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훈 개인전 - Traumatic ev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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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기억장치

상처는 잘 낫지 않는다. 환경오염이 심한 시대에는 여러모로 더욱 그렇다. 몸의 상처가 그러할 진데 하물며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는 오죽할까. 몇 년 몇 십년을 상처를 끌어안고 가는 것이 평균적인 인간의 일생이 아닐까. 상처가 오래되면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사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된다. 상처는 정상처럼 행세한다. 아니 그럼 상처가 곧 비정상적인란 말인가? 상처가 비정상으로 여겨질 때 우리는 치유를 생각하면서 혹시 다른 곳도 아픈지 살펴보기도 한다. 상처는 그 상처를 지닌 자 보다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심리적 위세를 떨치는데, 사내들에게 상처나 상처의 흔적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강화시키는 것으로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흔히 참전 용사들이 자신의 상처를 영광의 훈장으로 여겨 자랑하듯. 치명적 상처는 오래간다. 또 상처가 평생의 흉터가 되거나 죽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상처의 원인은 사람 숫자만큼, 자연계의 사물과 사건 숫자만큼 무한하다. 건강한 인생은 타자로부터 혹은 천재지변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째든 상처받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상처가 오래되면 우리는 그 상처의 원인을 망각하곤 하는데, 이러한 망각의 능력 덕분에 우리는 균형 잡힌 생활을 유지하기도 하고 상처를 더 깊이 만들어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우울은 상처의 중력이 오래 쌓일 때 생기는데 원인불명의 비정상적 몸과 정신 상태에서 흔히 발생한다. 자각한다. 우울이 문제라면 흔히 직접적인 상처의 치유가 아니라 상처의 발견 또는 상처와의 조우에 그 해답을 찾는 것 같다. 우울은 오랜 기간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은 증세이다. 우울은 창조를 위한 시간을 예비하고 심지어 창조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리적 혹은 병리적 실재이자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우울은 영혼의 상처가 어떻게 인간이 현실세계에서 부딪치는 문제들과 사건들을 정서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인간은 영원한 삶과 완전한 존재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우울은 인간 존재의 필연적 조건의 효과로 여겨진다. 상처는 그런 면에서 우울보다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우울은 불투명하고 애매하고 완곡하다. 그런 불투명한 경계로 인해 무한한 이미지들과 상상의 세계가 거주하는 영역을 만들기도 한다. 우울은 끝없이 침잠하는 부동성과 침묵과 인접하면서 예술가들의 현실을 주조한다. 예술가들에게 상상은 다만 상상이 아니고 뚜렷한 실체를 지닌 현실로 다가온다. 그것은 현실이다. 그것은 엄연한 구체적 사건이다. 사물과 세계와 실재로 인도하는 현실적 통로이다.

지동훈의 불투명한 희뿌연 달팽이는 이런 우울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수한 치설을 지닌 이 달팽이는 마치 우울이 우리의 영혼과 시간을 갉아대는 엄청난 힘을 내비치기는 듯 하며 그 끈끈한 액체로 몸을 둘러싸고 천천히 유유히 움직이며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거대한 달팽이는 불안한 어떤 전조를 보여주기도 하는 데, 곧 벌어질 것 같은 심상치 않은 현실의 왜곡과 비틀림을 상징한다. 지동훈의 여러 오브제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주위 사람들을 흔들어 놓고 지나간다. 정상적 미감美感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두뇌와 마음 속에 일종의 기계장치를 심어놓고 망각하는지 모른다. 상처와 우울이라는 이 기묘한 기억장치를.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07.05 ~ 2005.07.17
- Opening : pm 06:00 ~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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