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화 개인전 - 예술가의 작업실

현대인들은 이미지의 홍수에 위협받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미지를 보고, 만들고, 일상적으로 이를 사용하고, 해독하고, 해석한다. 이미지 생산자인 작가들 역시 생산된 다양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으며 이를 사용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생산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변별성을 모색하지만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다. 우리 생활에서 일상이 되어 버린 다양한 영상 매체가 쏟아내는 동영상 이미지와 사이버 공간의 다양한 이미지에 함몰된 현재의 미술문화 환경에서 작가들이 겪는 환희와 절망은 깊이와 폭에 있어 전대의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정황은 예술의 정의와 패러다임을 변환시키기도 하고 예술가들에게 심각한 혼돈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양연화는 미술사 전체를 집요하게 천착해 온 그리는일, 재현, 시각 그리고 이미지의 생산과 소통방식 등과 같은 기본적 명제에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노력한다. ‘그린다’ 거나 ‘재현’의 문제는 현대미술사에서 이미 오래 전에 폐기처분된 진부한 전통처럼 보인다. 사진의 발명과 추상미술의 전개과정이 이 폐기 가능성을 가속시킨 바 있지만, 양연화는 이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으며 사진의 문제와도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양연화의 작업이 가지는 독특함은 바로 이 폐기될 수 없는 전통에 대한 일관된 탐구와 폭넓은 재해석에 있다.
그의 제작태도에는 몇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우선 그는 이미지를 하나의 기호로 사용하여 새로운 매체나 화면이 구성방식을 통해 재문맥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지에 대한 정의가 그리 간단치는 않지만, 예술영역에서 이미지의 개념은 근본적 표상과 연결되며 생존, 신성, 죽음, 지식, 진리와 같은 영역과 연계된 개념이다. 이미지는 꿈, 이미지를 통한 언어, 정신적 표상과 같은 심리적 활동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의 이미지는 주제들의 단편으로 하나의 기호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단편의 의미들은 새로운 모델이나 배경과 만남으로써 종래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의미의 껍질을 유지한 채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코드들의 무한한 역동성으로 코드들의 유희는 다양한 의미를 가능케 하는 두꺼운 언어를 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컨텍스트적 속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미술작품이 컨텍스트성을 가진다는 것은 물체가 조립되어 그러한 켄텍스트적 물체로서 미술작품이라는 결정적 요소를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문제시되는 작품과 병치되는 경우를 말한다.

기호화된 이미지의 재현과 합성
롤랑바르트는 그의 저서 《모드의 체계(Systeme de la Mode)》(1967)를 통해 복식체계에 내재된 사회?문화적 의미체계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바 있는데, 양연화가 특별히 의상에 주목하는 까닭도 그 속에 모드가 나름대로 기호화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호는 그것의 대상과 기호화된 대상의 개념 사이에 대체과정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데 이때 대체는 언어의 경우와 사물에서 기호로 작용한다. 즉 기호화한 대상의 개념은 기호로 대체된다. 그가 표현하는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현대성의 시각에 입각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으며, 종래의 주체적 시각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의미를 가진다. 문맥을 전환하는 동시에 주체적 시각의 담론에 비판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나 그 지인들로 구성된 사진의 모델들은 권력적 시각 대신 관람자들과 동일한 차원의 다양한 시각을 제기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보는 행위, 그에 대한 인식, 표현과정과 결과 사이의 미끄러짐과 빗겨 감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서로 다른 층위들은 기호적 요소로 분절되어 복잡한 수사과정을 거치며 의미의 변주를 생산한다. 이를 통해 서구의 인식으로 가득찬 조형과 예술전반을 구성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찾고자 한다. 회화는 관객의 눈으로 읽힌다. 회화의 공간은 관객의 시선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장이다. 그러나 문자텍스트에 비해서 그 눈의 행로들이 얼마나 더 자유로우며 구성의 제한, 가치와 색의 분배가 어떻든지 간에 회화는 엄격하게 정해진 방식으로 자신들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전통적 회화어법으로 해체된 회화
그는 작품을 상호텍스트성의 문맥으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관람자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열어 주려는 좀더 비권력적인 시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생산과 소통이 다양한 방법론적 시도룰 통해 열린 소통을 실천코자 하는 것이다. 양연화가 지속해 온 작업과정은 전통적 회화어법을 통한 회화의 전통의 해체라는 변별적 논법이며 향후 우리 미술이 해결해야 할 많은 기본 과제에 대한 의미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서구 현대성의 합리화와 주체화의 원리는 시각의 장에서도 관철되어 왔다. 또한 시각의 장에서 현대성은 현재적 과제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이후 본격적으로 구동되어 온 현대성의 논리가 아직도 시각의 장을 포함하여 우리의 실존적 조건 전반에서 전체적 주형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대성의 원리가 내포한 부정적 측면과 역사적으로 실현되어 온 현대화 과정의 맹목성 및 여러 부정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대성의 지평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오늘날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이미지와 매체 폭증의 문화현실은 오히려 개인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예술적 판단을 혼돈 시키는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서 작동하기도 하며, 우리로 하여금 방향감각을 성실하게끔 내모는 어떤 거대한 변동의 일각을 형성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와 상업주의 적 대중문화 논리가 만연하여 진정한 그리기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양연화가 보여 온 시각의 현대성이 가진 문제들로부터 출발한 반성적 태도는 매우 중요하며 의미심장하다. 시류에 편승하여 무조건적인 형식주의 미학의 거부나 무비판적인 포스트모던 양식의 차용, 그리고 자의식 없이 영상매체에 몰입하는 태도가 만연한 동년배의 작업들을 감안할 때, 그의 작업은 그리기와 시각, 이미지의 창조와 소통의 문제를 통해 미술의 기본명제를 대상으로 씨름하는 진지한 인식론적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속임은 속이는 대상이 속을 때 이루어진다. 반대로, 의도하여 속임의 과정을 숨김없이 드러낼 때, 그래서 누구라도 손쉽게 속임을 알아차릴 때, 속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의 속임은 속임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속임의 형식을 빌려서, 속임의 내용을 비판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술가의 작업실>이 바로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예술가의 작업실>은 여느 전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여느 미술관에 여느 예술작품을 걸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 같은 형식만 빌었지, 사실 예술・예술가・예술작품에 관련된 통념 자체가 <예술가의 작업실>의 작업이다. 그녀가 전시인쇄물에 가짜경력을 넣은 것도, 하지도 않은 전시를 했다고 적은 것도, 그래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장황하게 늘어선 작가의 약력이란 것이, 반짝이며 길게 늘어선 상품기능 목록과 다른 게 무엇인가, 그렇게 묻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허위경력을 둘러싼 진위확인 작업은, 예상된 과정이자 해프닝이다. 혹시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녀의 작업에 속을지라도, 즐겁게 웃어보자. -아트스페이스휴 상상력발전소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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