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의 숨고르기: 김영미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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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베일 속으로 숨어들기
김영미 개인전_여덟 번의 숨고르기 展 전시

‘그렇게, 나는 나의 베일 속으로 숨어든다.’ 작가의 말이 묘한 울림처럼 의뭉스럽게 다가온다. 이미 작가는 이 게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심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작가에게 이 베일이란 단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비가시적인 막이 아니라 작가가 그 기능과 효과를 유념하고 있어, 그로 인해 더욱더 작업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특별한 효과를 지니는 베일로 선택된 것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베일 자체가 작가 작업의 의미 효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 이미 이런 심리적인 베일과의 상관관계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베일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작가와의 관계 속에서 재 정향된 읽기, 또 다른 해석이 요청된다. 작업 전반에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논리를 바탕에 두고 있는 작가의 경우 소위 말하는 정신분석학적 담론조차 일반적인 해석의 열쇠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풀려 하는 순간 다시 잠겨 지는 이중 효과를 지니는 것 같다. 작가가 이미 이러한 정신분석학 담론에 대한 일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 담론이 어떤 해결이 아니라 출발의 논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경우 이 베일로 인해 작업의 의미효과가 의도적으로 덧칠되고 두께를 지니게 된다. 적어도 비밀 같은 막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일은 시각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작업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하고 증폭시키는 어떤 효과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치 거울처럼, 작가와 작업의 의미를 계속해서 투영하면서 그 상관관계를 끊임없이 보여 지도록 하는 장치 말이다. 작가 자신, 혹은 세상에 대한 작가와의 관계, 태도를 포함하여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방식이긴 하다.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보는 이들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으로 발그레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는 그 관능은 바라보는 이를 애달프게 하는’ 그런 베일이기 때문이다.

이 묘한 베일 속에 보란 듯이 숨어 있는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가시성과 비가시성 전후에 자리하게 보는 이를 어떤 떨림으로, 애달픔으로 욕망하게 한다. 마치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알다가도 모르는 것, 알면 더 복잡해지고, 잡혀지지 않는 줄다리기 같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이며 심리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아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간극은 단지 좁혀질 뿐, 좀처럼 극복되는 일이 없다. 하지만 극복되지 않으면 또 어떠하랴. 세상사 좀 꼬인들 삶의 의미며 가치가 덜해지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예술이 설 자리도 이토록 떨리고 애매한 그 간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 역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불안하고 균열된 심리에 대한 작가의 인식도 이러한 얼마간의 긍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균열과 간극을 그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경구마저 생각나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복잡한 경험에서 기인한 정신적 불안정성과 심리적 이상에 대해 수긍하고, 이를 극복하는 한 방법의 하나로 작업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 힘든 과정을 기꺼이 마주하면서 이를 대리하고, 우회하는 작업을 통해 온전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정공법의 길을 걷는다. 내밀한 트라우마조차 온전히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베일조차 선물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베일은 거추장스러운 자기 가림막이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자기를 새롭게 각인하고 감각케 하는 자기를 위한 색다른 장치일수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 불투명한 가녀린 막 사이로 자기 전부를 온전히 감추지 못할 것임을 못내 알면서도 불안한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하는 것은 비단 작가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의 소박한 심리일 것이다. 결국은 감춤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드러냄인 것들임을. 작가의 작업도 이러한 논리의 궤 속에서 작동한다. 다만 그 사이에 놓인 과정, 밀도나 강도가 남다를 뿐이다.

이러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드로잉이다. 드로잉은 하나의 형상이기 이전에 그 행위 주체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것들을 담아낸다. 흔적이고 지표(index)인 셈이다. 미분화된 개념의 밑그림이기도 하고, 어떤 의지와 정서적 표현의 얼개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작가의 경우 심리적인 밀고 당김을 길항하는 매개항으로 기능하기에 남다른 주목을 요한다. 의지의 작용이 채 미치기 전에 반복되는 선긋기는 심리적 강박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좋은 길벗이 되기에 충분하다. 강박이란 심리적으로 균열된 내부의 또 다른 자아가 외부에 반영되어 다시 주체로 돌아오는 정신의 작용이다.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하면서 작동하기에 반복의 형태를 띤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한 심리적 대응 또한 반복을 주요 기제로 할 수 밖에 없다. 집착적 충동이나 반복적 행위가 수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심리저변에 깔려 있는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치유하기도 한다. 작가의 드로잉, 선긋기도 이러한 강박에 대한 해소와 연관되어 있다. 사각형 형태의 패턴 모양 만들기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한 형태이긴 하지만 반복을 통한 차이화를 통해 점진적인 변화의 여지, 일정한 여유마저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혹은 강박의 불안감을 행위의 반복으로 도피하려 하는 것이고, 시각적인 반복과 균형으로 해소하려 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를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포르다 놀이(fort da game)처럼 언어적 작용으로 상실과 부재를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혹은 더 강하게 주체를 트라우마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하면서, 마조히즘적 방식의 고통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작가의 드로잉은 이 두 경우 사이에 자리하면서 작동한다고 보여 지는데, 단순한 상실과 부재를 반복하는 선긋기 이상으로 고통을 직접 대면하여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적극적인 행위, 곧 무의식적인 반복이 아닌 얼마간의 의지가 개입된 행위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여덟 번의 숨고르기가 자리하는 이유이다. 쫒기는 반복 강박이 아닌, 너른 숨을 쉬면서 긴 호흡으로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 그렇게 주어진 자기 자신과 온전히 대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라우마에 대한 단순한 해소가 아닌, 이러한 정신분석의 논리를 의지적으로 염두에 둔 개념적인 작업으로 읽혀진다. 이는 작가의 전 작업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 선긋기의 반복 강박의 논리에 깔려있는 밀고, 당기기가 다시 조형적인 흑백의 대립구조, 디지털 메트로놈 사운드의 청각적 진동으로 이어지면서 작업의 일정한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 조형성으로 머물 때조차 정지된 이미지의 고정된 의미가 아닌, 심리작용의 미세한 떨림을 반복하는 동적인 움직임으로 작업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 연동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효과는 작업 자체의 내용적 기반인 동시에 이와 관계하는 관람(觀覽)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같은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이와 연결된다. 움직임으로 이어진 애니메이션은 그 과정에 서로 다른 시간, 공간대가 교차하면서 작가의 지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상들, 현실과 비현실을 교란시키고 중첩시킨다. 심리적인 봉합일 수도 있으니 앞서 말한 선긋기의 강박해소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불안한 심리의 상태를 대리하고 우회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봉합이고 치유일 수 있는 심리작용들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이를 심리적인 것으로만 환원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심리를 기반으로 하여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감응(affect)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심리란 개인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특정한 것만이 아니기에 때로는 너와 나를 연결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너와 나의 개별 차이를 넘어 어떤 공유와 공감을 형성하게 하는 힘 작용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부단한 반복을 통해 균열된 심리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를 타인과 함께 공감케 하려는 심리적 의지의 작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한 심리란 타인에 대한 기댐으로 완화되기도 하는 법이다. 작가의 경우 이처럼 타인에 기대는 것 이상으로 작업을 통해 ‘타인화’ 혹은 ‘타인되기’의 과정도 더해지는 듯하다. 예전 작업에서의 ‘cheepy’라는 얼터 에고 설정도 그렇지만 이번 전시의 ‘Another Facet’ 시리즈의 경우, 고풍스러운 유럽식 스타일의 흑백 레드메이드 건축 오브제가 우선 겉모습부터 눈길을 잡아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존재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이국적인 빅토리아 스타일의 건물 양식도 그렇지만 흑, 백의 같은 쌍이라는 점도 이러한 알 수 없는 의미의 증폭에 관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하지만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부 구조가 더 의뭉스럽다. 자연스럽게 관음의 충동, 시선의 욕망에 빠져들게 하니 말이다. 빈 공간에 가구들이 얼기설기 엇갈래 배치되어 있는데다 이상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빛과 그림자가 음영진 채로 투영되어 있다. 누군가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의 배치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인데, 무언의 압박감이 은근하게 밀려오는 특정한 미장센mise-en-scene 효과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를 유아기적 선망의 공간일수도 있었음직한 서양식 건물에 심리적 긴장감이 충만한 이 빈 공간의 타인되기를 통해, 공간의 심리적 압박을 선 체험하면서 이를 다시 연동시켜 가시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비어있는 공간이기에 욕망으로 도달하려 하고, 그렇게 욕망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부재하는 비현실을 대면하고, 다시 현실을 넘나드는 과정 속에서 결국 이러한 공간 속의 타인되기는 ‘타자화 된 자기’, ‘자기화 된 타자’의 반복일 것이다. ‘타인되기’는 강박과 불안을, 그 해소를 다시 반복하는 제3의 인물로의 자기 전이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불안한 욕망을 해소하고, 다시 그 불안한 욕망을 욕망하게 되지만 타자라는 더 큰 울타리로 확장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러한 밀고 당김이 한편에서는 억압의 점증일 수도 있겠지만 종국에는 유희이고 향유일 수도 있음을 열어 놓으면서 말이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효과마저 작동되는 것이다. 모두의 문제, 더 넓은 보편적인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심리적인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스타일의 레디 메이드 건축물 오브제인 ‘clock on the horizon’은 각기 다른 박자로 진동하는 메트로놈 소리가 더해지고, 흑과 백이 반복되면서 이러한 심리적인 동요와 그 반복을 증폭시킨다.(혹은 해소한다) 두 작업 모두, 그저 사물일 뿐일지라도 마치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작가 자신의 것은 물론, 심리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극적인 공간과 시간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바탕이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레디메이드인 점도 심상치 않다. ‘30days story’ 작업이 그렇다. 블랙 하드보드지의 패턴 작업 위에 잡지에서 오려낸 일상의 이미지들이 꼴라주 된 이 작업은 의지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작가의 얼마간의 조형적인 구성이 한 몫 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연한 구성으로 엮어진 작업이다. 우연하지만 일상을 도배하다시피 한 이미지들이기에 이들 이미지들의 꼴라주는 유동하는 현재의 이미지의 풍경을, 무의식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현대의 삶을 연동시킨다. 우연한 이미지의 접합들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어떤 패턴이 반복적으로 자리하는 법, 현대인들의 끊임없는 욕망으로 뒤범벅이 된 바벨탑 같은 모습이 그런 것일 것이다. 이미지의 삶이 그렇듯 비록 허상이고 가상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현실의 삶에 일정한 영향력으로 자리하는 유동하는 욕망의 흐름들을, 욕망으로 덧칠된 하수사한 시대의 풍경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그 욕망의 끝에 대한 특정한 어떤 입장을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 욕망의 작동이 반복을 거듭할 뿐이며, 그 욕망의 풍경에 이 시대의 숱한 주체들이 부유하듯 매달려 있을 뿐이라는 암시 정도는 던지고 있는 듯하다. 작가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 대해서 말이다.

모두에서 말했듯, 작가는 여전히 어떤 베일 속으로, 그 불투명한 장막 속으로 숨어 들으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다.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반복을 거듭하여 반추하고, 성찰하고, 극복하려는 과정을 통한 과정이 그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은 것이 아니라 그 은밀한 개인의 감각과 사유의 상태를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시키는 것이다. 불투명 혹은 반투명에 대한 작가의 집착, 이를테면 린시드 오일이나 트랜시유를 그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갖가지 화폭에 다시 덧입히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단순히 작업의 보존을 위한 장치만은 아니다. 이러한 반투명의 과정은 자신을 일정하게 보호하고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가시화시키는 장치인 셈이고, 종국에는 타인들 혹은 어떤 공동체와 함께 공감하려는 노력으로 읽혀진다. 그 엷고 섬세한 막으로 인해 자신과 그 밖의 세상이 미세한 떨림으로 진동하는 것이고, 쉽게 보일 수 없는 작가 내면의 비가시적인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것이다. 투명함도 투명하지 않음도 아닌 거울처럼,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내밀한 감성들과 복잡하기만 한 심리들을 비출 수 있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고 보니, 또 다른 작업인 ‘star’에 내비친 저 아롱거리는 별 빛이 못내 아른 거리면서, 마치 작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인간 심리 내면의 저 깊숙한 심연에 자리하는 어떤 못다 한 말들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 민병직(문화역서울 284 전시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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