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퍼레이드: 김한조, 신명환, 앙꼬, 유창창, 홍연식, 하민석

27.jpg


2015. 07. 24 - 2015. 08. 14

칸 퍼레이드: 만화라는 우주에 나부끼는 여섯 개의 깃발들
칸은 만화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때 사용하는 장치이자 건축에서 집의 칸살의 수효를 세는 단위이기도 하다. 또한 영어로 Kahn은 핵 물질의 양을 나타내는 단위이며 1칸은 1만 메가톤에 해당한다. <칸 퍼레이드>는 작지만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자신만의 수많은 ‘칸’을 쌓아나가고 있는 작가들의 행진 같은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만화는 인쇄기술의 발달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회화와 조각은 원본을 감상하고 소유하는 방식으로 인해 일부 계층만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면 만화는 수많은 자기복제를 거쳐 대중에게 전해졌고 이는 상당한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만화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이며 소비자와 창작자 모두에게 예술의 민주화를 이룩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 모퉁이, 작은 지면을 차지하는 풍자만화의 인기가 그 신문의 흥행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복제 기술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만나 만화의 꽃을 다시 만개할 시기가 되었다. 70~80년대는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소년중앙> <보물섬>과 같은 만화 잡지나 만화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만화를 누렸지만 이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칸 퍼레이드>는 만화방 시대에 만화를 배우고 이제는 광속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웹툰 시대를 살고 있는 만화가들의 이야기이다. 상징적으로 내건 6개의 깃발은 웹툰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만화가의 외침이며 이 외침에 동감하는 자들을 위한 순례길의 이정표 같은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작가들은 자신들의 깃발을 들고 기꺼이 퍼레이드에 동참하려 한다.

문학에 문체가 있고 그림에 화풍이 있다면 만화에는 만화체가 있다. 만화체는 펜의 종류와 기법에 따라 문체가 달라진다. 즉 그림체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고 여백과 데생, 색의 있고 없음과 대사와 말풍선의 모양 그리고 프레임을 나누는 칸의 형태에 따라서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칸 퍼레이드>에서는 작가들의 만화체의 다양함과 차별성을 주목하고자 하며 만화체를 보는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대사와 지문만 쫓아가는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

김한조는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심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감정에 과도하게 몰입되는 연출이나 기법을 피하고 화자와의 일정한 거리감을 주는 시점을 보여준다. <기억의 촉감>에서 마주치는 일상의 사건들은 마음 속 깊은 우물물 같은 곳에서 꺼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늘 만나면서도 변기의 물처럼 흘려버리는 순간들일 수도 있다. 김한조가 들려주는 내면의 목소리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흘려보내는 일상에서 만나고 지나쳐버리는 감정들의 촉감을 그려내고 있다. 때문에 김한조의 작업은 바닷가 근처에서 바다에 가지도 못하고 뭍에 오르지도 못하는 거품같은 감정이나 기억의 부산물들을 모아 플랫하게 널어 말린 김같은 촉감을 준다.

앙꼬의 작품은 0.1mm의 얇은 제도용 로트링펜의 끝에서 시작한다. 건축가들도 잘 쓰지 않는 극도로 가는 펜이다.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작성한 그림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모아 <나의 변화>라는 아카이브를 선보였다. 최근에 마음 속 건축주가 의뢰해서 만든 <할머니 방>에서는 그의 건축가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공간에 맞는 재료를 찾고 재현해가는 과정은 어떤 건축가보다도 건축가답다. 그래서 앙꼬의 만화는 깊이감이 느껴지는 3차원의 공간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기법 위주의 투시도와는 다른 실제 있을 법한, 어디선가 보았을 법한 기시감이다. <나쁜 친구>에서 보이는 먹으로 채워진 하늘이나 벽 등의 대비되는 검정 그림자 안에서 독자들은 작가와 대화를 하거나 또는 숨어서 이야기를 지켜보는 친구가 된다. <열아홉>, <나쁜 친구> 그리고 최근에 발간된 <삼십 살>까지 작품은 그의 자신의 삶의 단편들이고 펜이 펜을 먹는 몰입된 펜선의 적층과 검은 먹의 그림자들은 앙꼬라는 무대의 커튼콜(curtain call)이 된다.

유창창의 작품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수많은 메타포로 가득하다. 그의 상상과 꿈에서 얻은 에스키스의 조합은 그의 지난 경험과 시각적 자극들로 불꽃놀이처럼 튀어 오른다. 유명 만화가의 B팀 출신이라는 이력과 삶의 궤적에서 축적된 풍성한 재료들로 요리를 즐기는 쉐프같은 작가이다. 그간 그의 만화에 등장한 캐릭터들을 조합한 <88xMonologue>는 잘 다듬은 깍둑썰기이고 드로잉북 시리즈는 수시로 기록하고 키워온 다양한 모종 같은 것이다. 는 미각을 자극하는 새로운 형태의  안티파스토(antipasto)이며 그와 함께 독특한 향신료와 소스의 역할을 하는 설치 작품 가 있다. 유창창의 만화나 회화, 드로잉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맛을 보아야 한다. 요리 제목의 의미와 레시피를 들으면 더 그 맛이 더욱 이해되는 유창창표 작품은 메타포와 시간과 용량과 재료를 잘 배합해서 만든 요리 같은 작품이다.

나(신명환)의 작업은 건축과 재학 당시 컴퓨터를 잃어버려 유일하게 남아있는 종로3가 재개발 계획안 모형과 그리고 점점 뚜렷해지는 건축에 대한 갈망을 나타낸 프린트와 노루지 그리고 몇몇 설계 드로잉, 건축에 대한 풍자를 나타내는 조형물, 말풍선 기호를 활용한 카툰연작, 새로 기획중인 시인 이상을 주인공으로 한 <제비다방> 픽션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종로3가 재개발 계획을 큰 문제의식 없이 설계하던 당시의 나와 수많은 재개발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소중함을 이야기 하고자하는 현재의 내가 연결되어 있다. 시인 이상을 통해 현대에 지켜야할 가치와 근대 사회와 문화 예술인들의 시간을 뛰어넘는 교류에 대한 고민을 픽션으로 보여줄 기획안들이다. 내가 카툰과 설치미술, 건축을 통해 여전히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동등한 가치, 존재와 소중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민석은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중인 만화 <탐정 칸의 대단한 모험> 중 <레슬러 X의 죽음>의 편집본과 원화 그리고 칸을 뛰쳐나온 3D 설치물로 이루어져있다. 이미 <안녕, 전우치>를 통해 많은 인기를 얻은 그의 작업은 어린이다운 장난기와 익살스러움이 만화 전체에 가득하다. 어린이 만화가 학습 만화로 대변되고 있는 환경에서 하민석은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명랑 만화의 계승자이다. 그러나 과거 명랑만화의 고정된 구성과 방식에서 벗어나있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권위를 상징하는 어른들의 간섭이나 잔소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탐정 칸의 세계는 자유로운 상상과 이야기로 가득 차있으며 ‘엉뚱한 행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에피소드와 반성하는 모습으로 끝나는 결말’의 틀을 벗어던졌다. 탐정 칸과 조수 니발리우스의 모자와 자동차 등 등장 인물의 단순한 조형미와 간결한 펜선, 색의 절제 그리고 재치와 익살맞은 이야기는 나무를 깎고 맞추는 가구(架構)적인 하민석 만화만의 매력이다.

홍연식은 문하생 생활을 통해 만화를 시작한 정통 만화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편하고 행복하게>와 최근에 발행된 <마당 씨의 식탁> 사이의 이야기를 만화로 구성해서 보여주었다. 작가는 철저하게 만화를 통해서 세상에 발언하는 작가 중 하나이다. <불편하고 행복하게>는 깨끗한 자연환경과 정직하게 자라는 농작물, 그리고 가족과 미래에 대한 외침을 정교한 펜선과 뛰어난 데생으로 보여준다면 <마당 씨의 식탁>은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놓치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준다. 담백하고 정교한 데생으로 그려진 아픈 가족사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누구에게나 있을 콤플렉스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저 심연에 가라앉혀 놓았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이자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다. 홍연식은 두 편의 단행본과 흔적들로 마당씨의 일상과 식탁을 닮은 단출하면서도 선명한 작업을 선보였다.

만화는 그동안 어른들이 말하는 <나쁜 친구> 였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읽느라 <불편했지만 행복했다>. 만화를 읽는 동안은 <명탐정 칸>도 되었다가 <뛰어가는 루나>가 되기도 한다.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손으로 넘기며 눈으로 칸에서 칸으로 넘어가며 가슴으로 맞이하던 그 만화의 <촉감을 기억한다>. 그들의 만화들이 얼굴에 분칠하고 앉아서 누군가 바라봐주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또 잊혀져가는 마중물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그들의 그림에 <날개>가 돋아 <칸 퍼레이드>가 새로운 칸을 넘어 그 자체로 생명력이 넘치는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신명환(만화를 꿈꾸는 건축가이자 건축을 꿈꾸는 만화가)

Post a Comment
*Required
*Required (Never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