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교 개인전 : 상냥한 도살자

20191001_1241361.jpg

상냥한 도살자

2019. 09. 17  09. 28


Z세대의 누드 또는 벌거벗은 신체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1 ‘벌거벗음이라는 의상

회화는 결코 쾌락과 취미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뒤를 뒤따라오는 부차적인 효과이다. 또한, 회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배양하는 것도 아니다. 회화는 무언가 생산적이고 기능적인 효과와는 다른 시간대의 직관 또는 성찰과 조우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젊은 미술가에게 그 작가가 젊기 때문에 또 예술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상상력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이미지는 실상 매우 관습적이며 제도적이다. 오랜 기간 훈육 된 문화와 교육의 결과이다. 예술가는 거의 대부분의 이러한 배운 상상력에 아주 조금 또는 아주 작게 실금을 낸다. 그것이 거대한 파열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유희와 공감이라는 점에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표현은 미래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 박필교 작가의 작업 또한 이러한 시각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다소 뜬금없는 상황에서 작가 자신의 누드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포즈를 반복해서 그린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온전히 남게 되는 벌거벗은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 자신은 유머와 풍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부조리와 불합리, 부도덕을 드러내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했는지 아무 상관없이 작가의 작업이 도덕적 또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일상공간에서 성인이 벌거벗고 나타나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불안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를 통해 매개됨으로써 객관적 거리감을 가지게 되면서 일종의 유머코드나 풍자의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

박필교의 누드화는 일종의 예술이 지닌 품격 또는 존재론적 위상을 밑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을 통해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작가 자신의 누드화가 아니라 벌거벗음의 인상으로 느껴지도록 연출했다고 보여 진다. 존 버거가 말했듯 미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누드화는 사실 벌거벗은 그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시각적 관습으로 옷을 입힌 또 다른 차원의 의상화이다. 근대 이전의 누드화가 신 또는 영웅과 같은 특별한 존재에게 입혀진 의상화라는 직관은 박필교 작가의 누드화도 일종의 작가의 의식과 시각적 관습으로 자신의 자아에벌거벗음이라는 옷을 입힌 자화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작가는 유머와 풍자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난 뭔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특별한 존재라는 전통적인 예술가 상을 해체한다. 이러한 태도는 배우거나 경험에 의한 또는 후천적 노력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한 세대가 취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인다. 그리고 그 세대가 지니게 되는 현실과 꿈, 상상과 이미지, 의식과 무의식, 예술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관계 또는 정의와 관련된다. 예술은 더 이상 세상을 바꾸고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영웅적 지위에서 평범한 직업으로 하강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보나 하나의 자본 하나의 취향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의 예술가가 느끼는 사회에 대한 미적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2 유머와 풍자 그 너머

최근 유튜브에 소개된 부산의 나이 지긋한 교육감 아저씨가 직접 부르는 랩은 온통타인을 일단 리스펙! 닥치고 존중! 일단 리스펙!”을 반복한다. 스웨그를 멋진 태도로 보는 랩의 문화에서 차용해온 제스처로 올드 보이가 뜬금없이 타인에 대해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주입식 도덕주의 랩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세대 간의 소통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처연함 또는 비극적인 사회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전통적인 풍자의 의미는 환상이나 그로테스크 또는 부조리를 기반으로 한 위트나 유머로 비판대상의 존재론적 지위 또는 도덕적 결함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비판이나 공격의 대상이 자기 자신에게 회귀하는 운동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현대예술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박필교 작가의 작업 또한 이러한 흐름에 있다. 이는 니체나 실존주의를 떠올리지 않아도 20세기 초중반 세계대전과 함께 자본주의와 사회의 세속화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면서 인간 자신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혐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냥한 도살자>라는 전시 제목 또한 결코 유머와 풍자로는 가둬둘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불가해한 비극 또는 비참함이 있다. 작가가 성장하면서 밀레니엄 전후에 느꼈을 사람의 피를 말리는 저강도의 갈등과 폭력과 부조리가 깊이 내면화된 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초상일 수도 있다. 20세 초 독일의 화가 게오르그 그로츠의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인물 초상이 연출하는 그러한 음울하고 스산하며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맞닿아 있다. 작가의 얼굴을 빌려왔음에도 말이다.

박필교의 인물은 누드의 포즈와 피부의 컬러와 톤, 장소와 배경을 통해 차갑고 냉엄한 현실의 어떤 장소에 갇힌 인상을 준다. 벌거벗은 그림 연작은 등장인물이 작가 자신 또는 작가 자신을 빼닮은 젊은이의 뜬금없는 손짓과 발짓, 엉덩잇짓을 보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내면에 자리하는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과 부조리, 불편과 불합리, 미래에 대한 어두운 인식 등을 오버랩하게 한다. 그런데 벌거벗은 인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유머와 풍자가 기능하기에 너무 처연하다. 유머와 풍자가 분명 매우 효과적이며 미적인 표현과 소통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박필교의 그림에서는 작가의 주장처럼 유머를 쉽게 느끼기 어렵다. 또한, 풍자는 더더욱 어렵다. 자연인으로서 작가와 상관없이 회화 속 벌거벗은 인물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고 다시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일에 몰두할 지도 모른다. 박필교 작가의 혐오와 불신의 풍자는 실상 바닥을 침으로써 다시 위로 튀어 오르는 힘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한 손에는 허영을 다른 한 손에는 도덕을 쥐고 현실과 일상을 허우적거리며 꿈을 꾼다.

 


 

ppp123-5.JPG

선율, oil on canvas, 130.3×162.2cm, 2019

ppp123-4.jpg

인식, oil on canvas, 130.3×130.3cm, 2019

 


박필교 (b.1992)


 


2019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18      농담의 스릴, 정수화랑, 서울


2017      욕망의 관하여, 송어 낚시 갤러리, 대전


 


기획전


2019      거슬러 오르는 이미지들, 꿈틀갤러리, 포항


2019      유니온 아트페어, S-Factory, 서울


2018      옆집에 사는 예술가, 아트스페이스 휴, 파주


2018      인간욕망 - 김동유, 박필교 2인전, 갤러리 고트빈, 대전


  


선정 / 레지던시


2019                    예비 전속작가제 지원사업, 예술경영지원센터


2018-현재            +네트워크 창작 스튜디오, 파주


 


 


 

 

Post a Comment
*Required
*Required (Never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