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다 개인전 - 도시인

세 개의 방, 두 개의 문, 한 개의 수레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갇혔습니다.(이수명, 「어느 날의 귀가」 가운데)
방은 역사와 함께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상징 같은 것이다. 단순히 동굴에 숨어서 자연의 위협을 회피했던 나약한 존재였지만, 집을 지으며 방을 만들며 자연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한 몸짓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문명의 시작을 울리는 종소리였으며, 자연의 질서를 교란하는 반란의 북소리였던 셈이다. 이러한 측면은 동굴과 방의 형태에서 저마다 그대로 반영됐다. 전자가 자연에 흠집을 내더라도 더함이 없이 빼는 ‘부정’negativity의 몸짓이었다면, 후자는 자연 위에다 무엇인가 덧붙이는 ‘긍정’positivity의 몸짓이었다. 더하기와 빼기의 차이는 사뭇 심대했다. 그때 당장 눈에 보일 만큼 자연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조금씩 축적되어 자연을 아예 송두리째 덮을 만큼 확대돼 버린다. 그렇게 보면, 플라톤의 동굴의 우의는 동굴에 갇혀 보는 것만 믿어 버리는 인간의 몽매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명의 기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두루 끌어낸 결과다. 무엇보다 방의 출현은 ‘안과 밖’이란 중요한 범주를 마련했다. 이후, 이 범주는 정신과 육체, 인간과 세계, 자유와 필연성 등등, 다양한 변주를 일삼으며 삶의 무늬와 빼곡히 새겼고 사유의 체계를 단단히 세웠다. 하지만 동굴에서 탈출한 존재는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인간의 모태인 자연으로 돌아갈 귀로를 영원히 상실했다는 것을. “우리가 단지 자연의 자녀였을 때 우리는 행복하고도 완전하였으나, 자유로와지면서 이 둘 다 모두 잃고 말았다.”(쉴러) 특히, 자연의 흔적이라고는 애완동물 외에 눈 씻고 찾아봐도 보기가 힘든 대도시에서, 현대인은 공적인 거리와 사적인 방 사이를 방황하며,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운명처럼 살아가게 된다. 에다는 <도시인>에서 그런 방들을 열고서, 손짓을 하는 것인지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어쨌든 하고 있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버튼을 눌렀다 말았다 등등, 어쩌면 인간의 삶은 생각보다 단순할지 모른다. 몇 가지 제한된 행동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생 동안 그런 몸짓을 얼마만큼 하는지 헤아릴 생각조차 끔직하다. 너무나 단순하고 단순한 삶의 형태, 하지만 진리는 단순함 속에 묻혀 있다. 복잡한 가지를 잘라내면, 뿌리는 언제나 하나다. 에다의 작업도 그렇다. 하얀 버튼 방, 수레 놓인 방, 조명 밝힌 거리(혹은 방). 딱 세 가지로 구성한 단순한 도식으로 현대적 삶의 구조를 펼쳐낸다. 그런데 자세히 쳐다보면, 무엇인가 다르다. 수레 놓인 방만 문이 없는 것이다. 방은 언제나 문을 요구하는 법, 문이 없다면 방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면 무엇일까. 수레 놓인 방은 전체공간에서 부피로 치면 가장 적지만, 의미는 그것과 반비례한다. 마치 하얀 버튼 방과 조명 밝힌 거리를 날카롭게 잘라낸 것만 같다. 게다가 그곳을 채우는 빈 수레의 공허한 울림들. 그것은 마치 시시푸스의 영원한 돌 굴리기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담아 올리지만, 그 무엇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 뿐. 즉 전시의 핵심적 모티브다. 그것을 에다의 전작과 비교하면, 적잖이 의외다. 관객과 호흡할 인터페이스도 없으며, 이에 따라 재밌게 즐겨볼 상호작용도 없다. 춤도 없고(K양의 트레이너 되어 보기) 우산도 없고(사이코드라마 2) 자전거도 없다(로봇, 백남준에서 휴보까지). 관객이 놀만한 친절한 장치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작업만 찬찬히 ‘관찰’하면, 그것의 ‘형식’을 추론하면 확인된다. 그렇다. 이번 작업은 이전과 달리 ‘같이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멀찍이 보면서 ‘관찰’하는 것이다. 전에 없었던 ‘거리’가 생겼던 것이다. 물론, 체험과 상호작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맨 먼저 눈길을 끄는 하얀 버튼 방을 보자. 그곳은 천장 가득히 똑같은 버튼으로 채워져 있다. 버튼 마다 소리를 할당하여, 누를 때마다 다른 숨소리가 나온다. 어떨 때는 허탈하고 어떨 때는 놀라는 등등, 잠시 재밌다는 생각도 들지만, 차분히 듣다 보면 어떤 소리도 그다지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촉각을 눌러보는 느낌보다, 시각을 하얗게 눌러대는 압박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진다. 이것은 조명 밝힌 방도 마찬가지다. 코앞에서 압박하는 느낌은 없지만, 덩그러니 길쭉한 거리를 비추는 조명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압박에서 해방되는 순간 퀭하니 들어선 침묵 같은 거리라고 할까. 옆에는 운명 같은 수레바퀴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헛되게 수행한다.

세 개의 방은 사적 공간(내면), 공적 공간(세계), 현대인의 운명(필연성)을 각기 드러내는 우의allegory다. 그것들이 우의인 까닭은 비교적 상투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며, 에다가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확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 경험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돌파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사로 잡혀 갇혀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자. 그것은 그렇게 그럴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재 그들이 겪은 경험, 느낀 감정, 대한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의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체로부턴 유물이 나오며, 경험이나 미화된 그 죽어버린 과거의 사건들로부터는 추억이 나오는 것이다.”(벤야민) 머무는 시선이 과거에 붙잡혀 있다는 것. 그래서 맛있게 추억할 거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세상과 부딪히며 잠시 물러날 수는 있다. 그것 또한 지혜다. 그러나 단서가 붙어야 하리라. 그렇게 확보한 거리를 쓰려면, 거기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12. 16 - 12. 30

- Opening : 2006. 12. 16  PM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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