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5/6 전시장 오픈합니다. 이서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 5/7까지 입니다.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서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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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

 

2019.04.03-05.07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을 위해  

김 현(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연약한 지반>, <유기물>, <미결정 레이블>에 이은 이서인의 4번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는 그간의 전시 제목이 어렴풋이 내비치는 바와 같이 실재와 재현, 사물과 오브제, 회화와 설치 사이를 유영하는 작가의 실험적 과정과 비로소 도달하게 된 여정의 종착지와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한창 진행 중인 작가의 프로세스에 온점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잠재적 고민을 해결하려는 탐색의 시도가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작가는 개인전마다 완전히 다른 의도와 방식을 가지고 궁극적으로회화의 본질과 경계에 대한 질문의 답을 회화 안과 밖을 오가며 탐구했다. 이미지 처리 프로그램의 효과를 회화로 재현하거나, 버려진 사물의 본래의 기능을 지우고 조형적인 특성만 가지고 이를 오브제로 사용하거나, 조각적인 요소들을 가져와 회화와 설치 그 중 어느 것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모호한 경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같은 다양한 탐구의 과정은 다른 장르와의 타협으로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단순한 방식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이서인의 회화는 완성된 캔버스를 자르고 재조합하거나 쌓아올려 캔버스 본래의 기능을 지우고, 캔버스 겉과 속의 물리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무 본연의 거친 질감과 색감, 천에서 뜯겨 나온 실오라기, 캔버스 틀에 박힌 피스의 균일한 간격과 차가운 재료의 특성마저도 회화의 일부로 제시된다. 이서인의변형된 캔버스 60-70년대 등장한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와 유사성을 갖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작품의 이미지와 캔버스의 형태가 일체되어 장식적 성격을 갖는 변형 캔버스는 작가가 철저하게 마다하는 회화가 오브제로 작동하는 순간의 오류이다. 이서인의 캔버스는 변형의 범주를 넘어캔버스를 뭉개서 드로잉을 하고 있다라고 작가 스스로 밝히듯이 회화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있는 캔버스를 해체하여 회화 내부적 특성을 규정짓는 요소들과 동일하게 외부적 특성을 끌어들여 회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전시는 캔버스의 물성을 가장 날것의 상태로 보여주는, 회화의 경계 바깥부터 전형적인 회화의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경계의 가장 안쪽까지 작가가 규정한 회화의 유연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캔버스와 캔버스_NO.03>는 한쪽이 원형으로 변형된 캔버스 두 개의 뒷면을 맞붙여 앞과 뒤, 겉과 속의 경계를 흐트러트려 가장 오브제 가까운 형태로 제시하고 <무너진 숲_NO.04>는 숲의 복잡한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구현하며 전형적인 회화의 모습에 근접하지만 이마저도 빈틈없이 꽉 채워진 <무너진 숲_NO.03>와 비교를 자처하며 미디엄의 농담에 따른 차이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이는 보수적 회화를 향한 도전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도 회화와 회화가 아닌 것,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물질과 비물질의 미묘한 경계를 섬세하게 더듬어보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 이서인 회화에 다가가는 올바른 접근법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름이 갖지 않는 것처럼, 0도와 1도 사이에 존재하는 수치화되지 않은 각을 예민하게 재는 것처럼.

 

때문에유연한 오브제는 공사장에서 떨어져 나온 콘크리트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고, 겹겹의 페인트가 쌓인 오래된 간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추론도 일말의 연관을 거부하고 콘크리트 조각과 오래된 간판에서 느껴지는 조형적 감상 정도에 머무르게 한다. 작가는 실제로 동두천과 인천 등지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나 공터에서 작업의 소재들을 발견하였으나 이를 곧장 장소나 사물에서 발현되는 기억이나 연민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본래의 필요와 목적에서 탈각한 장소나 사물이 갖는 조형적 특성만이 작가에게 미적 가치를 갖는다.

 

또한 작가가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는 전시 방식은 캔버스를 단순히 벽에 거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눕히듯이 던져놓거나 프레임을 제작하여 평면인 캔버스에 설치물과 같은 부피감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 같은 방식은 회화 경계의 입체적인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업 과정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동선을 제시하여 전시를 보다 입체적으로 감상하도록 한다. 이서인의 이러한 전략적 장치는 원색적이거나 구호적이지 않은 타협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에 보다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한다.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무겁고 오래된 주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이를 유순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제안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