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알지-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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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p51, oil on canvas, 61×73c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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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원, 당신이 선택하면 된다, oil on canvas, 53×45.5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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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민선, 사이, 캔버스 위에 오일, 112×162cm, 2011


 

빼고 지우고 비운 채 말하는

양효실(미학자)

 

 

빈 캔버스에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판/(plane)을 만들고 그 면 위에서/안에서 살아갈 이미지나 형상을 올리고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나 삶, 특수한 역사(herstories)를 위한 장소/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은 관습적으로는 회화로 불릴 것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화가의 건축, 혹은 포이에시스(making)라 불릴 것이다. 미적 제작으로서의 회화는 특별히 화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이것의 시각적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보기(seeing)이고 하나의 보기이고 주관적인 보기이고다른보기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약속된 보기를 벗어나면서 시각적 보기를 주관화하고 특수화한다. 물론 그 보기는 화가에게는 일상적 보기이고자연스러운보기일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예외적 상태를 살아가는 화가의 임상적 증상으로서, 심적 동인과논리를 장착한 것으로서 일반인들, 관객들 앞을 점유한다. 그것은 몽상이거나 증상이고, 그렇기에 뚜렷한 원인으로 해소될 수 없는 채 변주/변이될 뿐이고, 선명한 개념이나 지식으로 진정되지 않을, 그러므로 착시나 착각 같은 것으로, 믿을 수 없는 보기로 분류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작가의 작업으로서, 연속성과 일관성을 통해 계속 제출되기에, 믿을 수 없는 보기이지만 즐길 수 있는 장면으로 도착한다. 지루하고 기계적이고 관성적인 보기를 잃고자 우리는 전시장에 들른다. 우리의 보기에서 너무 멀리 있는 이미지나 제작은 우리를 유혹하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까운 것은 반갑기는 하겠지만 금방 지루해질 것이다. 유혹으로서의 회화는 너무 가까이나 너무 멀리 있지 않으려 할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관객 개개인의 일상적 보기와 그런 보기에서 이탈하려는 지금 그 관객의 욕망/에너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집단적인 경험으로서의 문화나 예술이 거의 불가능해진 지금에 와서 회화를 경험하는 일반적인 법, 방법도 힘들어진 듯하다. ‘화가의 특수한 보기와 자신의 기존의 보기 사이에서 관객은 협상하는 자이다. 어떤 회화는 다가올 것이고 어떤 회화는 끝내 어리둥절한 채로 지나쳐야할 것이다. 특수한 조건과 법칙에 근거한 하나의 그림의 자율성/자족성을 이해하는/감상하는 일, 하나의 건축/제작으로서의 회화 앞에 서는 일은 내게는 논리적 세계를 잠시 이탈하는, 명료함과 이해가능성의 세계를 잃는 경험이다.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이 이럴 것이라고, 꿈속의 내가 이럴 것이라고, 그저 나의 통제를 벗어난 시간과 공간 속을 떠도는 것이 이런 보기의 전제일 것이라고 되 뇌이면서 나의 논리의 실패와 감각적 이미지의 자율성이나 부유(浮游)를 즐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외면하거나 즐기면 된다. 회화는 후자의 장소이다. 즐기기는 논리와 지성의 실패에 대한 것이고 그런 실패를 나의 무능이 아닌 회화의 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를 보호할 논리와 법이 없을 때, 나는 기이한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 화가가 건축한/제작한 그 공간을 살게 된다. 그러면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왜 이런 구조로 설치되었는지 모른 채로 보고 있는 것을 끝까지 보면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함께 있으려고 하면 된다. 겹겹이 칠해진 바닥과 올려진 이미지나 형상 사이를 잘 모르는 내가 살아낸다.

 

 

세 명의 여성 화가의 작업을 묶은 전시 제목이정확히-알지-못함이다. 제대로 올바르게 알지 못함이라는, 앎의 부분적 결핍이나 불완전함을 표식하는 문장이자 한 단어인정확히알지못함은 정확한 앎의 관점에서는 무능이나 결함을 그리고/그러나 가능성이나 새로운 방향을 전제한다. 앎은 설명과 이해, 분석, 공감을 통해 자아의 확장과 축적, 이곳에 의한 그곳의 지배와 통제로 진행된다. 그런 직진과 일방향은 정확히 알지 못할 때 좌절되거나 불안()해진다. 직진이지만 직진이 아니고 일방향이지만 이미 그쪽에서 이쪽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있게 되기에 상호적이게 된다. 기획자는 자신이 선정한 제목을 두고작가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관찰의 대상이 불특정한 장소나 사물로 은유되는 방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특정한 장소나 시간, 사물에서 비껴나 있는 채로 작가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구조화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화가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그런 부분적인-()의 상태를 지향하는 화면 앞에서 우리는 모른 채로 보기, 보면서 못 보기, 빼면서 더하기, 잃어가면서 얻기와 같은 역설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애매성, 모호성은 정확한 앎에서 이탈하는 것의 가치에 다름 아니기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그러나 대단히 신중한 무대/구조/제작에 의해 나타난 것을보면서덜고 쉬고 부유하고 흐릿해질 수 있다. 중력, 무거움, 확실성, 좌표의 일시적 박탈 같은 것.

 

 

김민조는존재의 확고한 목적이나 특별한 이야기, 깊은 개인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인물들, 그러므로 보이는 것, 바깥이 전부인 캐릭터들, 프레임에 소속될 수 없는 부유물들을 그린다. 공기나 유령이나 먼지와 등가인 사람들, 인간으로 보이지만 칠해진 것이라는 사실과 분리불가능한 이미지들이다. “낙오되고 소외된이란 평가적 단서를 달고 있는 인간은 그러나 모두 한결 같이 뭔가를 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나무에 매달리거나 나무 위에 있거나 철제 사다리에 앉아 있거나 고가다리에서 도시를 굽어보며 손가락으로 저곳을 가리키는 남자 혹은 사람들. 막 찍힌 장면들이고 과감하게 잘려져 있고 손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다. 어떤 순간들이 찍히고 그려졌다. 연속성이나 맥락, 시간적 전후관계에서 잘려 나온 듯,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 행위 역시 상황에서 잘려난 채로 부분, 단면, 불연속적 쇼트로 존재한다. 이것이 김민조의 보기, 카메라가 포착한 순간에 대한 회화적 번역, 그럼으로써 카메라로는 불가능한 어떤 시간성을 물질화하려는 시도, 그러나 그렇다고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장면은 아닌 순간의 결정화. 실존적 지위를 얻지 못한 채 단면으로/잘린장면들에서 우리는부유하는 삶이란 실존적 언명의 회화적 번역을 보기도 한다.

 

 

이해민선은 서울과 용인을 좌석버스를 타고 오가며 차창 밖 풍경으로 본 것에서 자신의 풍경의 소재를 갖고 왔다. 작가는 그것을 사실적·재현적으로 전달하는 대신에 자신이 본 것에서 어떤공리(公理)’를 끌어내고 그 공리를 시각적 언어로 구체화하는 공정을 거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2011년의 회화는 모두 건설현장같고 버려진장소같고 바다같고 악몽같고 일렁이는들판같은 바탕 면을 조성하고 그 위에서 둘의관계’, 그러나 불가능한 관계, 어쨌든 관계, 불길하게 들러붙는 관계를 제안한다. 부단히 부서지고 세워지고 메워지고 지워지는 개발에 침식당한 서울 외곽의 풍경을보는동시대 작가들의 방법은 당연히 많다. 이해민선에게 재현적사실은 시간성을 함축한 찢어지고 파묻힌 검정비닐이나 풍경의 일부로 살아가는 수도관 같은 부분 이미지에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이 이해민선의 ()재현적 회화를 현실과 연접하게 만든다. 그러나 목재소에서 막 갖고 온 것 같은 각목이나 나무 토막은 풍경과 연접하는 바깥으로서, 하나의 관념으로서, 불가능한 대상으로서 그녀가 본 것에 개입/침입한다. 죽었건 살았던 나무였어야 할 그것이 가공된, 인위적인, 초현실적인오브제로서 화면에 놓여 있다. 이런 접합, ‘꼴라주’, 병치로 인해 화면은내부로 수렴되지 못하고 바깥으로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일상적 경험이나 지각이 마침내/기어이 찾아내고야마는 관계의 기적이나 소박함이나 따듯함이 아니라개체가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호작용하는데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개체와 개체가 서로에게로 혼융되는 예의 유기적 생명체의 관계-맺기가 아니라 자기성을 잃지 않은 채 공존하는 작가의 심적환상이 상연된다.

 

 

노정원의 풍경은 그나마 내가 어느 정도는 접근할 수 있는정확히-알지-못함에 대한 것이다. 저런 장소에 나도 가봤다. 꿈 속에서건 (일부러)길을 잃었던 어느 도시에서건 심지어 지금 여기 서울에서도 마음을 둘 곳 없어서 걷기만 하다보면 꽉 찬 건물들, 사람들 사이에 숨은 듯 접힌 듯 저런 곳이 나온다. 현실의 일부이면서 현실의 음화같고 현재이면서 이미 과거같은 그런 뒤떨어지고 잊혀진 곳이 집요하게 공존, 공생한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수원에서 저런 실재하는 장소, 공간들을 줄곧 마주치고 있다고 한다. 개발과 번쩍임, 소란스러움, 생기 바로 뒤켠에 바로 옆에 저런 고요, 정지, 불길함, , 미미한 숭고가 엄존한다. 단지 우거진 자연도 단지 빽빽한 건물도 아니어서, 한 두 그루의 나무와 건물이, 덩어리 숲과 덩어리 건물이 대치, 공존, 융합한 이 풍경에서라면 인간은 아주 미미하고 보일 듯 말듯하게 자리할 것이다. 맨 하단에 작게 자리한 자동차가 인적, 체온을 현시하는 그런 곳. 부드럽게 뭉개진 저채도의 색채/물감 덕분에 고립과 고독에 대한 것이어도 충분한 이 풍경은 마음이나 감정을 놓을 수 있는 좋은 무대로 작동한다. 비었거나 고요하거나 적막한 곳에서는 비로소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감정이나 마음이 주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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