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개인전 - 고여진 농담

“착각에서 시작해서 오해로 지속되고 진실에 끝이 난다.”(소세키)

1. 인간은 바깥과 호흡한다. 바깥이 세상이면 적응하고, 사람이면 대화한다. 지극히 단순하고 자명한 과정이다. 하지만, 역사를 뒤돌아 봤을 때,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2백년 정도다. 물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은 꾸준히 적응하며 대화했을 것이다. 허나 인간이 곧바로 ‘인간’은 아닌 것,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대화란 모름지기 대등한 존재들 사이에 이루어 법이다. 신들을 매개mediation로 소통하던 때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이 있었으니,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 한쪽 방향으로 가는 말은 결코 대화‘dia-logue’가 아니다.

2. 신을 내쫓고 들어선 인간의 시대. 오롯이 대화할 수 있게 됐으니, 이른바 진보의 시대다. 드디어 대화할 자격을 얻었는데, 김혜영이 묘사한 인물을 보아하니, 적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성적인 사람들>에서 두 명의 인물은 서로를 응시하지만, 서로의 내리깔린 눈길은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들의 밀착된 거리는 오히려 데면데면하게 그들이 사이를 벌려 놓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3. 니체가 의기양양하게 신이 죽었다고 외쳤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역사적 신’이 죽었다고 신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 자리에 곧바로 난쟁이 꼬마들이 얼씨구나 들어앉아, 신의 행세를 하게 됐으니, 홉스가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을 경고한 것은 당연했다. 이성의 비이성적 결과는 코앞에 어른거렸다. 20세기 꼬마들은 그 잘난 과학을 무기로 삼아, 자신을 태웠다. God bless you!

4. 이 기막힌 상황에서 카프카는 벌레가 되었고, 혼자서 성에서 길을 잃었다. 이른바 아이러니, 인간은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야 만다. 볼품없이 혼자 있는 김혜영의 인물들 그 모습 그대로다. 사람이 주위에 있어도 혼자고, 없어도 혼자인 사람들. 노래를 해도 소음이고 응시를 해도 엇나간다. 게다가 못생기기까지. 그들이 세상을 헤쳐가는 모습을 상상하기 괴롭다. 그들의 호흡은 거칠고 힘들다.

5. 신이 될 수 없는 난쟁이 꼬마들이 신이 되는 상황에서, 소통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신들의 사회는 역설적으로 ‘신’이 없는 사회다. 김혜영의 인물들은 모험도 진보도 드라마도 없는 일상에서 어떻게 실패하는지 별다른 감흥 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비극적이질 않다. 일상의 비극은 희극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귀한 인물의 하강이 있어야 하건만, 이미 내려갈 대로 내겨간 난쟁이가 또 어디로 하강한다는 말인가.

6. 호흡이 힘들어지면, 곧바로 마찰이 발생한다. 그때 발생하는 열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도리 없이 거리를 멀찍이 두는 수밖에. 김혜영의 거리두기 전략은, 거기서 드러난 비틀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냉소가 뚝뚝 떨어지는 소세키의 ‘말씀’이 다행일지 불행일지, 죽을 때까지 조금씩 몸으로 확인해보는 수밖에.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4.27 ~2006.5.16

- Opening 2006.4.27 pm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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