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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 烋/휴/ 개관기념
김일용초대전

초대일시 : 2003년 4월 4일 금요일 PM. 6시
전시기간 : 2003년 4월 4일(금) - 4월 18일(금)
장소 : 아트 스페이스 烋/휴/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34-1

라이프캐스팅 김일용은 인간의 신체를 둘러싼 이원적 인간관人間觀의 문제를 조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살아있는 신체를 이미지로 떠내는 라이프캐스팅life-casting을 통해 그는 라이프캐스팅은 전통적인 모델이 아닌 작가가 조각가로 살아가면서 만나고 대화한 일상의 사람들과의 상호이해의 과정을 통해 실제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삶을 영위하는 살아있는 사람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렇게 일상의 신체를 통해 삶의 문제와 인간의 본질의 문제를 사색하고 자신의 항구적 주제인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에 접근해간다. 여기서 신체에 대한 지속적인 조각적 형상화는 작가가 말하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작가 자신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허구적 현상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말한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은 김일용이 조각가로서 갖게되는 물질적-촉각적- 존재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각의 본질적인 물질적 존재감은 김일용의 작품에서는 어딘지 묵시적인 분위기로 변화하는데, 이는 인류가 겪은 20세기의 많은 전쟁과 사건들이 보여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 인간의 숨막히는 형상과 수없이 쓰러져간 그리고 현재도 스러져가고 있는 익명의 평범한 일상인들이 참혹한 비극의 이미지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김일용의 존재성와 비존재성에 대한 조각적이미지들이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반성의 사유를 강렬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일용의 20세기 현대조각에 대한 반성과 사색은 매우 현실적이며 참여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단. 그것은 마치 로버트 카파와 같은 오늘의 전쟁 종군기자들의 눈처럼 기록적이며 그러기에 역사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김일용의 작업과 전시의 분위기는 근래의 작가들 가운데 드물게 고전적이며 진지하다. 반성적이고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란 20세기의 조각가들인 로뎅과 루이즈 부르조아, 조지 시갈 등과 어떤 심리적 혹은 초월적 연대감을 가지기 때문인데, 이러한 연대감은 김일용이 타고난 혹은 과거로부터 배운 조각가로서 자연스럽게 예술적 상상과 사색의 연대감일 것이다. 현대 고전들과의 깊은 내적 친밀성으로 김일용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체 김일용은 신체를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신체를 지닌 물질적 존재론서의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의 신체로서 이해한다. 그의 신체는 물질적이지만 동시에 고대 동서양의 자연철학자들이 생각했거나, 현대의 프랑스의 철인들-바슐라르, 바따이유, 푸코 등-이 생각하는 인간관을 혹은 노장의 사유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이러한 신체는 물질과 정신이 얽혀있는 분리할 수 없는 현대 이전의 인간을 보여준다. 산업혁명 이후 점차 강화되어온 기계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현대사회에 심각한 폐혜를 초래했음이 명백해진 오늘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매우 오래된 질문에 매달리는 김일용의 태도는 과거 형이상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모습을 엿보이기도 한다.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현상 현대사회학의 계보를 따르는 철인哲人들은 일반적으로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인식하기보다는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현실적인 사회적 조건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오늘날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루려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비판과 반성에 대답해야 한다는 숙제를 맡게된다. 인간의 존재성과 비존재성에 대한 김일용의 조각적 형상화라는 일견一見 뜬구름 잡는 스타일의 예술 형이상학 또한 그러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대단히 추상적이고 사색적인 문제들과 태도를 어떻게 시각화하고 촉각화하는 형상화形象化의 문제와 대결하는 조각가는 또한 매우 특수한 상황과 표현을 보여줄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에 접근하지만 그 문제의 본질로부터 지속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는 혹은 벗어나게 되는 이 잡을 수 있으나 잡을 수 없음의 상황이 김일용에게게 보여진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대결하려는 이 무모하고 돈키호테적 시도가 바로 김일용의 작품과 작업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따이유식 욕구의 소비가 김일용의 작업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신체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는 오직 소비하고자 하는 그리고 무한히 증가하는 내부로부터의 욕구가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초월적 지점으로 고양된다. 세계는 매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며 나타난다. 순행하거나 역행하거나 또는 소용돌이친다. 거대한 대양이 파도와 포말로 나타나 듯 세계는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혹은 거세게 변한다. 우리라는 존재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혹 세계의 밖에서 변화한다. 우리는 바로 나 혹은 너라는 개인이거나 사물이거나 또는 나와 너가 상호작용하고 공존하거나 투쟁하는 관계이다. 나와 너는 서로에게 동일하지 않은 타자로 나타난다. 우리란 본래 타자들의 다른 이름이다. 타자들로 인해 나는 존재라는 거대한 사태를 경험한다. 현대의 철인哲人들은 이러한 통찰을 통해 나라는 직접적인 존재가 사실은 확증 없는 심증으로 만들어진 허구라고 가르친다. 타자나 사물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가운데 하나의 현상을 가리킬 뿐이라는 교의가 20세기에 확산되었다. 나 자신이 나라는 존재를 알거나 경험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바로 타자를 통해서이고, 김일용의 형상을 따라가다 마침내 우리는 타자의 모습을 만나게된다.

나의 눈에서 본 것이 아닌 타인의 눈에서 본 현상이란 본래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하다. 그러한 가능한 현상이 나라는 존재의 생성과 관련된 비밀이다. 아무도 나의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이전 혹은 이후의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들 속에서 나타나고 타자의 속에서 나는 사라진다. 실상은 타자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 속에서 나는 태어나고 죽는다. 나는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혹은 죽거나 사라지지만 그것은 또한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렇다. 이러한 역설은 과거로 혹은 미래로의 시간여행의 가설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시간의 역행과 뒤틀림과 분산을 통해 나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비존재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기억과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하지만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사태에 직면하면 자연스럽게 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라는 언어와 의식과 그에 대한 느낌을 회의할 수 있다. 나를 죽이는 행위인 자살은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몸/생물학적 생명의 삶을 끝낸다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기억과 의식과 상상과 꿈의 존재로서의 나를 죽이는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세계의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순간이라는 현상은 나를 죽이거나 타자-김일용-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임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나는 나타나고 타자이 나타나고 마침내 나와 타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니면 이러한 말의 역순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 나는 동시에 혹은 엇갈리며 나타난다. 단지 그러하다.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의 현상이 반복적으로 생성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수많은 타자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김일용의 작업에서 타자들이 나타나고 내가 나타난다. 이러한 타자의 논리에 따른 김일용의 이해는 사실 여러 갈래의 이해의 길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익명의 길이다. 그는 조각가이고 살아 숨쉬고 있으며 매우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일반자의 모습이다. 그는 개별적인 한사람이지만 한 명의 개별자가 아닌 일반자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 김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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