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현 개인전 “Drag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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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발전소 공모 선정작가 02

- 정상현 개인전  ”Drag in”

- 전시 기간 : 2003. 11. 7(금) ~ 2003. 11. 21(금)

- 전시 오픈 : 2003. 11. 7(금) 오후 6시

이 전시는 상상력발전소 선정작가인 정상현의 개인전이다. 정상현의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나타나는 것은 문과 창문과 문턱이고 이는 이곳과 저곳을 구별하고 인식하는 하나의 은유이자 기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은유적 장치들에 의해 감각과 정서의 주체는 그러한 통로를 통해 나가거나 들어오는 운동이 가능해진다. 현대 이미지 문화에서 폭증하고 일반화 현상으로서 시각의 확장은 정상현의 작업에서는 한편의 작은 네러티브 구조를 만드는 듯 하며 미니어처 세계를 통해 다시 시선으로 들어오는 현실세계의 현실감을 끌어들인다. 정상현은 영상이 맺혀지는 스크린과 설치구조물의 통해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은 채끊임없이 뒤로 물러서거나 안으로 끌려가는 심미적 효과를 조성한다.

-정상현, drag in-
  ‘어린아이에게 고독의 장소, 틀어박힐 구석을 허락한다면 그에게 심오한 삶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라고, 바슐라르는 말했었다. 우주와 내면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완전히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아야 한다. 벽과 천장이 적절히 부딪치며 어긋나 있어, 바깥 세계로 나가지 않아도 그것을 느낄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마도 바슐라르는 몽상의 공간은 ‘집과 전원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던 것이리라.
  정상현의 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웅크리고 들어가 또 하나의 삶을 열 수 있는 집으로 빚어졌다. 그 공간은 기억이 응집된, 물질의 내밀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물질들로부터 피어나와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이것이 이미지 조각가로서 정상현이 보이는 - 혹은 ‘세우는’ 공간의 구조이다(이런 점에서 그가 애니메이션의 작업 경험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이란 곧, 점토에 생명을 불어넣어 이미지로 표현하는 현대식 조물주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꿈꾸는 존재’의 임무를 성실히 그리고 무척이나 경쾌한 리듬과 색채 안에서 수행한다.
  꿈꾸는 존재란, ‘세계를 연구할 것이고, 방안에도 온갖 이국 정취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물질의 전투들 속에서 영웅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며…’ 그래, 실제로 우리들은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나’의 방을 퍽이나 오랫동안, 아마도 항상, 원해왔었다. 또한 바로 그게 우리의 일상적 삶 그 자체이지 않은가 - 바깥을 향한 통로로서, 그리고(그러나!) 그 통로를 ‘(불)안전하게’ 가로막아 주는 벽으로서, 내가 살고, 살지 않기를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한 집착을 안고 살아가는 방. 나의 삶의 외면과 내벽은 미끄럽게 흘러가며 군데군데 오래된 기억의 웅덩이를 심어놓기도 하고, 지나가는 삶의 켜들을 겹겹이 쌓아놓기도 하며, 미래의 삶의 그림자를 아득하게 펼쳐 놓기도 한다. 이런 물과 빛, 어둠과 부피가 어우러진 곳에 정상현의 장난어린, 호기심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집 안에 들어서면 (혹은 집 밖에 서있으면), ‘나’의 방엔 어떠한 상상이 묻혀 있으며, 기억이 꽃피어지고 있는가-라고 우리는 중얼거리게 된다.
  정상현의 호기심의 미학은 몇 가지 짓궂은 공간의 수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축소의 기술이다. 소인국의 활력은,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어린이의 당돌함과 같다. 세상을 성실하게 관찰하고, 그 인상을 자기의 공간으로 이끌고 들어오려는, 엄청난 모험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하나의 기술은 공간의 왜곡이다. 그가 ‘모형’이라고 부르는 작은 집의 구조물들은 원근법적인 공간 구조를 갖추고 있다. 먼 곳은 좁고 깊게 파들어 가 있고 가까운 곳일수록 넓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원근법의 시각구조에 따라 구성된 삼차원의 공간을 다시 이미지로 옮겨서 우리 눈에 자연스러운 평면 이미지로 만들어 놓았다. 다시 말하면 정상현의 공간의 이미지들은 삼차원을 이차원으로 옮겼을 때 발생하는 압착-평면화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맘껏 자유롭다. 앞으로 뒤로, 정지와 운동의 변화를, 형태의 어긋남의 걱정 없이 순조롭게 이행할 수 있다. 또 다른 수사는 뒤집어 비춰보기 수법이다.
  우리가 ‘내면을 통해서 보는’ 창문 밖의 이미지나 문 너머의 이미지는 세상의 정경을 표현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정경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안’과 ‘밖’, 혹은 ‘멈춤’과 ‘옮겨 감’과 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간적 대립구도가 어긋나며 무너지려 한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그 긴장 순간에 있다. 그래서 절박한 불안이나 혼돈보다는, 채 다가오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은밀한 기대와 아직 벗어나오지 않은 공간에 대한 애정이 섬세한 빛과 공기의 중첩 이미지로 표출되는 것이다. 현실의 크기와 명암과 굴곡은 작가의 시야를 통해 유쾌하게 변질된다. 그리고 바로-이 자리, ‘나’의 공간은, 삶의 본질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불안 섞인 애정 속에서 아름답게 빚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상현의 ‘나’의 공간에 대한 작업들이 한 작가의 고백적인 시선을 넘어서서 공감과 대화의 미덕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이것은 정상현의 집들이,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주시하는 작가의 은밀한 시선에 따라 구성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활기에 넘쳐있기 때문이다. 손때가 묻어 온화하게 바랜 꽃무늬 벽지, 보드라운 분홍색 융털 카페트, 미끄럼틀과 장난감들, 대중식당의 테이블과 식기들은, 누구의 삶에서든 가장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한 기억, 아니 심지어 그 기억의 흐름의 저변에 깔려있는 삶의 단단한 조각들이다. 작가는 그러한 편린들을 발굴하고 떠올려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그 공간을 엿보는 순간, 우리는 그 작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작업실에 서있는 인물이 (작가의 자화상일 수 있지만), 그 공간에 멈춰 선 ‘나’의 모습이며, 옥탑방의 놀이터의 모형이 곧 ‘나’의 삶의 정경이라고 우리는 느낀다. 그리고, 내가 나를 마주보는 순간, 세계를 사는 나와 나의 안에 사는 세계가 만나는 지점, 그 커다란 사건을 포근하게 열어젖힐 수 있는 용기를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김예란)

Comments (1) to “정상현 개인전 “Drag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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