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 개인전 - 꿈아닌 꿈

<이훈 개인전: 과거와 현재의 대차대조표>

심리발달은 갈등없는 통일성 속에 과거를 현재에 통합시킨다. 발달 속에서 과거는 현재를 승격시키고, 현재를 가능하게 한다. 반면 역사 속에서 현재는 과거에서 떨어져 나와,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인식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심리적 변천은 발달이며 동시에 역사다.(푸코)

1. 성장소설과 심리학은 근대역사에 나란히 출현했다. 전자는 괴테의 ꡔ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ꡕ(1796)를 대표로 꼽으며, 후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근원으로 삼는다. 프로이트의 ꡔ꿈의 해석ꡕ이 1900년에 발행됐으니까, 대략 1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정신분석학이 등장하기 전에도 양적 방법에 근거한 실험심리학이 존재했지만, 역사와 철학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의 적자로 간주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성장소설의 기본적 테마는 자아와 사회의 관계이며, 자아가 사회와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는지 압축해 묘사한다.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면, ‘사회화’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현대에 사회학을 출현시킨 역사적 동력이며, 윤리학이 사회학으로 대체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찍이 윤리학은 주체의 내재적 판단능력을 핵심뼈대로 삼았던 학문이다. 사회학의 출현은 그런 능력을 사회가 접수했다는 것, 한 마디로 주체가 스스로 결정할 사항은 별로 없다는 징후이므로, 근대를 수놓은 이성의 목소리는 공염불이 되고야 만다. 이때부터 주체의 고단한 대장정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사회(타자)에 질줄 뻔히 알면서 싸움을 벌이다 지쳐서 쓰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이 여기에 무의식이라는 결정적 쐐기를 박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란 말 그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정신영역이며, 이는 자아의 내부에 자아가 손대지 못하는 타자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이야기다. 외부에 있던 전선이 내부로 옮겨지고, 사회(타자)가 수행하는 정신의 식민화가 철저하게 진행된 것이다. 주체는 자신을 생각할 때조차 자기가 누구인지 의심해야 하는 항상적인 노이로제에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이렇게 100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정신의 왕국은 타자의 마법 같은 손길에 하나씩 무너져 갔으며, 예민한 정신의 소유자는 이러한 침탈에 맞서 신경의 날을 곧추 세우고 저항하지만, 조그만 상처에도 득달같이 반응하는 자신의 더듬이만 고약스럽게 늘릴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신경을 잘라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지적대로 마음이므로, 이훈씨는 친절하게 ‘퇴행’하는 것이 어떠냐고, 형식적 특성 때문에 지루할 수밖에 없는 비디오예술로 조언한다.

2. 이훈의 작업은 100년에 걸쳐 벌어진 자아의 통합・분열 과정을 3년여 걸친 작업들로 한순간에 반복한다. 이것이 단순한 반복일지 새로운 의미를 내놓을지 따라가 보자. 먼저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의 구성과 동선을 살펴보면, 우선 부처님 손안의 손오공처럼 작은 화면 하나가 꼼짝마 하고 있다. 안 됐기는 <내 손안에서> 화면에 갇힌 자 역시 마찬가지다. 검은 방안에 갇혀서 이곳이 어디인지 밖으로 나갈 통로는 있는지 탐색하다가, 날뛰고 지르고 웃고 울고 한다. 그는 무엇인가 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엇이든 빗나간다. 말은 들리지 않으며, 감정은 동의를 얻지 못한다. 갇힌 자에 알맞은 운명이다. 두 번째 작업은 더욱 가라앉는다. 갇힌 자는 물에 잠긴 채 유영하거나 웅크린다. 옛적부터 물은 노골적인 모태의 은유였다. 그러니 갇힌 자는 어느 덧 물러서다 못해 어미의 자궁으로 회귀하는 서사로 귀결되는 것이다. 사실 퇴행은 만능열쇠 같은 심리적 해결책이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해결책이다. 모태 그곳은 만물의 기원으로서, 치유와 안전을 보장하지만, 영원히 머물 만한 곳도 머물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리고 병리적 행동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거는 잃어버린 조국처럼 우리가 되돌아오는 최초의 땅이 아니라 인위적이며 상상적인 대체의 과거인 것이다.”(푸코) 만약 이훈의 전시가 여기서 멈췄다면, 본성적으로 지루한 형식에 역사적으로 반복된 내용을 결합한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작업에서 퇴행의 고백을 솔직히 털어놓기 때문에 균형이 잡힌다. “뻔히 알고 있는 고백을 강요하는 것, 이 얼마나 음험한 형벌인가.” 다자이 오사무는 ‘음험한 형벌’이라고 했지만, 사실 예술가야말로 그런 형벌을 기꺼이 감내하는 몇 안 되는 종족이며, 유물처럼 살아남은 근대주체의 마지막 생존자다. 해서 예술가는 역주행마저 합법적으로 보장받은 면허증을 소지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3. 마지막 작업에서 전시의 동선과 작가의 역사는 짤막히 마무리된다. 흉터로 얼룩진 자기 몸을 뜬 다음에 살을 파먹는 개미의 영상을 투영시키는 것. 시뻘건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검정색 개미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퇴행했는지 개인사적 실마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선명한 순간이다. 퇴행을 주제로 퇴행하는 동선을 구축하며, 현재의 퇴행을 과거의 상처와 접속시킨다. 이렇게 하자, 지루했던 전작의 효과는 남달라진다. 과거와 현재의 대조가 명확해지며, 전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서 균형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과거와 현재의 대차대조표가 어떠한지, 거칠고 적나라하게 상처 난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세련된 영상에 말끔한 배우를 내세운 결과가 무엇인지, 그는 알아야 한다. 물론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거리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을 세련되게 추억하기에는 과거의 구체성들이 생동한다. 세련된 형식은 생생한 질료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마련, 성장은 빌미로 구체를 대가로 요구했던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7. 29 - 2006. 8. 19

- Opening 2006. 7. 29 (토) pm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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