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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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길 바래요


<답장부탁드립니다>는 정철규 작가가 2020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 연작의 새 작업들이다. 각자의 이름을 지우고 나눈 어렴풋한 이야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작가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반짝이는 색실로 수를 놓기 시작했다. 흩어진 이야기들은 눈물 자국이 되고, 글이 되고, 별이 되고, 빈 편지지가 되어 한 구절의 이름 하나씩을 갖게 되었다. 2020년 OCI미술관에서 전시한 정철규 작가의 44개의 실드로잉 작업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망각에 부치는 노래>(2004)의 정서를 은은하게 환기시켰다. <망각에 부치는 노래>는 루이즈 부르주아가 자신이 입었던 옷을 조각내고 다시 이어 붙여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함축한 작품이다. 정철규 작가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감춰진 남성 소수자들의 44개의 이야기를 짙은 양복천에 수놓았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 얇아진 종이처럼 희미하게 남아있거나 서서히 지워져가는 이야기들은 어두운 천위에서 오래도록 반짝이게 되었다.


양복점에서 옷을 지어주는 재단사처럼
바느질(needlework)은 물질적 형태를 갖는 권위적인 작업 방식을 대신하여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력과 유연함으로 많은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 작가들에게 선호되어 왔다. 다양한 천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로 연결하는 패치워크 작업이나 루이즈 부르주아의 자아치유적 도구로서의 바느질, 모든 것을 감싸고 수용하는 김수자의 보따리가 그러하듯 말이다. 정철규 작가는 양복점에서 옷을 지어주는 재단사처럼 각각의 이야기가 불러들이는 이미지를 바느질이라는 여성적 상징물을 통해 시각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짙은 감색의 양복천은 가부장의 권위와 사회적 관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어떠한 작업 방식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작가는 이후에도 <브라더 양복점>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 맞춤 재단사’를 자처하며 사회적으로 호명되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수집하고 작업으로 지어나갔다. 5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답장부탁드립니다>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손바닥 위에 잠시 앉았다 사라지는 11월의 첫눈 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백 여덟 번째 이별 편지에 대한 답장
전시는 17년간의 11월 달력을 수놓은 <59일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_그날이 다시 돌아와도 그날은 그날이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로 시작된다. 2008년부터 2024년까지의 11월 달력을 연결하여 설치한 작업인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점은 이전의 양복천의 색과는 대치되는 분홍색 계열의 천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복천의 어둡고 차분한 느낌과는 다르게 17점의 색감과 질감이 모두 달라 짐짓 밝고 경쾌한 한복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전 회화 작업에서 수용과 거부를 동시에 나타내는 이중적 장치로 분홍색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양복천 작업 이후 이와 같은 소재적 변화는 다수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서사에서 비롯된 정서와 심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2024년부터 2008년까지 시간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바닥에 놓여있는 설치 작업 <백 여덟 번째 이별 편지에 대한 답장1〉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프랑스관 작가인 소피 칼의 <잘 지내길 바래요>에 대한 108번째 답장이다. 소피 칼은 자신이 받은 이별 편지를 107명의 지인에게 보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해달라고 부탁했고 다양한 형태로 돌아온 107개의 답장과 지인의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 정철규 작가는 2미터 남짓한 흰 천에 옅은 색연필로 편지의 내용을 적고 이를 여러 조각으로 자른 다음 다시 실로 꿰매었다. 찢어진 상처를 드러내며 누워있는 편지의 모습은 온기가 빠져나간 이불처럼 상실의 흔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장의 천이 나란하게 걸려있는 <서성거리는 노크>는 2023년 갤러리2에서의 개인전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에 전시한 <닮아가는 벽>을 떠올리게 한다. 낡고 오래된 셔터에 앙상한 나무 그림자가 비친 모습을 옅은 색연필로 그린 작업인데 마치 창문 너머로 보는 풍경처럼 가까이에 있지만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 서늘한 공허함이 감돈다. <닮아가는 벽>은 창을 그리워하지만 가까이 갈 수 없고 <서성거리는 노크>의 차가운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정철규 작가는 <답장부탁드립니다>가 관계의 실패담을 고백하는 누군가의 방과 같은 전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의 지난 작업이 그래왔듯이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공감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누군가의 마음이 작동되기를 바라고 그 마음이 작업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열어보는 편지 봉투 안에는 두 장의 편지지가 담겨있다. 한 장은 그때의 나에게 다른 한 장은 그때의 당신에게 마음으로 편지를 써본다. 잘 지내길 바란다고.


글_김현 큐레이터

촬영_스튜디오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