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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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

2019.10.16-11.19

opening reception 10.16 17:00

 

코의 지혜 또는 존재의 신비한 궤적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그림이란 시각으로만 이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삶의 모든 양상들과 관련된다.

 

1

향기는 문법이 없다. 분자와 분자가 충돌한다. 존재와 존재가 접촉하고 부딪친다. 서로 교섭하고 간섭한다. 시작과 끝도 분명치 않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감각보다 더 표현적이다. 냄새로 세계와 만나며 느끼는 감각은 일종의 통증이기도 하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존재의 신비한 궤적을 그린다. 여하간 냄새와 후각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원초적 감각을 향수하곤 한다. 누군가는 꽃이 눈에 즐겁고 또 누군가는 코가 즐겁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모두 꽃말이 있듯이 모든 사물들은 모두 자기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러한 냄새를 모두 감각할 수 있고 일일이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왕 푸네스>의 이레네오 푸네스처럼 미치광이가 되거나 불행할지도 모른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세계에서는 새로운 시각과 정신이 솟기 마련이다. 수많은 입자들이 회오리치고 유동하며 자유운동을 한다. 그러다 우연히 감각 수용체와 접촉하는 것이다. 그런 감각과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풀과 꽃과 나무는 물론 불과 물과 공기에서 냄새를 맡고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면 결국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들이 풀어내는 무수한 냄새 분자들 속에서 어떻게 감각의 정신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너무 크거나 너무 많은, 또는 너무 복잡한 감각은 인식되지 못한다.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감각은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까?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향기의 향연. 환경오염이 심각한 시대에 냄새를 맡는 수용체가 타고나길 특별히 많거나 예민할수록 일상의 삶이 불가능한 시대이니 말이다.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후각이 종합적으로 펼쳐내는 세계의 물질과 감각의 축제를 망각한지 이미 너무 오래되었다. 더 이상 자연 그 대로의 상태가 없는 세계에서 후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몽상과 같은 일이니 말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브라운 운동은 공기 중에 입자들의 불규칙한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공기 중에 향기 입자가 퍼져가는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임의적인 운동들은 수학의 확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수학적으로 완전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까 자연계의 임의적 운동이라는 현상은 수학이나 과학의 시각에서는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성이나 미적 세계에 들어오면 임의적이며 우연적인 존재와 운동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자명한 대상이 된다. 과학적으로 가장 모호한 표상의 세계가 미학적으로 가장 분명한 표상의 세계가 된다. 물질의 세계와 비물질의 세계가 교차하고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신비하게 교접한다. 정신이 가장 극단의 경계에서 만나는 신비이다며칠 굶은 사람에게 밥하는 냄새, 빵 굽는 냄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의 심리를 다루는 영화들, 예를 들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 속 주인공은 허브티와 마들렌을 먹고 마시며 냄새를 맡으며 과거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린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속 주인공 알란은 폭탄에 미쳐 평생을 폭탄 제조와 뭐든지 폭파시키는 쾌감에 몰입한다. 누군가에게 화약 냄새는 공포와 불안이지만 알란은 짙은 화약 냄새에서 평화를 느꼈다. <반지의 제왕> 속 주인공들도 반지의 냄새를 맡으며 황홀경에 빠진다. 영화 <고흐> 속 화가는 짙은 테라핀유의 냄새를 맡으면 심신을 안정시킨다. 한편 <셜록>이나 는 사람의 후각 또는 촉각을 하이퍼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놀라운 그래픽으로 번역한다. 탐정은 감각의 번역 또는 전환으로 난제들을 평균적 수준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현미경 수준의 분자의 차원 속을 유영하며 해결한다.

2

작가에게 있어서 인생의 중요한 사건과 관계는 거의 대부분 냄새를 통해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삶의 섬세하며 복잡한 수많은 결들을 쌓고 조직해간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담은 신비한 백과사전이다. 서재와 정원과 산책로와 각종 물건들의 냄새가 작가의 정신을 과거로 소환한다. 가슴을 아리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신화가 된다. 생활의 폭과 깊이가 더 기쁘고 더 슬퍼진다. 세상은 수많은 존재들의 축제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깊이 있는 존재인지 자각하게 된다.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향이 나며 그것은 실존의 감각이다. 마치 세상에 던져진 또는 포획된 인질의 상태처럼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감기고 귀가 멀면 후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작가는 모든 냄새를 인식하려한다. 그것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한다. 냄새는 다른 감각에 비해 인간의 손때를 덜 받은 감각이다. 비록 향수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감각에 비해 그렇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때를 또 인간 이전의 상태를 기억하는 유일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냄새를 맡는 정확한 경로는 미스터리이다. 실제 냄새를 맡는 건지 아니면 오래전 경험된 것들을 연상해내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김지수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경험한 책 냄새를 기억해내곤 주위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보는 눈을 뜨게 된다. 아버지의 오래된 낡은 서류 가방에는 이끼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마치 습기와 열기가 혼합된 숲처럼 느껴진다. 김지수 작가는 냄새 분자들의 운동을 엔트로피(Entropie)로 이해한다. 동물과 사람과 식물의 흔적이 향기의 숲을 이룬다. 자연과 사회, 역사, 숲과 인간의 생()이 교차하는 사건, 세계를 인간의 후각, 냄새로 기록하고 표현한다. 특별히 작가가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이 최고 절정의 순간을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이 직접 만든 향을 비롯해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체취를 채집하여 연출하였고 <냄새나무>라는 시리즈의 드로잉으로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은유하는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마치 햇빛과 물과 공기가 만나는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사방의 솟아오르고 불규칙하게 운동하며 유동하는 운동을 닮은 드로잉이다. 그것은 식물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며 인간의 정신이기도 하다. 물론 감각적이기도 하다. 신체적 감각의 세계와 정신적 형이상학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통합된다. 작가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느끼는 오래된 나무와 서적이 뿜어내는 분자들과 정원용 가위의 쇠 분자를 감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감각이며 지각이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만물의 운동이 하나의 존재로 수렴하는 환영을 기록한다. 예술행위는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교차로에서 벌어진다. 순간순간 보이지 않던 세계의 한 조각이 명멸하며 인식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점점 주술사를 닮아간다.

 

 

 

 

 




환향: 바깥에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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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


지역과 사회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들은 정체성을 강제하는 기호로써 작동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과 여성, 연령과 계층, 직업과 지위 등 다층적으로 발현되는 논의와 현상은 국가와 사회가 암묵적으로 역할과 입장을 종용하기도 하며 이러한 특성을지역색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특히파주는 외곽에 위치한 전쟁과 평화의 상징매개가 되는 정치적 장소(임직각, DMZ, 군사기지)와 터전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두 모습(신도시에 안착하는 이주민, 일거리를 찾아 외곽의 공장단지로 파견되는 노동자)에서 다양한 자본과 정치적 태제와 권력이 작동한다. 더불어 분단국가라는 정치적 태제 아래 놓인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기억에서 재현하고 있는유효한 역사에 살고 있다. 파주는 이러한 영토에 대한 내재적 불안이 감지된 지역이고 우리는 이 안에서 국경 안팎을 맴도는 불안의 그림자를 쫓고자 한다.


내재적 불안이 감도는 전쟁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분단선의 경계지점에서 영토, 공간과 장소, 지역과 사회는 어떤 의미를 강제하고 있을까. 파주가 지닌 경계선 안팎을 상상하며 경계이탈자와 아닌 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파주는 토착민, 이주민, 환향민, 실향민 등 넓은 맥락을 담고 있는한국적 난민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한국적 난민은 고향이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혹은 뿌리내린 곳에서 추방된 자를 일컫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용과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사회 안에서 탈북자, 새터민,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 확장된 범위로 짚어가면서 최초의장소 없음과 장소가 없다면존재하지 않는 자대한 기원을 찾고자 했다. 특히디아스포라 환경에서 장소 없음과 존재하지 않는 자로서의여성의 위치를 밝혀보자면 이동 주체가 대부분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주로 남성 노동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여성들은 급격한 대도시화의 흐름에서 남성의 이동성보다 자유로웠다. 이러한 의미는 국가의 공식영역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었던 가사노동과 섹슈얼리티가 상품 가치, 재생산의 값어치로 매겨졌고 이를 상품으로 판매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시에서 호출하고 있는조선족 여성이 모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노동 이주를 떠난 후 조선족 여성이 없는 그 공간을 탈북 여성이 메꿔주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지점은 국가의 공식역할에서 배제되어왔고 통계와 자료, 기록에서도 잡히지 않는 비체로서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비체존재하지 않는 자로서의 디아스포라의 여성에 주목했고 이들을 내몰았던 국가와 민족이 부르는고향이 어디일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삼백 년 전,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최전선으로 내몰려 죽음을 면치 못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이 살아남아 돌아왔을 때 절개를 잃은화냥질이 돼 버린 상황, 돌아오더라도 가문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던 환향녀의 이야기 말이다. 전시 『환향』은고향으로 돌아온다고향의 장소와돌아온다/오지 못함은 무엇인지, 이 최초의 질문을환향녀역사의 길목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길목은 사적 경험, 거시적인 화두와 가부장제 체계에서 포섭되지 않는 미시적인 사건들을 발화하는 통로이며, 계보학적인 화냥년의 호명에서 방향을 돌려 장소로부터 출발한다. 혹은 잠깐 머물러 있는 상태, 장소에 있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장소가 없는 안과 밖 경계 이탈성에 주목한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집이없는곳에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복잡한 실존의 문제로 엮이게 된다. 안전과 안위로 울타리 쳐진 경계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는 평행선으로 울려 퍼지고 결코 닿지 않을 메아리로 울부짖는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가, 영토 민족으로의 귀향이 아닌 불안의 얼굴을 환대하는 장소, 3의 연대 공간을 꿈꿔보지만 복잡한 실존의 문제는 혐오의 얼굴로 재현되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다문화-다양성의 이름으로 포섭되어 개별사적 차이를 은폐하고 채색되어진 전체의 이야기를 경계하고 울타리 안팎을 허무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대지의 기원으로써 환향녀(바깥에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가 되고자 한다. (* 참고문헌 「말과 활 11호」 탈북자 사유하기, 김성경)



일시

2019.10.01-10.10 11:00 - 18:00

Reception 10.03 17:00 - 20:00

 

장소

아트스페이스 휴

경기 파주시 광인사길 111 도서출판 청솔 301

 

기획

강정아

 

참여작가

남하나, 정혜진, 조 말, 히스테리안

 

협력

강병우, 김민주

 

디자인

오래오 스튜디오

 

후원

경기문화재단, 아트스페이스 휴, 한국출판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