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s-scape: 심우현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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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정경(Eros-scape)

작가의 작가노트와 작업논문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심우현(1987~) 회화를 설명하기 위한 주요어는 에로스(=성애, eros), 로맨틱(=낭만주의적, romantic), 회화성(paintery), 그리기(painting)와 동작(gesture)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 근저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관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반영이 충실하고 폭넓게 깔려 있으며 그 세계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유동적인 에너지 상태의 에로스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심우현뿐 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 예술과 낭만주의의 상관성은 점점 증대되고 있으며 이 현상에 관한 다양한 매체 이론을 적용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디지털 시, 미디어아트 등의 연구 논문과 저술들이 창작자들에게 끼치는 뉴 미디어적 감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다. 즉, 생생한 표현과 아주 섬세한 감정전달,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독창성이라는 가장 진보적이고 탈현대적인 동력을 낭만주의에서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주요 개념에 충실한 실제 작품의 형식과 소재, 즉 의식 세계 형성의 저변에 갈린 신화와 토템, 혹은 무속적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 색채의 사용, 스트로크, 화면 구성 등의 요소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작가가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풍경화의 장르 형식의 차용과 상징적 변용 작업들이 어떻게 자연 요소, 또는 자연물의 모방이 아닌 참조의 방식으로 실재에 근거한 심리적 상상계를 구축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매체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너무 오래되었고 진부함으로 치부되어 거의 실제 가치를 상실한 듯한 낭만적 개념들을 기계미학적으로 재생시키는 이 시도들의 의미를 밝혀볼 것이다.

먼저 심우현이 작업노트를 통하여 에로스와 로맨틱의 개념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나의 작업은 만물의 탄생의 근원인 에로스(eros)를 중추로, 원시자연에서 날것의 에로스적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으며 이 유기적 에로스가 생물학적 충동에서 문화적인 충동으로, 또한 다른 국면으로 변증법적 사유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이 에로스가 갖는 힘은 양가적이다.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 아레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사랑을 관장하는 신인 에로스는 부모 신들이 지닌 상이한 능력처럼 서로 극단적인 성향인 ‘끌림’과 ‘쫓음’이라는 사랑의 상반된 힘을 지배한다. 그의 황금 화살에 맞은 신체를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화염처럼 사랑의 욕망을 끓어오르게 하거나, 반대로 납화살을 맞춰 무조건 상대를 증오로 밀어내게 하는 힘도 자유자재로 부리는 그의 장난스런 복수극은 요정 다프네와 오만한 아폴로 사이에서 벌어진 일방적 애정극도 참혹하게 빚어냈다. 프로이트에게 에로스는 성애나 자기 보존의 생의 본능을 의미하는 방어적 기제 용어이며, 소크라테스의 육성을 빌려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는 <향연>에서는 불완전함을 극복해나가는 자기 의지, 즉 완전해지기 위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바따이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 1897~1962)는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 전파 이후 종족 생산을 위한 성을 신성함과 생명으로, 쾌락을 위한 성을 저속함과 죽음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성 금기에 대한 위반의 문화적 뿌리를 캐려는 그의 <에로티즘(1957)>에서 에로스를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와의 관계로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상식과 사회적 인습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부여되는 금기에 저항하는 모든 인식, 즉 위반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에로스를 바라보는 작가 심우현은 이미 우리들에게 예견된 죽음과 황폐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산과 창조로 나아가는 단순 변증법적 기능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도처에 편재되어 서로 끌리게 하고 세상을 구성하게 만들며, 우연한 조우가 거듭되어 낯선 사물들이 서로 만나게 하는, 그리고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장소와 배열의 근원적인 힘을 포괄하는 밀도의 개념으로 바로 이 에로스를 우리에게 긍정적인 모습으로 제안한다. 이것은 마치 이미 진리로 판명된 만물이 서로 끌리는 힘인 뉴튼의 만유인력과, 우주와 같은 진공 공간일지라도 빛과 에너지가 흐르거나 전달되도록 채워진 가상의 매개 물질 ‘에테르(ether)’의 특성이 혼합된 낭만화된 개념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에로스의 힘은 형체도 없고 생명 있는 만물이 탄생하기 이전의 카오스로부터 세계가 탄생하였고, 저 프로메테우스 빛이 미처 도달하지 않은 음영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 죽음의 세계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거부감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작가가 계속 앞으로 나가도록 이끌어 준다. 거대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이러한 마술적 힘의 근거는 존재론적인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로부터의 끌림의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에로스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세계 변화와도 맞먹는 혁명에 거의 대개 수반되는 잔혹한 폭력성은 은유적인 상징으로 대치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다시 플라톤에 의하면 표현은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성에 호소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물과 존재의 양상을 자기의 관점에 따라 결정짓는다. 18c 말엽 낭만주의에 찬동하였던 예술가들은 예술이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상상력의 영역이며, 이 상상력의 힘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에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지극히 깊은 통찰을 자의적이 아니라 필연성을 가지고서 말로 나타내고 있는 사유 방식인 것이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따라서 낭만주의 정신은 자신의 공상하는 것에 대하여 흡족히 여긴다고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주지적 입장의 계몽주의의 편에서는 ‘낭만적’이라는 형용사를 앞세우는 표현이란 근대의 위계적인 구조에서 일탈하는 탈 근대성-여기서는 진보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반동적이라는 의미-이자 저항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우현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부터 기인하는, 즉 자기로부터 비롯된 회화라는 확고한 원칙은 확실히 낭만주의적이다. 그가 작업논문을 통해 이미 밝힌 대로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법적 구조의 한계를 파악하고, 세계의 중심이라는 절대적 주관성을 내세운다. 본래 낭만주의는 예술가와 자연 사이의 신비스러운 교감 및 개인주의, 열정과 감수성, 상상력을 강조하고, 묘사적이고 섬뜩하며 이국적인 경향을 선호한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도 예술의 표현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개개의 작가 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었더라도 이성의 단계로부터 탈선을 감행하고, 설득의 방식으로 기호의 옮겨 쓰기에 대한 반기와 기계혁명에 의한 급속한 문화화에 대하여 ‘거리 두기’ 했던 그들 스스로 조차도 고전적인 묘사와 표현을 저버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심우현은 초자연성과 공포에 대한 관심을 보다 노골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심층부에 잠겨있는 사건, 기억, 이미지, 상징들을 얼룩, 연상, 살짝 드러내기로 화면 전체의 동적인 흐름에 거칠게 휩쓸리도록 한다. 마치 질투와 욕망으로 가득한 신과 인간이 함께 올림푸스 산정 아래를 거닐던 신화 시대로부터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운 드라마는 무시무시한 재난과 재해의 모습으로 현현되었던 것처럼 화면에 배치된 각각의 이미지 요소들은 우연한 조우를 통해 충돌하고 파열하며 강력한 에로스의 힘을 발산한다.

화면 속에서 공상적인 요소와 뒤섞여 변형된 신화와 화산 폭발과 같은 기록적인 재난과 사건, 짐승, 이방의 주제에 대한 온갖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기억에서 기인한 이국적인 성향의 상징물들의 위로 다른 색의 물감이 뒤덮여 삭제 혹은 지워지며 에로스를 통한 ‘관계 맺음’이 반복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낭만적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한 장소들은 고립된 체 사회 정치적인 개입의 거리를 유지하게 되어 이 세계의 심각한 문제는 가려지고 뒤덮이며 자연적 요소들을 닮은 붓질로 덧칠해져 은폐된다. 간혹 어떤 이미지의 부분은 소용돌이치는 표면을 다시 헤집고 불거져 나온다. 그리하여 이 화면에서 모든 위계 질서는 무너져 내린다. 화면 곳곳에서 모습을 일부분 드러내는 야생 짐승은 이성에 가려져 억눌린 성애와 같은 동물성의 혈통에 대한 은유의 방식이다. 비록 이것아 타나토스적일지라도 미지와 마주 대하는 작가의 두려움은 본능처럼 양자 사이의 긴장을 통해 드러난다. 이 새로운 은유는 언뜻 나이브해 보일 수 있는 화면에 긴장을 불러와 전체 요소들의 조화를 흐트러뜨리며 이성 본위의 합리성을 비판하고 전복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미디어의 계보학을 연구하는 조지아텍의 두 교수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의 공동 저작인 <재매개(1996)>는 미디어 역사의 통사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하여 ‘투명성의 비매개 원리’를 제안하였다. 이에 따르면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투시 원근법을 발명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그림의 화면은 다른 공간을 내다보는 창문이 되었으며, 그 투명한 창틀 너머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세계는 그 이전의 육안에 의존해 묘사해왔던 풍경들을 수치의 비례대로 변형시켜 자동 정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화가들은 실재감의 부각을 위해 나머지 필요성이 적은 부분을 축소시키거나 화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지워나가며 매체성의 투명화에 다가갔다.

그러나 비록 같은 삭제 방식일지라도 심우현은 저자의 흔적 지우기에서 ‘뒤덮음’은 투명성이 사라지고, 그의 작업을 감싼 분위기가 지극히 회화적(paintery), 즉 더욱 매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때의 붓은 머리로부터 이어지는 팔과 손의 연장, 즉 인공의 보철구이자 작가 신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그의 페인팅은 팔만 휘두르는 것이 아닌 다리와 전신을 움직이는 행위이며 붓질(stroke)은 연장된 손가락의 터치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동작 입력 장치를 통해 추가되는 유기적인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역동적인 화면을 따라서 강렬하면서도 대조적인 색점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관점을 인용하자면, 그림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구성체로써 새롭게 창조된 생태를 투영한다.

최근 심우현 회화에서 주로 사용한 색상을 살펴보면 적색조에 가까운 핑크와 자색조에 접근하는 블루가 다양하게 화면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낭만주의를 맹비난한 역설적인 낭만주의자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집필한 <색채론(1810)>이 설명하는 ‘물리색’ 이론에 의하면, 물리적으로 양극화된 색채 사이의 상승 효과로 인해 밝음과 어둠 같은 두 극단 사이에서 전체적으로 완성된 색채환을 이룬다고 하였다. 크고 작은 붓질의 흔적은 자연 요소를 연상시키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서로 연결되는 색점의 가까워짐과 떨어짐의 거리에 따라 표면으로부터의 깊이감과 음영의 차이를 느낄 수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대로 화면을 전체적으로 통일감 있는 유기적인 이미지의 추상적인 구성체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심우현 작품에서 선택한 구도에 있어서, 마치 조감도처럼 고각에서 아래로 내려보거나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화면의 시점은 마치 3인칭 롤플레잉 게임 속 공간의 시점, 좌우, 상하, 고저를 망라하며 자유자재로 이동한다. 또한 이미지 요소들이 시간의 선형적 순서대로 정렬하였을 때 연출되는 영화적 내러티브는 한 장면으로 빠르게 압축된다. 수 많은 정보가 흘러가고 또 소멸 직전인 세계는 이렇게 축약된다. 그렇게 압축된 자연과 현실을 따라 잡기엔 우리의 사유는 너무나 느리거나 무뎌졌다. 속도에 의존함으로써 중립적인 공간-유클리드 기하학-의 좌표 세계에 존재하는 완고한 물리적 규정은 효력을 상실한다. 정해진 상대적인 크기, 서로의 동떨어진 거리와 상관 없이 존재하거나 존재 했던 것들의 상관 관계들이 관계 맺고 거리 두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현상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우리 사고의 극적인 변속을 감행한다

<소멸의 미학(1991)>에서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는 개인의 의식 차원을 넘어 점점 빠른 속도로 소멸을 향해 질주하는 기술문명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현상들을 비평하면서 각 분야에서 유기체적인 활동의 정상적인 흐름이 끊기는 중단, 사고, 시스템 장애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피크노렙시(picnolsie)’를 폭넓게 사용한다. 실종된 시간과 기억을 복구하려 애쓰는 노력은 새롭게 체험한 비연속적인 시간의 체험감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이 미세한 발작 현상이 이미 기술사회의 문화생산양식의 숨겨진 무의식적 토대라는 점을 밝힌다.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 끊김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온전한 나인 상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 부재와 공백의 연결지점을 찾아 복구했을 때의 비현실감은 이미 해체되었던 속도를 재 조립함으로써 새롭게 축약된 현실감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체험은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심우현의 회화작업에서 천천히, 그러나 매우 정교하게 연출된다. 하지만 현재의 장소로 기억의 상징물들을 소환하여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파노라마(panorama)화와는 달리 심우현의 경우는 기억들 위에 현재 경험한 장소를 겹쳐 놓아 미니어처(miniature)화하여 비현실을 현재에 속한 것으로 만들며 때로는 서로 용해시킨다. 여기어 덧붙여 말하자면, 매체미학적인 관점에서 낭만적이란 것은 개인의 감정과 흥분이 여러 가지 교묘한 장치와 요소들을 통해 그것을 빗어내기 위하여 예술가가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정교하게 연출된다.

- 최흥철(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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