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것도 닮지 않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김창영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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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것도 닮지 않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파란색이 칠해진 그림이 있다. 파란색은 물리적으로 규정된 파란색이 아닌 제작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이질적이고 특별한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파란색이다. 파란색으로 채색된 화면의 일부분의 파란 색과 다른 부분의 파란색 그리고 전체로서의 파란색은 사실 제작자와 감상자가 다르고, 또한 경험의 시간이 다르고 그 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관객이 경험하는 파란색은 인접한 파란색들의 집합이다. 생각해보면 그 파란색의 채색 밑에는 또 얼마나 많은 빛의 표면들이 쌓여있을까. 하나의 파란색을 채색하기 위해 작가는 무수한 표면을 갈고 채우고 메우고 다시 가는 과정을 반복했다. 하나의 색이 쌓이고 겹쳐지며 다른 색은 덮이거나 모호하게 빛과 그림자들로 분해되어 쓸려나간다. 그리고 지평선처럼 화면을 갈라놓은 분할 선을 에워싸고 무수한 이미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시선은 화면에 아른거리는 빛과 이미지의 운동을 따라간다. 뭔가 인상, 감각, 사건이 발생하긴 했는데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전에 자꾸만 빠져나가 버린다. 작가는 빛과 그림자와 색이 멈추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추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창영의 작업은 회화로서 드러나지만 제작 과정에는 마치 하나의 조각이나 오브제를 만들 듯 채색된 화면을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결과 캔버스에 색채를 얹히는 과정만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마모되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이미지는 빛과 그림자, 빛과 빛, 빛과 색, 색과 색,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애매하게 가로지르려 하고 있다. 추상과 구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이미지가 반복해서 형성된다. 사실 모든 추상은 제작 과정에 구체적인 접촉과 감정을 필요로 한다. 작가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색채의 변화, 조형 이미지의 변화를 담고 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시간, 낮도 밤도 아닌 빛이 변하는 시간, 그럼으로 세상만물의 변화를 담는 빛(색)이 김창영의 이미지를 특징한다.

색의 경험은 시대와 장소, 세대에 따라 다르다. 색채는 단지 조형요소에 그치거나 질료와 감각의 차이에 의해 작가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색채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있다. 성장과정에 형성된 작가의 감각적 체험과 함께 한 사회가 오랜 시간 쌓아온 문화적 경험과 관념이 함께 혼합된다. 따라서 캔버스 화면이 흐릿한 형태의 이미지와 한 계열의 색채로 구성되면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마음에는 작가의 흔적, 특징, 개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조형적 또는 물리적 경험과 완전히 조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넘어서고 다시 부딪치는 과정이 반복된다. 애초에 작품을 제작하는 시기의 작가와 존재론적 위치가 다른 감상자는 작가가 마음속에 연상했고 경험했던 것을 모호하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약속체계가 열려있는 그림 이미지, 빛의 이미지를 매개로 만나는 한은 그렇다. 유사한 경험과 동일한 경험은 다르다. 감상자는 작가와 유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동일한 경험이란 이미 되돌릴 수 없이 지나버린 불가능한 시간에 속한다. 감상자는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작가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경험을 하는 것이다.

김창영의 작업을 구성하는 유일한 것은 빛이다. 색도 빛이고 그림자 또한 빛의 일부이다. 모든 것이 빛으로 환원되는 이미지로 구성된 캔버스의 화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물질적 감각이지만 동시에 인식 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인식의 대상이 너무 모호해서 일상적인 원인결과나 논리적인 인식을 생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육과 영의 문제에 집중한 관조나 성찰을 떠올리게 된다. 채색 이전에 작가가 불필요할 정도로 효율적이지 않은 평평한 표면을 만들려는 과정은 마치 어떤 구도자의 모습을 닮았다. 작가가 관객이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 일상의 시간을 벗어난 인간의 언어로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상태, 상황,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여행을 재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빛의 상태로 표현하는 것처럼.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몇 가지 무언가를 닮은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은 대지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지평선처럼 캔버스 화면을 두 개의 이미지, 두 개의 세계로 분할하고 있다. 그보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이미지는 손동작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고 또 어떤 것은 구름이 떠있거나 강이 흐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는 말자. 심지어 손을 그렸다는 작가의 말도 믿을 것이 못 된다. 작가가 손을 그렸다고 할지라도 이미 결과로 드러난 형상은 더 이상 손이라고 할 수 없는 빛 무리, 색 면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것과 동일한 것이 다르듯 무엇을 닮은 형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또 무엇을 닮은들 세상이 온갖 사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관객은 김창영의 이미지를 보고 자신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빛이 마음에 던져놓은 것은 한 때의 꿈이나 망상과 같은 허상으로서의 세상만물(색)인 것이다. 빛이 빚어낸 색 또는 색이 버무려놓은 빛은 작가가 마음먹은 이미지로 드러나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서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니. 누가 알겠는가, 감상과 해석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 모호한 빛과 색의 버무림 속에서 뭔가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비밀에 대한 어떤 비의를 찾아낼지.

- 아트스페스 휴 운영위원장 김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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