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밤: 최선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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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성 속에서도 무심하게 낮과 밤은 계속이다. 언제부터가 낮이며 언제까지가 밤인가. 이제 나는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어서 한 몸뚱이의 말처럼 알고 있다. 한쪽의 낮과 다른 한쪽에서의 밤은 하나의 공간 속에서 이미 있었다. 제법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겨우 그 주변을 맴돌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미 한정 짓기에 익숙한 나는 다시 내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

작품을 한다는 것은 사실 나의 위치와 좌표에 관한 연속된 질문이다. 일상의 인천 앞바다에서 여러 날을 담궜다 건져올린 스펀지에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담으려 했다. 그리고는 그것이 전시장 안에서 스스로 젖은 몸을 말리며 내부에 머금은 소금기를 스펀지 표면 밖으로 토해 내도록 했다. 시간과 공간에 관한 기억의 부산물이 생물체처럼 되새김질 되어서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스펀지 표면에 백태가 되어 앉기를 바랬다. 쉽게 볼 수 없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들이 나의 미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우리 눈앞에 잠시나마 드러나 주기를 바랬다.

2016년 5월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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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회화
유은순(미학)

최선 작가의 작업은 특이한 위치에 서 있다. 한국 근현대 회화의 두 축인 한국적 모더니즘(단색화)과 민중미술에 빗겨 있으면서도 이 둘과 어느 정도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회화 작업인 ‘벗겨낸 그림(Naked Painting)’은 한국 모더니즘 회화를 정면으로 반박한 작품이었다. 무언가를 채운 듯 의미가 결연해 보이는 작품은 실은 누군가가 버린, 폐기된 회화에 불과하였다. 이는 의미가 결여된 한국 모더니즘에 대한 반박이었다. 사회에 산재한 문제들을 외면하고서는 진정한 회화를 그릴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작업의 기저를 이룬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민중미술과도 거리를 둔다. 대형 걸개그림에 행동을 촉구하는 고조된 인물과 문구들은 거대한 저항의 대상이 있을 때 유효한 것이지 현대와 같이 사회적 문제가 산발해있을 때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사회적인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외면한다면 그것은 모더니즘 회화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작가는 사회정치적인 이슈들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

‘쓴 침’(2014)은 한국 모더니즘 회화에 조소이자, 실천하지 않는 회화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이다. 신체가 생장하기 위해 음식물을 체내에 원활하게 받아들이고, 또 외부의 세균으로부터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침’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체내 물질이다. 하지만 침이 내뱉어지는 순간, 그것은 타인에게 불쾌감을 일으킨다. 누군가에게 침을 뱉는 행위는 어떤 것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부의 표현, 즉 내가 타인에게 부정당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캔버스 표면에 정성스럽게 젯소를 칠하고, 표면을 갈아내고, 또 다시 칠하고 갈아내길 반복하여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자신의 침을 뱉고 또 뱉길 반복하였다. 그것은 의미가 비워진 하얀 캔버스에 대한 저항이었다. 한편 관람자는 하얀 캔버스를 처음 마주하고는 그 속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는지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작품의 제목을 보고는 이내 불쾌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작가가 뱉어내고 뱉어내다 결국 침이 써질 때까지 거부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린 순간, 관객은 작품의 표피를 벗겨내고 다시금 작품을 들여다보게 된다.

‘멍든 침’(2016)은 ‘쓴 침’과 연작과 같이 보이지만, 다른 양상을 띤다. 쓴 침이 캔버스 위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물감(침)으로 덧발라졌다면, ‘멍든 침’은 짜이지 않은 캔버스에 가시성이 매우 높은 색을 사용하여 타인이 뱉은 침의 형상을 그렸다. ‘쓴 침’에서는 ‘나의’ 신체 분비물이 작업을 위한 도구로 쓰였다면, ‘멍든 침’에서는 다른 이의 신체 분비물의 흔적이 작업을 위한 모티프로 쓰인다. 작가는 여기서 모더니즘 회화를 자신의 카운터-모티프로 활용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타인과의 관계성, 공동체적 문제의식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쓴 침’과 달리 ‘멍든 침’에서는 장식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직접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대신 무늬만을 차용하고 있다. 작가는 타인이 무심코 뱉은 침을 밟은 순간 느낀 개인적인 감정을 모티프로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건 뱉어진 침이 곧 부정을 뜻한다면, 작가는 ‘쓴 침’에서 자신이 뱉어낸 침을 보며 감상할 관객을 향해 조소를 날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멍든 침’에서 작가는 그 조소를 다시 되돌려 받는다. 누군가에 대한 부정은 곧 나 자신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이며, 그렇기에 모든 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멍든’ 침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타인을 부정하는 문제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역설적이게도, 뱉어낸 침은 사회적인 시스템의 위쪽을 향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데스매치처럼, 같은 형편의 사람들을 향한 화풀이이다. 그렇기에 침은 ‘멍든다.’ 그 어느 사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힘없는 메아리일 따름이다. 단지 그 외향만을 취한 이 장식적 무늬에는 익명의 군중의 타인에 대한 조소, 그리고 이 조소를 다시 돌려받는 개인에 대한 씁쓸한 뒷내음이 담겨 있다.

‘낮밤’(2016)은 2014년에 제작된 ‘소금회화’의 후속 작업이다. ‘소금회화’는 2014년 4월에 비극적 사고가 일어난 팽목항 바다에서 캔버스 천을 반복적으로 담그고 말리는 행위를 통해 제작된 작품이다. 얇은 천에 말라붙은 소금은 아무리 담그고 말려도 아주 적은 양만 캔버스 천에 달라붙는데다가, 소금은 조그만 충격에도 금세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버린다. 비극의 장소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재료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을 준다. 한편 소금은 덧없이 사라져버린 희생자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의 작지만 소중한 힘, 그리고 정부의 무능을 복합적으로 지시한다. 2년 후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한 작가는 그 비극의 시작점인 인천앞바다를 찾아가 ‘낮밤’을 제작하였다. 이번에는 캔버스가 아닌 누군가가 매트리스로 쓰다가 버린 스펀지를 사용한다. 작가에 따르면 쉬이 담구었다가 뺄 수 있는 캔버스 천과는 달리 스펀지는 물을 머금으면 무게가 상당해져 이전의 작업보다 힘들었다고 한다. 그 무게에는 비극적 사태 해결에 한 발자국도 진전할 수 없었던 작가 자신이 짊어진 짐이자, 조금이라도 사고를 해명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더 많은 소금을 채취하기 위해 반복하는 행위는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 그는 사태 해결을 위하여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예술가로서 그 비극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작가는 스스로 기만하지 않기 위해서, 작업 전, 대상이 되는 재난/사고의 장소를 항상 찾아간다. 그곳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아무런 힘도 없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제 발로 찾아가는 것, 실제로 비극이 일어난 장소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그 체험을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민중미술과 최선 작가 모두 ‘실천’에 관한 예술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의 태도는 웅변적이고 계몽적이지 않다. 작가는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저 그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몸뚱아리 하나만을 겨우 움직여 실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재촉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행동하는 것은 진정 실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그곳’을 또는 ‘그것’을 우리의 눈앞에 들이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기를 촉구한다. 자신의 실천을 통해 체득된 경험이 고스란히 작품 안에 깃들어있기 때문에, 관객은 이를 쉬이 외면할 수 없다. 본인을 언제나 회화작가라고 소개하는 최선 작가는, 2차원의 평면에 자신의 실천을 더함으로써 회화를 삶과 조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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