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길었던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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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길었던 장마

김창영

2021.6.11-7.15

아트스페이스 휴


관념과 현실의 중간지대  


김창영은 그림을 그리되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다. 이 역설! 그렇다. 김창영은 역설의 작가이다. 그에겐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 그중에서도 회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대상을 화포에 그리고 그것을 다시 지우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자기부정! 김창영의 그림이 개념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김창영에게는 또 하나의 레테르가 있다. 이른바단색화(Dansaekhwa)’라는 칭호가 그것이다. 지난 십 여 년간 커다란 물결을 이루면서 세계 미술인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이 단색화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내재된 심성을 밖으로 표출시킨 동인이었다. 역사적으로 면면히 내려오면서 서서히 형성된흰색의 이미지, 그것이 김창영의 단색화 화면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창영이 언제나 흰색이나 흰색이 함유된 중성색 계통의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청색 계열의 색으로 그리기도 한다. 또 화면에 이미지가 없는 순수 추상화만 그리지도 않는다. 2000년대 후반에 김창영은 화면에 손의 이미지를 커다랗게 그린 뒤 이를 다시 지워 옅은 실루엣으로 처리하는 특유의 화풍을 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김창영은 젯소를 비롯하여 유성물감을 캔버스에 여러 번 반복적으로 칠한 뒤 다시 그 위에 강물이나 모래톱 등 자연의 이미지를 그리고 이를 다시 사포로 갈아내는 고된 작업을 되풀이 한다.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다소 길지만 작가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말씀하셨다시피 다른 회화 작가들에 비해 밑작업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 이미지를 그리고 덧칠해서 덮고 또 그리고 덮기를 반복해서 작업을 완성한다. 용해제를 섞어 옅게 풀어진 물감을 사용하는데, 다른 방해요소 없이 이미지와 붓터치로만 드러나는 표면을 위해서 최소한의 캔버스 표면은 나에게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젯소를 여러 번 칠한 후 갈아내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미세하게 드러나는 레이어의 반복을 보여주기 위한 필수요건이라 생각한다. 한 작업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이미지들이 그려지고 덮이기를 반복하기에 내 작업의 최종 이미지보다 시작과 중간 과정을 더욱 선호하는 동료와 주변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이미지가 나올 때까지 손을 떼기가 어렵다.”

-김창영,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Artspace Hue 개인전 도록, 2015-


이처럼 반복적인 행위에 의한 이미지 만들기는 김창영의 작업을 관류하는 중요한 컨셉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미지를 형성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의 투여와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이 추상적인 관념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건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김창영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사회 현실을 자신의 작업에서 탈각시키지 않는다.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데 한편으로는 그의 그림을 단색화가 아닌 실존의 관점에서 다루도록 하는 요소이다. 그러한 근거는 다음과 같은 작가 발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과 북이 만나는 풍경을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다보며 여러 상념에 잠긴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 속에서의 위태로운 평온, 이미지는 현실의 아픔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볼 수 있는 휴식을 주기도 한다. 두 강줄기가 만나 바다로 진입하는 곳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상반된 것들이 어울려 공생을 이룬다. 빛과 어둠이 서로 기대어 존재하고 악이 있어 선을 논할 수 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남과 북은 화합하여 공생의 길을 갈 수 있을까?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쪽은 사라져버릴까? 아니면 서로 다투기만 하다가 공멸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오래 전부터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휴의 레지던시에 머물면서 파주 인근의 자연 경관을 봐 온 김창영은 통일전망대와 임진강으로 대변되는 남북 분단과 그로 인한 이념적 대치 상황에 익숙해 있다. 따라서 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상황은 그를 자연스레 관념이 아닌 현실적인 존재로 만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색화와 같은 극단적인 순수 추상화와는 상반되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자장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그의 그림을 가리켜 하나의역설이라고 한 이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화가가 관념론자인 동시에 현실주의자가 될 수도 있음을 김창영의 경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작품 역시 추상과 구상적 이미지의 사이를 왕복함으로써 관념과 현실의 진자운동을 할 수도 있다. 이른바 중성색이라든지 중립국, 중간지대, 회색지대와 같은 완충 지역은 인간이 두 발을 서로 다른 영역에 걸친 엉거주춤한 상태를 일컬음이다. 그렇다면 김창영이 자신의 화면에서 무수히 되풀이하는 칠하기와 지우기의 저 끊임없는 자기부정은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 그것은 목적인가? 아니면 목적에 이르는 수단인가? 아니, 달을 가리킨 연후에 손가락은 과연 무슨 소용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김창영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식의 발현의 결과물인가? 아니면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하나의 수행인가? 적어도 후자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김창영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수행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수행의 고승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사회 현실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도출될 수 있다. 김창영의 그림을 여전히 단색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물론 그렇다. 나는 김창영이 아주 오랜 시간을 투입하여 반복적으로 화면을 갈고 칠하는 행위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색에 흰색이 많이 함유된 것 또한 단색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근거이다. 김창영의 그림은 고도로 세련된 행위에 의해 빛과 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것은 단색화 작가들 대부분이 느끼는 것처럼, 작업이 끝나는 시점은 오직 작가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각만이 알 뿐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 지난한 작업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시되며, 그런 연유로 해서 단색화는 몸이 벌이는 한 판의 회화적 퍼포먼스인 것이다.

김창영은 관념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중간지대를 향해 나아가는 실존적 존재이다. 그는 애초에 어디 순수한 관념이 있기나 했던가 라고 묻고 있는 듯 하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 속에서의 위태로운 평온, 이미지는 현실의 아픔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볼 수 있는 휴식을 주기도 한다.”고 한 그의 발언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윤진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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