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구금되어 있던 옛 성을 평화박물관으로 꾸미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랬단다하고 옛 이야기처럼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한국에서는 1,000 여 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전국 각지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단지 총을 들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은 1만 명이 넘습니다만, 우리는 그 사실을 외면해 왔습니다. 우리가 양심과 평화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은 채 5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는 6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행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독립운동사에 서술되지만, 대한민국에서 행한 똑같은 행동은 반국가적인 범죄로 처벌받아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북대치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정작 한국전쟁 중에 남과 북 어느 쪽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지금처럼 가혹하게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모은 자료들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난 받은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는데, 민주화되었다는 우리 사회에서 아들마저 또다시 감옥에 가야하는 가슴 아픈 역사를 모아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하지만, 3대가 감옥에 가는데 아직도 시기상조일까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위기에 빠졌을 때 총을 들고 나라를 구하는 것 역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나라가 총을 들 수 없는 사람들을 꼭 감옥에 보내고 기어이 처벌하는 그런 나라여야 할까요?

이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많은 분들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수고하신 분들은 이 생생한 자료를 몸으로 만들어 낸 병역거부자들입니다. 그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_ 이해동

<양심적 병역거부>

최초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 일제 징병제
일제는 1938년 2월 22일 ‘육군특별지원병령’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원병 제도를 통하여 병력자원의 부족을 메우는 한편 조선 청년들을 ‘황군’에 복무케 함으로 황국의식을 주입하려 하였다. 1939년 6월에는 병역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여호와의 증인 38명을 체포하였다.

한 가족에게 지워진 28년, 고난의 세월 - 옥지준 가족사건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사상휘보>에는 등대사(여호와의 증인)사건이 실려 있는데, 경성지역에서 총 31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검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수감된 사람들 중에는 옥지준 일가가 있다. 옥지준 부부는 큰형 부부와 옥사하게 된 동생까지 모두 옥고를 치른 것에 더해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사위와 손자를 감옥에 보내게 된다. 당시의 병역거부 사건은 현재 독립운동의 한 부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포대죄’라고 들어 보셨나요? - 장순옥 사건
임신 3개월의 몸으로 수감되었던 장순옥은 갖은 악형과 열악한 수감 환경으로 인해 유산을 하였다. 여성 수감자들에게는 흔히 수갑형벌이 행해졌다. 그 중 ‘대포대죄’는 양손을 위아래로 넘겨 등 뒤로 묶는 고문이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총을 들지 않았다 - 한국전쟁 시기의 병역거부
심지어 한국전쟁 중에도 병역거부자들은 있었다. 노병일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위협까지 받았으나 끝까지 군복무를 거부하였다. 한편 국군에 의해 징집된 박종일은 병역을 거부하여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온 나라를 군대처럼 - 병영국가화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인권도 민주주의의 요구도 묵살하였다. ‘국가’라는 이름아래 절대복종을, ‘안보’라는 이름아래 군사화를 강요하던 이 시대에 군대와 전쟁을 부정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73년부터는 병역기피자들을 완전 근절시키기 위해 ‘병무행정 쇄신지침’을 내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더욱 극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항명’으로 죄명만 바뀌었을 뿐 - 항명으로 병역거부 시작
강제입영이 시작되면서 여호와의 증인들도 군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집총을 거부하는 것만이 그들의 병역거부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시기 각 지역 병무청은 입영을 독려하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 대표들과 연쇄 간담회를 열기도 하였다.

출소하던 날, 어머니 손도 못 잡아보고 다시 교도소로 - 반복처벌
병역거부 수형자 중 최장기수인 정춘국은 1969년에 10월을, 그리고 1974년에 3년을 복역하였다. 형을 마치고 출소 하던 날, 정춘국은 마중 나온 어머니의 손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다시 징집되었으며 4년 형을 선고받아 도합 7년 10개월을 복역하였다.

죽어도 총을 안 잡은 젊은이들 - 병역거부자 사망사건
김종식은 논산훈련소에서 집총을 거부하였고 헌병의 무자비한 구타로 사망하였다. 이춘길은 사단 영창에서 헌병에게 각목구타를 당해 비장파열로 사망하였다. 이춘길의 유족이 군으로부터 받은 위로금이라고는 부대장이 보내온 일만 원의 조의금이 전부였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결성 - 병역거부 사회이슈로 등장
2002년 2월,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36개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갖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후 연대회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의 의의를 알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병역거부자들의 등장 - 반전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
2001년 말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의 병역거부 선언 이후 다른 불교 신자를 비롯해 반전평화주의, 생태주의 등 다양한 신념에 기초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2005년 5월 현재 16명에 이르고 있다. 이로써 지난 50여 년간 특정 종교인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치부되어 왔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그 간의 사회적 선입견을 벗고 적극적인 인권과 평화적 가치 실현으로서 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708호 이등병의 편지 - 이등병 강철민, 파병반대 병역거부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였다. 강철민은 “파병을 막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며,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병반대 병역거부를 선언하였다. 강철민의 병역거부는 병역거부행위가 전쟁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임을 보여준 동시에, 전쟁과 군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사회에 던져주었다.

양심과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위하여 - 세계적인 현황
싱가폴 20명, 아르메니아 12명, 아제르바이잔 1명, 앙골라 19명, 에리트리아 17명, 터키 6명, 투르크메니스탄 4명, 그리고 한국 1077명!

평화의 세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21세기에도 전쟁과 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 1156명의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차가운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_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자료전

일시_ 2005.0526 _ 2005604
장소_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_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큐레이터_ 이광준 (독립기획자)
아트 디렉터_ 이부록 (작가)
주최_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후원_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오프닝 퍼포먼스_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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