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 개인전 : 파압아익혼(坡狎芽益混) : 행복의 나라

1. 1970년대, 한국에서 행복의 나라로 가려면 장막을 걷어야 했다. 그때의 장막이란 광장의 입구를 가로막은 억압의 장막이었다. 광장이 열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함께 모이지 못한 채, 혼자서 숨죽여 목 놓아 울었으리라. 한대수의 노래가 애끓는 듯한 이유가, 김민기의 가사가 애절한 듯한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1980년대,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조금씩 광장은 열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열리진 않지만, 적어도 옛날처럼 혼자서 애끓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당히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하며 합창을 했다. 적어도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서로 행복했으며,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함께 행복해 할만한 시대가 이제 곧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1990년대, 상황은 야릇했다. 행복은 행복이되, 그 행복은 아니었다. 그 동안 열심히 싸웠던 때문인지 일했던 때문인지, 오늘날 알다가도 모르게 됐지만, 어쨌건 간에 사람들은 집을 사고 차를 샀다. 거리는 자동차로 뒤덮였고 사람들은 유원지에 모여들었다. 거리를 울리던 목소리는 자동차의 소음으로, 광장을 채우던 토론은 텔레비전의 광고음악으로 갈음됐다. 시대와 사회에 불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옛날만큼은 아닌 것 같았고, 어쨌든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한국은 본격적으로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했다. 당연히 대중문화는 자본이 노 젓는 사위에 몸을 실고서 대중이 부르는 소리에 대작하며 꽃을 피웠다. 지금까지 문화에서 주체였던 적이 없었던 대중은 드디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2000년대, 각종 소문과 예언과 미망이 난무하며 호들갑스럽게 세기가 전환됐다.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가 개막됐다. 풍요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가, 한바탕 좌절을 겪은 후라서 그런지, 문화에 몰입하는 정도는 더해지면 더해졌지 결코 덜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매체가 쏟아내는 기호와 정보는 나날이 세기를 더해가며 일상을 두루두루 침투했으니, 영상을 숨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온갖 매체에 득실대는 영상과 인물을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늘 행복해 보일까, 생각했다. 우스개 소리지만, 어쩐지 그들이 우리네 행복을 빼앗아 간 것만 같아서, 은근히 얄미웠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그네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같이 어울려 웃자고 놀자고 끌어당긴다. 그런데 어쩐지 그들이 활짝 짓는 미소는 언제나 비슷해 보인다. 그네들이 속삭이는 밀어도, 그네들이 놀리는 몸짓도 신기할 정도로 서로를 닮았다. 하지만 ‘동일성의 복수’는 이제부터다. 왜냐하면, 행복하려면 저렇게 자세를 잡고서 저렇고 표정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체가 매개한 경험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수없이 반복되는 행복한 모습과 똑같은 자세의 영상은, 그 때문이다.

2. 손동현의 작업을 곰곰이 보고서 그렇게 익숙해진 ‘행복’이 떠올랐다. 약간 이상한 일이다. 손동현의 고백대로, 다르게 볼만한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형식에 서양의 질료가 결합한 모양도 흥미롭고, 요즘 유행하는 ‘한국팝’의 경향도 재미있다. 드디어 한국화가 환골탈태하는구나, 게다가 한국화에 바탕한 한국팝이라니 등등,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지평이 존재한다. (솔직히 변신한 한국화도 요즘의 한국팝도 알맞은 문제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화’를 기법과 재료로 한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더욱이 오늘날 그 개념이 유효한지조차 의심스러운 실정이고, ‘한국팝’ 역시 시대와 공감하는 일정한 ‘양식’으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젊은 세대의 감수성의 문제로 보는 게 알맞다.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태여 ‘지배종’determinant으로 부른 까닭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무채색 바탕에 여러 인물의 갖가지 표정을 보다보니, 어느덧 저들의 초상이 감성의 범례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행복의 성화icon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날 회화의 창문에 열린 세계는 매개된 경험이 지배하는 곳이며,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매해야 살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행복이 아니라 ‘너’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니, 언제나 정신은 행복하되 모르는 채 굶주린 상태다. 진부한 것에 행복할수록, 지루한 행복이 반복되는 것이다.

3. “너무 행복해서 몸이 다 마비될 지경이에요.”(피츠제럴드) 그래, 일찍이 감각은 사유하지 않는다 했거늘, 어쩌면 행복이란 정신의 몫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ꡔ행복한 책읽기ꡕ라는 김현의 소박한 제목과 희망과 반대로, 행복해 지려면 책을 읽지도 생각을 하지도 말아야 하겠다. 그렇다고 과연 감각이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재즈의 시대’가 영원토록 지속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은.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 1.4 ~ 2006.1.18

- Opening 2006.1.7 (토) pm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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