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뒷맛: 사박 송승은 정주원
2020.3.13-4.9
2020년 첫 번째 기획전 <행복의 뒷맛>은 회화의 새로운 경향을 모색하기 위한 지속적인 리서치를 기반으로 기획되었다.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문제를 영민하게 다루는 전략적인 작업들 사이에서 사박 송승은 정주원의 회화는 그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그린다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먼저 진지하게 살핀다.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그리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모르겠다’는 우문현답과 같은 말이 돌아온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린다는 말처럼 적절한 작가의 변명은 또 없을 듯하다.
사박은 일상에서 수집한 사소한 이미지를 모호한 풍경으로 그려낸다. 짧은 콘텐츠에서 쉽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수많은 이미지들, 반복되는 매일의 어느 한편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대상을 향한 연민이자 그가 머물렀던 공허한 시간을 향한 애도의 행위이다. 송승은의 작업은 개인적 경험과 기억의 공백에서 피어나는 의구심과 상상이 더해지는 과정에서 생산된 양가적 이미지다. 동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독의 음모와 다이닝 테이블 위를 오가는 의심과 경계의 뉘앙스가 ‘무섭지만 귀여운’ 이미지로 소환된다. 정주원은 <엄마, 미술해서 미안해> 라는 인상적인 전시 제목을 통해 회화 작가로서 지속 가능한 삶의 형태를 고민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또 다시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유령과 별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유령은 보이지 않으며 간혹 누군가에게만 특별하게 목격되는 존재이다. 작가는 유령과 별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 작가로서의 입장을 고민한다.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먼 발치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등지고 짐짓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삶처럼 현실적인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치열한 삶도 없을 것이다. 헤르멘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묘사한 ‘행복의 뒷맛’처럼 질서와 안전이 보장된 안락한 세계와 슬픔과 폭력이 만연한 불안한 세계는 고작 문 하나를 두고 한 발치 간격에 있다.
사박, 목장갑, acrylic on canvas, 30×30cm, 2019
송승은, 프린스, oil on canvas, 34.8×27.3cm, 2019
정주원, 별천지, oil on canvas, 170×192.5cm, 2020
세 우주를 따로보기, 혹은 겹쳐보기
박지형(독립 큐레이터)
본 전시에 관한 원고를 청탁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세 작가가 보여주는 회화의 외형적인 유사성이나 여성, 페인터, 신진 작가 등의 코드를 가지고 이들을 범주화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칫 각자의 세계를 축소하고 납작한 일반론적인 감상을 이끌어낼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쉬이 드러나는 공통의 요소로 세 명의 목소리를 섣불리 연결 짓기보다, 각자의 작업이 위치하고 있는 그곳에서 발화하는 것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단 ‘지금 그들이 다른 무엇이 아닌 회화를 매체이자, 소재이자, 주제로 다루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관한 일관된 호기심을 유지하기로 한다.
사박의 작업 세계는 범람하는 이미지와의 접촉 경험에서 시작된다. 먼저 필요한 과정은 무수한 형상들이 출몰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가 충분히 헤매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인터넷에서, 출판물에서, 집과 직장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시각 정보의 더미들이 급물살을 타고 움직인다. 그중에 많은 것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버리므로 내 주변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 망각되지만, 가끔 어떤 것은 사고의 그물망에 걸려 한동안 누군가의 주위에 맴돌며 기억에 각인된다. 이렇듯 매일의 시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끄는 이미지들을 걸러내어 수집하는 일이 계속된다. 쌓인 정보들은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종류이다. 걷다가 본 풍경,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한 사진, 퇴근길 마주친 광고판 등 그 출처도 다양하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이 포함된다.
본인과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던 중립적 시각 정보는 회화라는 형식을 통해 비로소 작가와 모종의 관계를 맺을 기회를 맞는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주 순간적인 접속에 그치는 듯하다. 그는 오랫동안 그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갖기보다, 그 대상으로부터 파생되는 아주 처음의 인상을 빠르게 화면으로 옮겨낸다. 별도의 사전 작업 없이 날것의 감각을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한 장면 위에 오래 머무르기를 택하기보다 속도감을 유지하며 금세 다른 그림으로 초점을 이동시켜 가는 것은 발견한 대상과 사용자 간의 긴밀한 서사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이미지를 우연히(혹은 어쩌다가) 얻은 것에 불과하므로, 작업을 해가는 과정에서 다루는 사물의 형상을 특별히 사적인 것으로 소급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작위적이고 지나친 느낌을 자아낼 수 있다는 의구심 때문이리라. 따라서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형태의 껍데기에 기대어있는 감각의 그림자에 가깝다. 작가는 다루는 대상들이 때로 자신과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반대로 거리감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오늘날 경험하는 세계 그 자체를 대변한다고 설명한다. 즉 각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표면 위로 슬며시 드러나는 것은 한 사람이 작금의 시대를 물리적으로 겪으며 감지한 인상의 단편들이다. 때로 그것은 물질적인 소비를 넘어 개인, 집단, 사회 간에 일어나는 소모적 행태에 대한 인식이기도, 이로부터 기인하는 소외와 공허의 감정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에게 회화는 단순한 모사나 객관적 기록을 넘어 도시적 환경을 소화하고 감각하는 눈이 되어주고 있다.
한편 송승은은 이해의 간극, 거짓, 위선과 긴장 등 복잡다단한 감정의 교차들이 유발하는 모호한 순간을 회화로 그린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다층적인 인상들을 주관적 이미지로 확장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주변의 인물과 환경, 집단과 마주하는 상황에는 언제나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지대가 있다. 이는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도, 또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에서도 불쑥 등장하며 한 개인과 외부적 요소들 사이의 거리감을 일깨운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겪는 사소한 예외적 경험들로부터 발화한 문장과 감정들을 화면에 옮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상상력과 연출이 동원된다. 그는 주로 임의의 사건을 머릿속에 가정하고 그곳에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대상을 상상해서 그리거나, 영화나 소설, 동화에 등장할법한 사건의 한 순간을 끌어온다. 따라서 작품에는 인물의 동세나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이 도드라진다. 보는 이는 제시된 이미지로부터 서사를 파악하려 하거나 분리된 캔버스들 간의 인과관계를 읽어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소녀>, <저녁 식사> 등 작품의 제목도 드러난 대상 외에 추가적인 정보를 주지 않을뿐더러, 사건의 정황 역시 빠른 붓놀림으로 다소 흐려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껏해야 화면이 자아내는 색감, 분위기, 인물의 표정 등을 단서 삼아 주어진 그림들 간의 연결고리를 머릿속으로 재구성해볼 뿐이다.
사실 작가 역시 구태여 사건의 결말을 찾아가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객은 그 가상의 서사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의무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러난 이미지들 사이에 새겨진 감정적 상태에 관한 솔직한 고민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관찰하며 느끼는 괴리감, 소속된 집단에서 각자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공유되는 불안함, 새롭게 경험하는 사회로부터 오는 위선과 긴장감. 이 수많은 감정의 교차 속에서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때는 언제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 걸까? 관계의 얼개와 모호한 감정의 진폭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반복되는 질문들은 미묘한 긴장감을 주는 붓끝의 빠른 움직임들로 화면 위에 응축된다. 그는 A와 Z라는 양극단과 그 사이의 무수한 중간지대에 존재할 이름 없는 감정들의 발화점을 포착하며 세계를 조금씩 읽어나간다.
반면 정주원 작가는 스스로를 그린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처한 작가적 상태를 고심하고 그것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누구나 갖고 있을 근원적인 의문과 딜레마들이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나는 지금 왜 작가일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작가로서의 성공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무엇을 그려야 하고 왜 그려야 할까. 이제 막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결정한 젊은 작가에게는 더없이 막막하고 멀게 느껴지는 질문들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명쾌한 해답지를 서둘러 찾기보다 느리게 에둘러가는 방법을 택하고, 그 시간 속에서 솔직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집중한다. 최근에는 ‘유령’과 ‘별’이라는 대상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탐구하고 이를 본인의 작가적 위치에 대입하는 방식으로 내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관찰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령은 현실의 귀퉁이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대상이며, 누군가의 세상에는 아예 없는 허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유령같은’이라는 표현을 눈에 잘 띄지 않아 파악하기 힘든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별은 상대적으로 하늘이라는 공간에 위치함이 명확하며, 인간은 그것의 반짝임을 동경하고 이상화한다. 따라서 별(star)은 어떤 특별한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상징은 사실 언제 나타나고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또 밝음보다는 어둠과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정주원은 양가적이고 가변적인 두 대상의 개념을 작가라는 정체성의 의미로 치환하고, 자신을 별과 유령 사이 언저리 어딘가에 반복적으로 위치시키며 작업을 이어나간다. 별과 유령은 그의 상상력이 더해진 장면 속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지고 작은 탑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서로의 모습을 비추며 먹먹한 색이 겹쳐진 하늘과 땅을 점유하는 풍경이 된다. 별에 더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과 그와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은 유령 같은 동료들로부터 얻는 위로의 감정은 분리되지 않은 채 뒤엉켜 한 화면 위에서 공존한다. 아마도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한 자아의 실존을 매일같이 질문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보편의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는 창을 하나씩 열어가는 일이 아닐까?
요컨대 세 명의 젊은 작가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이는 세계와 분리된 개별적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기록이기보다, 여러 타자와 장소, 환경들과 연결된 사회적 존재로서 갖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곧 이는 개개인이 속한 여러 ‘우리’들의 목소리를 파편적으로 대변하기도 한다.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함에서 오는 삶의 불투명함, 여러 다른 집단과 마주하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겪는 관계의 모호함, 반복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단상들에 관한 기억. 이 모든 것이 뒤엉키고 겹쳐지며 저마다의 이야기가 된다. 그림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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