 속에서 등장하는 익숙한 이미지 형태에 직설적으로 반응한 결과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사실 디지털 이미지와 그 생태계의 (너무 빠른) 속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미지를 생산하고 다루는 방법으로서 디지털 툴의 존재는 매혹적이기에, 한 편으로 박현정은 툴의 능력, 순식간에 그려지는 완벽한 직선과 적절하게 구부러지는 곡선의 각도 같은 것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러므로 시점은 분열한다. 작가는 툴을 사용하는 방법이 디지털 이미지의 생태계로 밀려들어가는 방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잉여를 남기는 방법을 찾는다. 에서 ‘투명한 서포트’처럼 쓰이는 회색 체크 무늬 배경은 그 중 하나로, 작가는 디지털 툴 환경에서 ‘투명한 상태’를 지시하는 표시로 쓰이는 체크 무늬 배경을 투명하지 않은 것으로 사용한다: 디지털 환경 안에서 구현될 수 없는 디지털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한편 박아름은 빠르게 그린다. 박아름이 만들어내는 동세는 일부 만화적인데, 만화는 박아름이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그리기 레퍼런스의 일부다. 따라서 박아름의 그림은 만화적 상황을 연출하며 종종 기괴하거나 황당하거나,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장면을 보인다. 주먹이 사람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며,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장면들이 한 화면에 합쳐져 알아보기 힘든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림 속 인물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지만, 정작 그들을 둘러싸는 상황은 무감정으로 일관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박아름이 만화를 ‘기술적 지지체’ 삼아 인용할 때, 만화는 서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한다. 작가는 만화를 펜으로 그려진 이미지의 집합으로 파악한 뒤 그 질감을 확장한다. 미디엄으로 과슈와 먹이, 바탕으로 종이가 쓰이는 것은 이 확장을 위한 것으로, 재료에 적절한 질감을 부여하기 위해 박아름은 빠르게 그리는 방법을 선호한다. 단박에 그려내는 화가로서, 작가는 한 획으로 그림을 완성하며 재료는 덧칠되는 대신, 대체된다. 박아름의 그림은 빠르게 성공하고 빠르게 실패하며, 실패한 것은 빠르게 버려지는데, 이것은 만화가 구성되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 특징적인 빠름은 그림이 단순히 만화적 장면을 확장한 것 이상이 되도록 매체화한다.
김하연은 유일하게 캔버스를 서포트로 삼고, 그것으로 ‘회화’라는 맥락에 개입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전통적 의미의 ‘화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데, 김하연은 그리기를 통해 회화를 만들어내고, 그를 통해 세계와 관계하지만, 그것이 뇌, 몸, 정신의 협업을 통한 물질의 생산인 동시에 인간이 구축한 문화적 대상을 적극적으로 재인식하고 재조합하는 방편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한다.
김하연의 그림은 쉽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 이 ‘쉬운’ 그림은 여전히 진중하게 그려진, ‘어려운’ 그림에 반발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읽힌다. 김하연은 그림을 통해 “재현, 기호, 추상의 다이어그램적 관계를 구축”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캔버스 전면 위에 등장하는 시각적 화면을 언어적인 것으로 체계화하는 방법이다. 김하연이 환영적 회화 전면 위로 언어적인 것, 그리고 기호적인 것을 부여할 때, 회화는 미술이 성립되는 방식 자체를 비평하는 메타-언어로써 새로운 용도를 갖고, 담론과 역사가 축적되는 추상적 집합으로 대상화된다. 김하연은 이렇게 확립된 방법을 매체를 달리 하면서 유지하는데, 이때 회화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 되어 주변부에 남겨진다.
그림은 역사적 분기에 따라 새로운 시각성을 반영했던 미술의 대문자 문법이다. 그림에서 ‘오차’를 찾으려는 활동은 그림이 만들어내는 그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허나 미술을 위한 도구가 극적으로 다변화된 현재,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림을 단순히 무언가를 비추는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림으로서 실존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찾고 그를 통해 그림을 다시 바라보는 것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오차’는 그런 도구가 될 수 있을까? 허나 《우연오차》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오차’는 그림이 존재하는 방법에 있어 단지 부분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 그림이 회색 지대에 기거한다는 사실은 사후적인 동시에 희망적이다. 어쩌면 이제 학습해야 되는 것은 그 희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