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나 개인전 story telling

투명한 꼴라쥬 

 

일상. “우리의 행위의 결과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루돌프 불트만 / Rudolf Karl Bultmann)” 그리하여 일상의 사물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손을 떠나는 순간, 행위의 종료. 일상을 살아가고 만들어가는 행위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행위자의 손을 떠나 무언인가가 되어버린다. 일상은 강박이거나 관음이며 관능이거나 현기증이다. 흐릿한 동시에 명료한 이미지는 그 중 하나이다

사건. 일상을 벗어난 순간 우리는 무한한 좌절을 맛본다. 그리하여 좌절감이란 감정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런데 일상은 이미 사건들의 총합이니 그 하나의 사건이란 일상의 한 순간이자 일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의 공통의 기억과 언어로부터 벗어난 형태로 유령처럼 엄습한다. 어느 누구의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태어난다. 그것은 이미지와 관련된다. 이미지는 사건으로 전환한다. 이미지는 표현된 사건이다. 동시에 이미지는 요동치는 사건을 묶어두는 것이다

시선.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가장 소박한 행위이다. 숨 쉬듯 시선과 시선이 들숨과 날숨처럼 오고간다. 숨쉬기 또는 존재하기의 복잡성이 이미지의 표면에 머물거나 침투하거나 튀어 오른다. 그것이 시선들 사이를 미끄러지는 이미지의 생()이다

수집. “캥거루가 뛰어놀고 원숭이가 나무를 타는 것처럼 인간은 사유를 한다(발렌틴 브라이텐베르크 / Valentin Braitenberg)” 번역해보면 캥거루가 그렇고 원숭이가 그러기에 인간은 수집한다. 무언가를 수집한다. 사물의 쓰나미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습관적으로 수집하고 사유하고 표현한다. 인간은 사물을 통해 숨 쉰다. 사물과 정( )을 통한다. 그것이 수집의 과정에 삼투한다. 삼투는 막과 막을 넘나드는 운동이다. 그 막은 이미지이자 사물이다

배열. 일상과 일상, 사물과 사물이 병치되며(그것이 가능하다면) 비로소 의식은 숨을 쉰다. 이미지가 펄떡이는 의식, 의식의 수면(水面)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태초에 태어난 아메바와 집신벌레는 오늘도 영생한다. 이미지 또한 그렇다. 이미지는 단수이되 복수이다. 그러므로 영생하며 모호하거나 불가능하다. 복잡성이란 이미지와 함께 동반한다. 복잡성을 드러내는 꼴라주는 차라리 소박하다

재배열. 배한나의 이미지는 밀착인화로 나타나거나 단정하게 정리된 이등변 삼각형, 직사각형 또는 코카콜라로 황금비례를 연상한다. 그것은 이등변 삼각형의 등을 타고 기울어지거나 직사각형의 각을 타고 낙하한다. 배열과 배열, 관계와 관계들의 이미지이다. 코카콜라는 곡선의 형태로 나타나는 언어와 의미의 능선을 타고 날카로운 꼴라주를 향한다. 이미지의 연쇄는 배한나의 표면이다. 투명한 꼴라주들. 의례 꼴라주는 복잡성을 지나 강박에 이른다. 자유롭게 부유하는 강박들, 통제된 조건들, 배한나의 이미지는 마치 문신이나 낙인처럼 꼴라주의 표면을 조각한다. 기호이든 상징이든 무엇이든, 꼴라주는 이차원과 삼차원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그것은 교환불가능한 배한나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배한나와 배한나의 이미지와 그를 둘러싼 언어들은 그 불가능한 교환을 시도한다. 의례히 그런다

 

-  김 노 암 (전시기획자

- 전시 기간: 2009. 05. 02() - 2009. 05. 22(

-opening : 2009. 05. 02 () PM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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