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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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202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아트스페이스 휴는 131일 윤상윤 개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상현 개인전 : 조선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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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개인전

조선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Korea where are you?

 

2019.11.27-12.31

mon-fri 10:00-18:00

opening reception 2019.11.29 pm5:00

 

1948년 북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헌법조문에 조선과 인민이란 단어를 못 쓰게 되었다> 며 매우 낙담했다고 한다. 조선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몸통은 하나이고 머리가 두개 달려 한 머리는 낮에 일어나고 다른 한 머리는 밤에 일어나 언제나 서로를 시기하고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공명조의 모습을 닮았다. 공명조는 결국 한 머리가 다른 머리에 독약을 먹여 같이 죽는다. 남과 북, 두체제의 대립, 오늘 한국사회 내부의 좌우 두진영의 대립과 갈등은 결국 한 몸통에 두 머리를 가진 공명조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저 깊은 곳에 자리한 그 무엇이 두 머리를 가진 비극의 피조물을 탄생 시킨 것일까? 조선! 그대는 무엇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1 공명조-두 개의 머리

공명조는 불경 속 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다.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나 한 몸통을 가졌으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공명조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밤낮으로 으르렁 거리며 끝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서 하루하루 상대가 파멸할 날을 노리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머리가 다른 머리의 먹이에 독을 탔다. 죽어가는 다른 머리 역시 복수의 독을 뿌렸다. 1950625, 6.25가 그날이었고, 2019년 오늘은 더 진화한 좌우 두 머리가 서로 독을 먹이려고 노리고 있다.

   

#2 6.25 일기- 남과 북 그리고, 도강파 비도강파

해방공간, 서울대학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이 쓴 1950625일의 일기를 보면, 불과 얼마 전에 북한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이름으로 <남반부 전체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와 전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조국통일 추진 호소문>을 보낸다. 북한은 1950815일 남북총선거로 구성되는 최고입법기구를 서울에서 여는 것을 제의 하면서, 우선 615일에서 18일 까지 개성에서 예비회의를 열자고 제안하는 문서를 지닌 밀사를 파견한다. 이 문서를 지니고 38선을 넘던 밀사는 체포되고, 밀사는 전향하여 대북방송에 출연하며 반공선전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승만등 남한의 실제적인 정치인들은 배제하는 조건을 달았으니, 이 호소문은 애시 당초 비현실적이었고, 북한특사가 단시간에 전향을 한 것은 필히 고문에 위한 강제 전향 일 것이라고 김성칠은 적고 있다. 당시 구금 상태인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 이주하를 38선에서 맞교환 하자는 북한의 주장과 또 그를 받아치는 남한의 역 주장이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시 웬만한 식자들에게는 빤히 보이는 거짓연극으로 보였을 것이다.    

19506.25 당일 쌀값은 소두 한말에 3천원을 넘었고, 민생고는 극에 달해 사회는 피폐한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6.25가 터지자 이승만과 주요 인사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서울에는 한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 남게 되었다. 김성칠도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아 북한점령 삼 개월을 보내야 했다. 9.28 수복이후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이른바 비도강파라고 불렀다. 남한 사회는 도강파와 비도강파로 나뉘었다. 비도강파가 부역자 심사를 벌였다. 이때 한강을 건너지 못했던 노천명도 감옥에 갔다. 김성칠은 1951, 고향 영천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그는 1946조선역사등을 저술했고, 펄벅의 대지”, 강용흘의 초당을 번역했다.

    

#3 현충일- 두 개의 진영, 웃는 사람 우는 사람

지난 초여름 현충일이 며칠 지난 오후, 활터, 화살을 주우러 무겁터(과녁이 세워진 장소) 갔다가 오는 길에서 노궁사 말씀, “국립묘지 갔다 왔어 요즘은 현충원이라 하데참 많이 죽었어!”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노궁사 말씀을 이었다. “김원봉이가 국군의 창시자라니! 완전히 항복 선언인데북한의 건국공신이 남한의 애국자가 되는 세상이 되었네!” 현충일 행사에서 대통령의 김원봉에 대한 연설을 듣고 국립묘지에 갔다 왔다고 한다. 노궁사 말씀 이어진다.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네! 비가 오면 우산장수가 웃고 해가 나면 나막신장수가 웃는다! 오늘은 해가 나니 우산장수가 우네! “나라를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놓아!”.

 

 






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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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개인전

풀 풀 풀-

2019.10.16-11.19

opening reception 10.16 17:00

 

코의 지혜 또는 존재의 신비한 궤적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그림이란 시각으로만 이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삶의 모든 양상들과 관련된다.

 

1

향기는 문법이 없다. 분자와 분자가 충돌한다. 존재와 존재가 접촉하고 부딪친다. 서로 교섭하고 간섭한다. 시작과 끝도 분명치 않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감각보다 더 표현적이다. 냄새로 세계와 만나며 느끼는 감각은 일종의 통증이기도 하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존재의 신비한 궤적을 그린다. 여하간 냄새와 후각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원초적 감각을 향수하곤 한다. 누군가는 꽃이 눈에 즐겁고 또 누군가는 코가 즐겁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모두 꽃말이 있듯이 모든 사물들은 모두 자기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만일 이러한 냄새를 모두 감각할 수 있고 일일이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왕 푸네스>의 이레네오 푸네스처럼 미치광이가 되거나 불행할지도 모른다.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세계에서는 새로운 시각과 정신이 솟기 마련이다. 수많은 입자들이 회오리치고 유동하며 자유운동을 한다. 그러다 우연히 감각 수용체와 접촉하는 것이다. 그런 감각과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풀과 꽃과 나무는 물론 불과 물과 공기에서 냄새를 맡고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면 결국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들이 풀어내는 무수한 냄새 분자들 속에서 어떻게 감각의 정신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너무 크거나 너무 많은, 또는 너무 복잡한 감각은 인식되지 못한다.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감각은 어떻게 인식될 수 있을까?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향기의 향연. 환경오염이 심각한 시대에 냄새를 맡는 수용체가 타고나길 특별히 많거나 예민할수록 일상의 삶이 불가능한 시대이니 말이다.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후각이 종합적으로 펼쳐내는 세계의 물질과 감각의 축제를 망각한지 이미 너무 오래되었다. 더 이상 자연 그 대로의 상태가 없는 세계에서 후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몽상과 같은 일이니 말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브라운 운동은 공기 중에 입자들의 불규칙한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공기 중에 향기 입자가 퍼져가는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임의적인 운동들은 수학의 확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수학적으로 완전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까 자연계의 임의적 운동이라는 현상은 수학이나 과학의 시각에서는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성이나 미적 세계에 들어오면 임의적이며 우연적인 존재와 운동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자명한 대상이 된다. 과학적으로 가장 모호한 표상의 세계가 미학적으로 가장 분명한 표상의 세계가 된다. 물질의 세계와 비물질의 세계가 교차하고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가 신비하게 교접한다. 정신이 가장 극단의 경계에서 만나는 신비이다며칠 굶은 사람에게 밥하는 냄새, 빵 굽는 냄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의 심리를 다루는 영화들, 예를 들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 속 주인공은 허브티와 마들렌을 먹고 마시며 냄새를 맡으며 과거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린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속 주인공 알란은 폭탄에 미쳐 평생을 폭탄 제조와 뭐든지 폭파시키는 쾌감에 몰입한다. 누군가에게 화약 냄새는 공포와 불안이지만 알란은 짙은 화약 냄새에서 평화를 느꼈다. <반지의 제왕> 속 주인공들도 반지의 냄새를 맡으며 황홀경에 빠진다. 영화 <고흐> 속 화가는 짙은 테라핀유의 냄새를 맡으면 심신을 안정시킨다. 한편 <셜록>이나 는 사람의 후각 또는 촉각을 하이퍼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놀라운 그래픽으로 번역한다. 탐정은 감각의 번역 또는 전환으로 난제들을 평균적 수준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현미경 수준의 분자의 차원 속을 유영하며 해결한다.

2

작가에게 있어서 인생의 중요한 사건과 관계는 거의 대부분 냄새를 통해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삶의 섬세하며 복잡한 수많은 결들을 쌓고 조직해간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담은 신비한 백과사전이다. 서재와 정원과 산책로와 각종 물건들의 냄새가 작가의 정신을 과거로 소환한다. 가슴을 아리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신화가 된다. 생활의 폭과 깊이가 더 기쁘고 더 슬퍼진다. 세상은 수많은 존재들의 축제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복잡하고 깊이 있는 존재인지 자각하게 된다.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향이 나며 그것은 실존의 감각이다. 마치 세상에 던져진 또는 포획된 인질의 상태처럼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감기고 귀가 멀면 후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작가는 모든 냄새를 인식하려한다. 그것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한다. 냄새는 다른 감각에 비해 인간의 손때를 덜 받은 감각이다. 비록 향수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감각에 비해 그렇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때를 또 인간 이전의 상태를 기억하는 유일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냄새를 맡는 정확한 경로는 미스터리이다. 실제 냄새를 맡는 건지 아니면 오래전 경험된 것들을 연상해내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김지수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경험한 책 냄새를 기억해내곤 주위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보는 눈을 뜨게 된다. 아버지의 오래된 낡은 서류 가방에는 이끼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마치 습기와 열기가 혼합된 숲처럼 느껴진다. 김지수 작가는 냄새 분자들의 운동을 엔트로피(Entropie)로 이해한다. 동물과 사람과 식물의 흔적이 향기의 숲을 이룬다. 자연과 사회, 역사, 숲과 인간의 생()이 교차하는 사건, 세계를 인간의 후각, 냄새로 기록하고 표현한다. 특별히 작가가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이 최고 절정의 순간을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이 직접 만든 향을 비롯해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체취를 채집하여 연출하였고 <냄새나무>라는 시리즈의 드로잉으로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은유하는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마치 햇빛과 물과 공기가 만나는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다. 사방의 솟아오르고 불규칙하게 운동하며 유동하는 운동을 닮은 드로잉이다. 그것은 식물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며 인간의 정신이기도 하다. 물론 감각적이기도 하다. 신체적 감각의 세계와 정신적 형이상학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통합된다. 작가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느끼는 오래된 나무와 서적이 뿜어내는 분자들과 정원용 가위의 쇠 분자를 감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감각이며 지각이다.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만물의 운동이 하나의 존재로 수렴하는 환영을 기록한다. 예술행위는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교차로에서 벌어진다. 순간순간 보이지 않던 세계의 한 조각이 명멸하며 인식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점점 주술사를 닮아간다.

 

 

 

 

 




환향: 바깥에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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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


지역과 사회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들은 정체성을 강제하는 기호로써 작동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과 여성, 연령과 계층, 직업과 지위 등 다층적으로 발현되는 논의와 현상은 국가와 사회가 암묵적으로 역할과 입장을 종용하기도 하며 이러한 특성을지역색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특히파주는 외곽에 위치한 전쟁과 평화의 상징매개가 되는 정치적 장소(임직각, DMZ, 군사기지)와 터전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두 모습(신도시에 안착하는 이주민, 일거리를 찾아 외곽의 공장단지로 파견되는 노동자)에서 다양한 자본과 정치적 태제와 권력이 작동한다. 더불어 분단국가라는 정치적 태제 아래 놓인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기억에서 재현하고 있는유효한 역사에 살고 있다. 파주는 이러한 영토에 대한 내재적 불안이 감지된 지역이고 우리는 이 안에서 국경 안팎을 맴도는 불안의 그림자를 쫓고자 한다.


내재적 불안이 감도는 전쟁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분단선의 경계지점에서 영토, 공간과 장소, 지역과 사회는 어떤 의미를 강제하고 있을까. 파주가 지닌 경계선 안팎을 상상하며 경계이탈자와 아닌 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파주는 토착민, 이주민, 환향민, 실향민 등 넓은 맥락을 담고 있는한국적 난민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한국적 난민은 고향이라는 장소를 박탈당한 혹은 뿌리내린 곳에서 추방된 자를 일컫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용과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사회 안에서 탈북자, 새터민,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 확장된 범위로 짚어가면서 최초의장소 없음과 장소가 없다면존재하지 않는 자대한 기원을 찾고자 했다. 특히디아스포라 환경에서 장소 없음과 존재하지 않는 자로서의여성의 위치를 밝혀보자면 이동 주체가 대부분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주로 남성 노동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여성들은 급격한 대도시화의 흐름에서 남성의 이동성보다 자유로웠다. 이러한 의미는 국가의 공식영역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었던 가사노동과 섹슈얼리티가 상품 가치, 재생산의 값어치로 매겨졌고 이를 상품으로 판매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시에서 호출하고 있는조선족 여성이 모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노동 이주를 떠난 후 조선족 여성이 없는 그 공간을 탈북 여성이 메꿔주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 지점은 국가의 공식역할에서 배제되어왔고 통계와 자료, 기록에서도 잡히지 않는 비체로서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비체존재하지 않는 자로서의 디아스포라의 여성에 주목했고 이들을 내몰았던 국가와 민족이 부르는고향이 어디일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삼백 년 전,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최전선으로 내몰려 죽음을 면치 못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이 살아남아 돌아왔을 때 절개를 잃은화냥질이 돼 버린 상황, 돌아오더라도 가문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던 환향녀의 이야기 말이다. 전시 『환향』은고향으로 돌아온다고향의 장소와돌아온다/오지 못함은 무엇인지, 이 최초의 질문을환향녀역사의 길목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길목은 사적 경험, 거시적인 화두와 가부장제 체계에서 포섭되지 않는 미시적인 사건들을 발화하는 통로이며, 계보학적인 화냥년의 호명에서 방향을 돌려 장소로부터 출발한다. 혹은 잠깐 머물러 있는 상태, 장소에 있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장소가 없는 안과 밖 경계 이탈성에 주목한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집이없는곳에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복잡한 실존의 문제로 엮이게 된다. 안전과 안위로 울타리 쳐진 경계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는 평행선으로 울려 퍼지고 결코 닿지 않을 메아리로 울부짖는다. 이번 전시를 통해 국가, 영토 민족으로의 귀향이 아닌 불안의 얼굴을 환대하는 장소, 3의 연대 공간을 꿈꿔보지만 복잡한 실존의 문제는 혐오의 얼굴로 재현되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다문화-다양성의 이름으로 포섭되어 개별사적 차이를 은폐하고 채색되어진 전체의 이야기를 경계하고 울타리 안팎을 허무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대지의 기원으로써 환향녀(바깥에서 안으로 회귀하는 여인들)가 되고자 한다. (* 참고문헌 「말과 활 11호」 탈북자 사유하기, 김성경)



일시

2019.10.01-10.10 11:00 - 18:00

Reception 10.03 17:00 - 20:00

 

장소

아트스페이스 휴

경기 파주시 광인사길 111 도서출판 청솔 301

 

기획

강정아

 

참여작가

남하나, 정혜진, 조 말, 히스테리안

 

협력

강병우, 김민주

 

디자인

오래오 스튜디오

 

후원

경기문화재단, 아트스페이스 휴, 한국출판진흥원


 


 

 


박필교 개인전 : 상냥한 도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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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도살자

2019. 09. 17  09. 28


Z세대의 누드 또는 벌거벗은 신체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1 ‘벌거벗음이라는 의상

회화는 결코 쾌락과 취미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뒤를 뒤따라오는 부차적인 효과이다. 또한, 회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배양하는 것도 아니다. 회화는 무언가 생산적이고 기능적인 효과와는 다른 시간대의 직관 또는 성찰과 조우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젊은 미술가에게 그 작가가 젊기 때문에 또 예술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상상력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이미지는 실상 매우 관습적이며 제도적이다. 오랜 기간 훈육 된 문화와 교육의 결과이다. 예술가는 거의 대부분의 이러한 배운 상상력에 아주 조금 또는 아주 작게 실금을 낸다. 그것이 거대한 파열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유희와 공감이라는 점에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표현은 미래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자산이 된다. 박필교 작가의 작업 또한 이러한 시각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다소 뜬금없는 상황에서 작가 자신의 누드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포즈를 반복해서 그린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온전히 남게 되는 벌거벗은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 자신은 유머와 풍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부조리와 불합리, 부도덕을 드러내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했는지 아무 상관없이 작가의 작업이 도덕적 또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일상공간에서 성인이 벌거벗고 나타나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불안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를 통해 매개됨으로써 객관적 거리감을 가지게 되면서 일종의 유머코드나 풍자의 맥락을 획득하게 된다.

박필교의 누드화는 일종의 예술이 지닌 품격 또는 존재론적 위상을 밑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을 통해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작가 자신의 누드화가 아니라 벌거벗음의 인상으로 느껴지도록 연출했다고 보여 진다. 존 버거가 말했듯 미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누드화는 사실 벌거벗은 그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시각적 관습으로 옷을 입힌 또 다른 차원의 의상화이다. 근대 이전의 누드화가 신 또는 영웅과 같은 특별한 존재에게 입혀진 의상화라는 직관은 박필교 작가의 누드화도 일종의 작가의 의식과 시각적 관습으로 자신의 자아에벌거벗음이라는 옷을 입힌 자화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작가는 유머와 풍자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난 뭔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특별한 존재라는 전통적인 예술가 상을 해체한다. 이러한 태도는 배우거나 경험에 의한 또는 후천적 노력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한 세대가 취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인다. 그리고 그 세대가 지니게 되는 현실과 꿈, 상상과 이미지, 의식과 무의식, 예술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관계 또는 정의와 관련된다. 예술은 더 이상 세상을 바꾸고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영웅적 지위에서 평범한 직업으로 하강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보나 하나의 자본 하나의 취향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의 예술가가 느끼는 사회에 대한 미적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2 유머와 풍자 그 너머

최근 유튜브에 소개된 부산의 나이 지긋한 교육감 아저씨가 직접 부르는 랩은 온통타인을 일단 리스펙! 닥치고 존중! 일단 리스펙!”을 반복한다. 스웨그를 멋진 태도로 보는 랩의 문화에서 차용해온 제스처로 올드 보이가 뜬금없이 타인에 대해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주입식 도덕주의 랩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세대 간의 소통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처연함 또는 비극적인 사회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전통적인 풍자의 의미는 환상이나 그로테스크 또는 부조리를 기반으로 한 위트나 유머로 비판대상의 존재론적 지위 또는 도덕적 결함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비판이나 공격의 대상이 자기 자신에게 회귀하는 운동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현대예술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박필교 작가의 작업 또한 이러한 흐름에 있다. 이는 니체나 실존주의를 떠올리지 않아도 20세기 초중반 세계대전과 함께 자본주의와 사회의 세속화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면서 인간 자신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혐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냥한 도살자>라는 전시 제목 또한 결코 유머와 풍자로는 가둬둘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불가해한 비극 또는 비참함이 있다. 작가가 성장하면서 밀레니엄 전후에 느꼈을 사람의 피를 말리는 저강도의 갈등과 폭력과 부조리가 깊이 내면화된 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초상일 수도 있다. 20세 초 독일의 화가 게오르그 그로츠의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인물 초상이 연출하는 그러한 음울하고 스산하며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맞닿아 있다. 작가의 얼굴을 빌려왔음에도 말이다.

박필교의 인물은 누드의 포즈와 피부의 컬러와 톤, 장소와 배경을 통해 차갑고 냉엄한 현실의 어떤 장소에 갇힌 인상을 준다. 벌거벗은 그림 연작은 등장인물이 작가 자신 또는 작가 자신을 빼닮은 젊은이의 뜬금없는 손짓과 발짓, 엉덩잇짓을 보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내면에 자리하는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과 부조리, 불편과 불합리, 미래에 대한 어두운 인식 등을 오버랩하게 한다. 그런데 벌거벗은 인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유머와 풍자가 기능하기에 너무 처연하다. 유머와 풍자가 분명 매우 효과적이며 미적인 표현과 소통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박필교의 그림에서는 작가의 주장처럼 유머를 쉽게 느끼기 어렵다. 또한, 풍자는 더더욱 어렵다. 자연인으로서 작가와 상관없이 회화 속 벌거벗은 인물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고 다시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일에 몰두할 지도 모른다. 박필교 작가의 혐오와 불신의 풍자는 실상 바닥을 침으로써 다시 위로 튀어 오르는 힘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한 손에는 허영을 다른 한 손에는 도덕을 쥐고 현실과 일상을 허우적거리며 꿈을 꾼다.

 


 

(Continued)

욕망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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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 김무무 김민희 오화진  

2019. 08. 07 09. 10

※전시제목 <욕망해도 괜찮아>는 김두식 교수의 저서 『욕망해도 괜찮아』, (창비, 2012) 에서 가져왔다.

 

 

욕망해도 괜찮아 - 질문과 용인 그리고 청유

김성호(미술평론가)

 

프롤로그 - 세 가지의 문제의식

 

미술은 답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제기한다. 미술은 메시지 전달의 차원에서 종종 애매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데, 미술가들이 대개 명료한 답을 찾기보다는 비언어의 미술을 통해서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답 말고 질문? 아니다.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미술가는 때로는 대답의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하거나 때때로 엉뚱한 답을 내리고 자신의 주장에 따라오라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명확한 것은 있다. 미술가들의 각자 다른 태도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언제나 답을 내리기보다 문제의식을 지니고 미술 안팎에서 성찰하는 일에 골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술 본연의 정체성이다.

여기 아트스페이스 휴의 기획전 《욕망해도 괜찮아》도 그렇다. 전시명을 김두식의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빌려온 것인 만큼, 이 전시는 욕망을 사회 질서를 위해서 통제할 음험한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욕망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이 시대에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지를 되묻는다. 전시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식을 미술 안팎에서 성찰하는 세 명의 작가, 김무무, 오화진, 김민희를 초대하고 그들의 욕망에 관한 태도를 우리에게 선보인다. 이 글은 세 작가의 욕망에 관한 조형적 성찰, 논의는 한계가 있음을 전제하고, 질문, 용인, 청유의 세 가지 키워드로 규범화하고 살펴보고자 한다.

 

1. 김무무의 질문 - 욕망해도 괜찮아?

작가 김무무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식을 질문(質問)을 통해서 접근한다. 질문이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이라는 사전적 정의대로, 질문의 주체가 그 내용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타자 앞에서 질문하기를 꺼린다. 짐짓 아는 체하면서 슬그머니 넘어가거나 자신을 스스로 자책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자. 알지 못하는 것을 묻지 못하고 위장과 기만으로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일은 알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을 억누르는 일이다. 달리 말해 욕망해도 괜찮은지를 묻는 일 자체를 거세하고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욕망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무무는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 이거 먹어도 돼?라고 묻는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욕망을 드러내는 질문처럼 솔직한 것이다. 그의 출품작에는 이러한 호기심과 순수한 욕망으로 가득한 질문들이 펼쳐진다. 내가 신이나 거인처럼 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은 현실계의 성인에겐 조현병(調絃病)과 같은 질병의 증후로 간주되거나 아이들의 어처구니없는 공상으로 치부될 따름이지만, 김무무의 작품 세계에선 상상력을 발현시키는 한계가 없는 욕망으로 발현된다.

그의 출품작 〈거인2〉에서는, 고야(F. J. de Goya)의 작품 속 거인이 마치 초인처럼 나타나 현대의 도시의 풍경을 유유히 거닐기도 하고, 작품 〈people get up and drive your funky soul〉에선, 스위프트(J. Swift)의 풍자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1726) 속 소인국에 나옴직한 사람들이 거대한 두 인물을 결박하고 있는 기묘한 풍경을 선보이기도 한다. 또한 고야, 마그리트(R. Magritte) 또는 벨기에의 동시대 화가 보흐먼스(Michaël Borremans) 등 사물 크기의 낯선 변주와 대비를 통해 불안하고도 기묘한 분위기를 선보이는 화가들의 조형적 언어를 빌려와 종합하여 파편적인 4개의 쉐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에 구현함으로써 전시 공간 자체를 하나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처럼 김무무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발견되곤 하는 꿈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환영과 데페이즈망(dépaysement)과 같은 낯선 조합과 구도 그리고 거친 표현주의 풍의 그로스테스크의 화면과 덜 그린 것 같은 단순하고도 담백한 독특한 붓질이 맞부딪히면서 그의 한계 없는 상상과 욕망의 나래가 펼쳐진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출품작들은 이게 뭐야?, 이거 해도 돼?라고 재차 묻는, 호기심과 순수한 욕망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질문을 탐색하고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김무무의 작품은 이제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식의 순수한 질문들이 지속해서 펼쳐지는 욕망의 연쇄적 회화라 할 만하다

 

2. 오화진의 용인 - 욕망해도 괜찮아.

한편, 작가 오화진은 꿈틀거리는 내적 욕망을 성찰하면서 자신에게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것은 용납하여 인정하다는 의미의 용인(容認)과 같은 태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수용 그리고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용납, 허락과 같은 개념이 한데 섞인 것이다. 실상 그것은 미술 창작에 대한 그녀의 오랫동안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녀는 작가 노트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작업을 점점 할수록 계획되지 않은 순전한 본능적인 타고난 감각에 의해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영감의 원천을 최대한 나 자신에게서 뽑아내고 싶은 것이다.여기서 순전한 본능적인 타고난 감각이란 자명하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 오화진의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진부한 아이디어가 나올지라도 스스로에게 있어서 충실했다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있어, 창작에 관한 가장 주요한 문제의식이 된다.

본능적 감각이란 인간의 내부에서부터 생산된다는 점에서 마치 욕망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2005년부터 작가 오화진의 작업에서 욕망이란 주제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흥미롭게도 오화진 개인의 문화라는 화두와도 접목된 것이었다. 개인의 문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문화란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 않던가? 게다가 문화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성적 실천을 통해 집단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 공유하는 행동 양식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문화란 집단의 것이자, 이성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개인의 문화라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녀는 말한다. 역사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모든 문화적 소산에는 인간의 욕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리고 본인이 바라볼 때 나라나 민족마다 사회 속에서 이뤄낸 문화가 있듯이 사람들에겐 각기 저마다의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집단이 이뤄낸 문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보이는 것이 작겠지만, 분명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오화진 개인의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오화진의 욕망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작가가 다루는 욕망이라는 흔한 주제를 나 역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작가의 진술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녀의 작품에서 개인의 문화란 욕망을 객관화시키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즉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처럼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객관화시키고 용인함으로써 그것을 집단의 범례 속에 투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셈이다.

보라! 종이 위에 즉흥적인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제작된 일련의 시리즈 작품은 작가 오화진이 객관화시킨 자신의 욕망이 마치 자연사박물관에 박제된 생물체처럼 다양하게 펼쳐진다. 물고기와 같은 형상으로 보이는 드로잉은 〈이기주어()〉라는 이름으로, 식물처럼 보이는 드로잉은 〈기생초〉라는 이름으로 또한 말처럼 보이는 그것은 〈자존마()〉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면서 개별 작품들은 오화진 개인의 문화라는 한 집단의 여러 구성원으로 편입된다. 철사로 된 가느다란 조각체 위에 푸른색의 모직물을 입혀 전시 공간 속에 산포하듯이 매단 설치 작품 〈신호〉는 또 어떠한가? 그것 또한 본능적 욕망으로 창작된 여러 개별체의 조각들을 한꺼번에 객관화시키고 오화진 개인의 문화라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키기에 족하다. 마치 작품 제목처럼 개인의 기호적 세계로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개인의 운명적인 만남으로서 말이다.

이제, 오화진은 개인의 문화라는 기호적 세계, 우연이 맞물리는 운명적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자신과 타자에게 욕망을 용인하고 허락하면서 말한다. 욕망해도 괜찮아.

 

3. 김민희의 청유 - 욕망해도 괜찮아!

작가 김민희는 이번 전시에서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타자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은 욕망하기를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요청하는 청유(請誘)의 손짓이다. 한 주체가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스스로 실천하거나 타자에게 그(그녀)들의 욕망을 실천하라고 독려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전자는 내밀한 사적 영역에서 일상적으로 실천되고, 후자는 공적인 제도의 영역에서 계몽적으로 실천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안의 사적 욕망을 타자에게 고백하거나 누설하고, 나와 함께 욕망을 실천하자고 타자에게 청유하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다. 욕망은 개별자 주체의 사적 영역으로부터 발화하는 것이면서도 타자의 욕망을 자각하고 그들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으면서 까다롭게 구성되는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라캉(J. Lacan)의 유명한 아포리즘,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은 그렇게 태어났다. 가정해 보자. 나의 욕망이 너의 욕망과 다르다면? 두 욕망이 만나 끝 간 데 없이 어그러지기만 하면 어떻게 해? 무안하잖아!그렇다. 욕망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욕망해도 괜찮아!라면서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타자에게도 권하는 욕망에 대한 청유란 애초부터 쉽지 않다.

작가 김민희는 이처럼 쉽지 않은 욕망에 대한 청유를 흔쾌히 그리고 기꺼이 실천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타자화하고 심지어 상품화하기에 이른 한국의 폐쇄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를 결연히 반대하는 비판적 인식 속에서 잉태하고 출발한 것이다. 그녀의 〈오키나와 판타지〉 연작(2018~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를 가시화하고 여성의 성적 욕망과 상상을 드러내는 작업이자 기존의 남성적 발화로 치부되었던 성적 판타지를 여성의 것으로 전유하는데 골몰한 작업이다.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의 욕망에 반기를 들고 여성적 발화를 전면에 내세운 김민희의 욕망에 대한 청유는 그 출발 자체가 다소 도발적이다. 보라! 그녀는 남성으로부터 방어했던 여성의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일련의 회화적 제스처, 예를 들면 엉덩이와 가슴, 그리고 흥분해서 딱딱해진 유두를 가식 없이 회화의 표면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페미니즘 이론가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아브젝트(abject)와 그것이 만드는 체험인 아브젝시옹(abjection) 개념을 회화를 통해 실천하려는 듯,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몸으로부터 유출되는 모든 것을 비루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존재로 치환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닌 셈이다.

한편, 김민희는 발랄한 처녀 귀신을 다루는 최근 연작인 〈고스트 비키니〉를 통해서, 여성의 욕망하기를 강권하는 직접적 메시지로부터 일정 부분 힘을 뺀 채, 상징과 은유가 점유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것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덧씌워졌던 여성의 욕망과 섹슈얼리티의 본성을 재기발랄한 가상의 처녀 귀신이 출몰하는 판타지적 세계로 벗겨내는 일이다. 그것은 젠더의 담론을 전복하려는 저항의 색을 지우고, 타자화된 여성의 실체를 팩션(faction)의 판타지의 세계로 드러내는 일에 집중한다. 즉 여귀(女鬼) 설화가 떠도는 실제의 장소를 답사하고, 전승의 이야기를 채취하는 등 사실(fact)에 기초한 채 자신이 창안한 허구(fiction)의 세계를 통해서 여성 담론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욕망의 해방 담론을 상상하는 일이며, 선동과 강권의 메시지로부터 위로와 청유의 메시지로 전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들어보자. 김민희는 자신과 타자로서의 모든 여성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들을 다독이는 청유의 손길을 내밀면서 상쾌하게 말한다. 욕망해도 괜찮아!

 

에필로그

아트스페이스 휴의 기획전 《욕망해도 괜찮아》는 욕망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다만 세 명의 작가를 통해서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욕망의 담론을 다양하게 성찰하고 이 시대에 욕망을 미술 안팎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를, 때론 천진하게, 때론 흔쾌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성찰할 따름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세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고 그들의 조형적 성찰을 분석해 보았듯이, 욕망은 인간 주체의 다중적 산물이라는 정체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이다. 그것은 수다한 인간 군상처럼 무척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까닭에 좀처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는 모두 욕망하고, 그 욕망이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결핍의 공간에 자리한 소외가 욕망의 주체를 분열시킨다고 할지라도 욕망은 언제나 재생산된다는 것을 말이다. 윤리와 도덕,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억압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생산 활동인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러니 억압하지 말 일이다. 타자에게 고백하고 질문하라. 그렇지 않으면 한 주체의 욕망을 가늠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억압된 욕망이 사회적 질병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지속해서 질문하되 그것을 허락하고 청유할 일이다.

이 글에서 밝혀둘 것은,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질문,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용인,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청유는 세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일 뿐, 그들의 작품 세계 전반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하는 세월만큼, 세 명의 작가들은 앞으로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모를 거듭하는 작품들을 선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세 가지 욕망에 대한 태도는 동일하게 욕망에 대한 억압과 은폐에 대해서 반발하고 반기(反旗)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가 내세우는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발화 행위, 욕망에 대한 세 가지 방식의 말하기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욕망에 대한 지속적인 실천을 설파하는 셈이다.

 

 


(Continued)

곽상원 개인전: 파편들로부터 From Frag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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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들로부터 From Fragments

2019.06.26-07.30

 

우연과 필연 사이, 무수한 삶의 파편들로부터

김 현(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짧은 시간 그는 나무 그늘에 서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가져갈 것인가. 오늘의 기억으로 남겨 둘 것인가. 하던 차에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 새는 무심히 소나무 위를 비행하다 적당히 자신이 한 숨 돌리기에 타당해 보이는 가지에 앉았다. 새는 성인이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는지 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 또한 흔히 말하는 그림속의 한 장면스러웠는데 K가 머릿속에 구상은 했지만 도통 분위기 자체가 떠오르지 않아 망설였던 캔버스의 화면 구도 같았다. (작가 수필 「새와 깃발」 중 일부)

 

#새와 깃발

곽상원의 최근 목탄 드로잉 작업은 순서가 뒤섞인 영화 필름처럼 비연속적으로 연결되어있다. 내용은 더 단순하고 명확해졌으며 표현은 더 거칠고 과감해졌다. 장르로 보자면, 잔혹한 느와르 영화에 가깝다. 각각의 장면들은 시간과 공간을 교차하며 단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작가의 수필은 이러한 이야기 사이의 빈 공간을 연결하며 작품을 독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등장인물 K는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깃발을 가지고 내려올지 말지를 고민하고, 그 사이 새는 그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다. 결국 K는 깃발을 가지고 내려오기로 결정하지만 산을 다 내려왔을 무렵, 깃대에 꽂힌 깃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빈 깃대만 남았음을 알게 된다. 짧은 수필의 한 장면은 사소한 일에 고민하고 망설이는 K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새의 단순하고 명쾌한 움직임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는 그의 작업에서 복잡하고 거친 필치, 시점의 이동과 변화 등으로 나타난다. 무엇인가가 합당한 이유로 있었다. 라기보다는 다가오기에 담아 둔 것 뿐 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연과 필연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일상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흩어져있다.

 

#불안

집단이나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의 정서는 곽상원 작업의 중요한 키워드로 오랜 시간 그를 수식했다. 곽상원의 초기 작업은 특정 집단에 속해있는 군집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군대 시리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젊음과 힘을 과시하는 군인들의 과장된 제스처를 작가 특유의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한 작업은 도발적인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텅 비어있는 인상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집단이 발휘하는 공허한 힘 뒤에 감춰진 개인의 불안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때문일 것이다. 이후 그의 작업은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풍경 자체를 전면에 드러내거나 인물을 풍경의 일부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배회, 배회자로 명명되는 작업들이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적 색채와 절제된 표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표면 등 곽상원 특유의 음울한 풍경이 완성된다.

 

#, ,

곽상원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이나 불, 숲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환경에 서서히 침잠되어 간다. 마땅히 거부하지도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은 상태로 얼굴이 없는 신체는 화면을 부유한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은 물체가 아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보고 그 물질을 물, , 공기, 흙의 4가지 원소로 분류하였다. 4가지 원소는 죽음, 소멸, 생성, 생명과 같은 포괄적인 의미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는데 예를 들어 불은 소멸과 죽음의 이미지에 가깝지만 불꽃이 수직으로 타오르는 모습은 하늘을 향한 비상, 생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시학과 단편들』) 불의 상승하는 이미지는 곽상원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인데, 그는 이전 작업 <불이 되어버린 사람>, <영원히 타오르는 재>에서 집단이나 사회의 외압을 불의 이미지로 시각화했다. 또한 주변에 동화되지 않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모습은 하늘로 상승하는 불의 특성과 우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물은 불보다 여성적인 물질이면서 물은 항상 흐르며, 물은 항상 떨어지며, 그리고 항상 수평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불과 마찬가지로 물과 숲의 이미지는 인간의 욕구나 의지를 억압하거나 붙잡아두려는 반대적 힘의 작용으로 읽힌다. 불과 숲이 수직으로 뻗은 상승하는 힘이라면, 물은 수평으로 흐르는 정적인 힘이다. 인물들은 숨 막히도록 빽빽하게 메워진 숲 안에서 혹은 주변을 맴도는 물 안에 갇혀 그 존재의 의무를 증명해내려 끊임없이 애쓴다.

 

바위 틈 사이에 겨우 피어난 풀 같이 존재의 미약함을 나타낸 이전 작업과 달리 근작에서는 인물의 밀도와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두 명의 인물이나 사물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고독이나 불안에 갇혀있던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 관계를 통해 문제를 인식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익명화된 신체는 자신과 구분되는 타자이거나 하나의 자아에서 분열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는데 양쪽의 관점 모두 갈등의 대상이 외부로 향해있던 이전 작업과 달리 자신 내부에서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동하며 깨져 나가는 동물 조각>, <무던한 새>의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시멘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깨지고 부서져 전시장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된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이 조각들은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본래의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견고하고 단단한 것으로 몸을 무장하고 지켜낼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일까. 어쩌면 겹겹이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도 일순간에 흩어지고 사라져버릴 무수한 삶의 파편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Continued)

산책자들: 김미래 김창영 이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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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들: 김미래 김창영 이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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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들 : 추상-도시를 거닐다

임지연(철학박사, 미학)




세파에 지쳐 한적한 시골마을로 향했던 루소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 이 세상에 나는 혼자다. 더 이상 형제도, 가까운 사람도, 친구도, 사람들과의 교제도 없다. 오직 나 자신뿐이다.”(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중) 외딴 곳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자발적 고독, 이에 더하여 루소에게 산책은 그 자신을 자기 내면의 더욱 외진 곳으로 떠나보내는 작업이었다. 감추어져 있던 오랜 기억과 사념들, 쓸모없이 버려진 것으로 보였던 사유의 단편들이 의식의 표층으로 담담히 떠오른다.


이제 고독한 산책을 위해 시골로 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 보들레르는 금속과 대리석과 물이 이루는”, “은은하거나 빛나는 금수반 속에 가득한 폭포와 분수들”, “무수한 계단과 아케이드로 구성된 도시 공간을 배회한다.(보들레르, 《파리인의 꿈》 중) 그의 또렷하게 취한 눈이 파리의 우울하고 어두운 구석들을 비척거린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보이는 도시의 막다른 골목, 어디로 가야하지? 그러나 도시의 유목민에게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 일이 아니다.”(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중) 간판과 행인, 술집과 상점들이 그에게 말을 건다. 냄새와 이미지와 소리와 감촉과 맛으로 말하는 사물들의 오랜 언어. 사물의 말을 들으며 헤매는 기술을 머리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터득한 산책자의 서늘한 시선이 도시 한 구석에 내려앉는다.


회화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실험하는 아트스페이스 휴의 이번 기획전 《산책자들》은 20세기 추상회화 이후 추상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모색한다. 특히 한국 추상회화의 지형도에 또 하나의 길을 내고자 한 이번 기획의 교차로에서 여기 세 명의 산책자들이 조우하였다. ‘평면성이라는 공통의 추상 문법을 익힌 자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세대 변이 속에서 막연하게나마 품어봄직한 정서적 고향으로부터 어느덧 멀리 떠나온 자들, 이들이 내보인 추상-도시 속에서 평면의 다양한 가능성과 새로운 미적 주체의 등장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김미래 작가의 작품에서는 길의 모퉁이를 도는 자의 시선이 감지된다. 그의 시선은 촉감적이다. 나무 패널 위에 천을 씌우지 않고 작업하는 그는 나무 패널이 지니는 거칠고 딱딱한 물성을 작품의 기본 요소로 삼는다. 벽의 감촉을 손으로 느끼며 모퉁이를 타고 돌 때처럼, 패널의 생생한 감촉을 느끼는 그의 시선은 패널의 앞면을 돌아 측면으로까지 이어진다. 촉감은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보다 원초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이다. 그것은 한 대상이 주체 내부에서 관념적 표상으로 자리 잡기 이전, 대상의 생생한 존재-사실을 일차적으로 수용하고 인지하는 능력이다. 나아가 그러한 존재의 세계는 언어로 규정되거나 용도로 일반화되기 전, 어떤 것으로든 무한하게 생성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시간대에 속한다. 그의 촉감적 시선이 탐닉하는 본질적인 대상 역시 사물의 표층에서 감지되는 이러한 잠재력들이다. 그의 시선은 주변에서 만져지는 모든 것들로 향한다. 도시의 수집가로서 작가의 시선에 닿은 사물들이 화면 위에 어떻게 최종 배열될지는 언제나 미결정의 상태이다.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결단의 순간은 역시 패널의 딱딱한 표면을 탐색하는 중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최종 배열된 화면은 작가의 물러설 수 없는 실재 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그의 딱딱한 표면은 추상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체적 특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희준 작가에게서 감지되는 것은 설계자의 시선이다. 그의 설계 작업은 철저히 걷는 행위를 통해 시작된다.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생산과 소비의 경직된 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이 보이는 그 꽉 짜인 자본의 공간을 거닐며, 그는 생활 세계를 이루는 새로운 공식을 그만의 추상 언어로 완성한다. 설계자의 시선에 붙들린 것은 도시 공간에 자리한 일종의 대립성이다. 도시를 걸으며 관찰한 과거와 현재, 쓸모있음과 쓸모없음, 투박함과 세련미 등의 대립은 평면과 입체, 수직과 수평, 물성과 형상성 간의 대립으로 화면 위에 배치된다. 도시 공간과 추상 공간에서 발견되는 대립의 이러한 전면적 배치는 작가로서 그가 지니는 내적 긴장감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내적 긴장감이 고조될수록 대립의 완전한 통일성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 설계자로서 그의 공식이 완수한 바이다. 그의 통일은 두 항의 대립을 뭉뚱그려 단순히 하나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립의 투명한 제시라는 점에서 존재론적 평등 개념에 가깝다. 과거와 현재, 수직과 수평, 평면과 입체를 평등하게 바라볼 줄 아는 작가의 설계 작업에서는 추상회화를 극단에까지 몰아붙이는 과감한 결행이 엿보인다. 추상이 지니는 역량의 극대화,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그 투쟁의 현장을 그는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1월 일본 비에이 지역을 여행하며 모은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작업한 이번 작품들에서 그 역량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창영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감지되는 것은 추상 형식 속에 서려 있는 숨결이다. 그의 작품은 딱딱하지 않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일어나는 세계의 일렁임과 같이, 그의 작품은 경직된 것처럼 보이는 도시 공간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이번 작품들의 제작 방식 및 형식의 진화에서 발견된다. 과거 작품에서 작가는 캔버스의 질감이나 채색의 프로세스가 보이지 않도록 화면상에 극도의 평평함을 추구했던 반면,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는 수직의 결들이 켜켜이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오랜 시간 타지에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한 것과 더불어, 무엇보다 주제의식의 변화가 눈에 띤다. 빛과 그림자의 상호 습합에 천착했던 작가의 시선은 이제 직선과 곡선, 자연과 인공의 관계성으로 옮겨 왔다. 빛과 그림자, 절대적 진공 상태 속에서 무릇 생성의 기원지를 마련했던 작가의 몸속으로 새로운 숨이 훅하니 들어왔다. 들숨은 날숨에 의한 것. 그가 내뱉은 숨이 새로운 공기를 머금고 작품 안에 새겨졌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산책하는 그의 호흡에 맞춰 도시의 실루엣이 출렁인다. 솟아오를 줄만 아는 도시의 욕망, 산책자는 권태롭다. 그러나 권태는 실존적 자각이 시작되는 때. 이제 작가에게 세계는 수직만이 아니라 수평적 형상으로도 포착된다. 수직과 수평의 교차 속에서 길을 잃을까 두려워 할 것 없다. 산책자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추상-도시의 지도는 몸으로 작성된다. 그것은 손으로 감촉하고 발로 걷고 느리거나 느리지 않게 숨을 쉬는 가운데 그려진다. 몸으로 그리는 지도 제작자는 기존의 주체와는 분명 다른 주체이다. 그는 신체를 지니고 존재론적 평등 속에서 매 순간 호흡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을 조망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시선이란 과거의 유물이거나 환상일 뿐이다.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난 추상의 정신, 그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위를 느낀다. 육화된 정신은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와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만지고 걸어내고 숨을 불어 넣으며 길을 낸 추상-도시, 노동하거나 소비하지 않으면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도시 공간에 새로운 삶의 양식이 자리하는 방법도 어쩌면 이와 같으리라.



(Continued)

5/1, 5/6 전시장 오픈합니다. 이서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 5/7까지 입니다.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서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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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

 

2019.04.03-05.07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을 위해  

김 현(아트스페이스 휴 큐레이터)

 

 

 

<연약한 지반>, <유기물>, <미결정 레이블>에 이은 이서인의 4번째 개인전 <연성의 오브제>는 그간의 전시 제목이 어렴풋이 내비치는 바와 같이 실재와 재현, 사물과 오브제, 회화와 설치 사이를 유영하는 작가의 실험적 과정과 비로소 도달하게 된 여정의 종착지와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한창 진행 중인 작가의 프로세스에 온점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잠재적 고민을 해결하려는 탐색의 시도가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작가는 개인전마다 완전히 다른 의도와 방식을 가지고 궁극적으로회화의 본질과 경계에 대한 질문의 답을 회화 안과 밖을 오가며 탐구했다. 이미지 처리 프로그램의 효과를 회화로 재현하거나, 버려진 사물의 본래의 기능을 지우고 조형적인 특성만 가지고 이를 오브제로 사용하거나, 조각적인 요소들을 가져와 회화와 설치 그 중 어느 것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모호한 경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같은 다양한 탐구의 과정은 다른 장르와의 타협으로 회화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단순한 방식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이서인의 회화는 완성된 캔버스를 자르고 재조합하거나 쌓아올려 캔버스 본래의 기능을 지우고, 캔버스 겉과 속의 물리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무 본연의 거친 질감과 색감, 천에서 뜯겨 나온 실오라기, 캔버스 틀에 박힌 피스의 균일한 간격과 차가운 재료의 특성마저도 회화의 일부로 제시된다. 이서인의변형된 캔버스 60-70년대 등장한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와 유사성을 갖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작품의 이미지와 캔버스의 형태가 일체되어 장식적 성격을 갖는 변형 캔버스는 작가가 철저하게 마다하는 회화가 오브제로 작동하는 순간의 오류이다. 이서인의 캔버스는 변형의 범주를 넘어캔버스를 뭉개서 드로잉을 하고 있다라고 작가 스스로 밝히듯이 회화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있는 캔버스를 해체하여 회화 내부적 특성을 규정짓는 요소들과 동일하게 외부적 특성을 끌어들여 회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전시는 캔버스의 물성을 가장 날것의 상태로 보여주는, 회화의 경계 바깥부터 전형적인 회화의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경계의 가장 안쪽까지 작가가 규정한 회화의 유연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 <캔버스와 캔버스_NO.03>는 한쪽이 원형으로 변형된 캔버스 두 개의 뒷면을 맞붙여 앞과 뒤, 겉과 속의 경계를 흐트러트려 가장 오브제 가까운 형태로 제시하고 <무너진 숲_NO.04>는 숲의 복잡한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구현하며 전형적인 회화의 모습에 근접하지만 이마저도 빈틈없이 꽉 채워진 <무너진 숲_NO.03>와 비교를 자처하며 미디엄의 농담에 따른 차이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이는 보수적 회화를 향한 도전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도 회화와 회화가 아닌 것,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물질과 비물질의 미묘한 경계를 섬세하게 더듬어보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 이서인 회화에 다가가는 올바른 접근법처럼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름이 갖지 않는 것처럼, 0도와 1도 사이에 존재하는 수치화되지 않은 각을 예민하게 재는 것처럼.

 

때문에유연한 오브제는 공사장에서 떨어져 나온 콘크리트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고, 겹겹의 페인트가 쌓인 오래된 간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추론도 일말의 연관을 거부하고 콘크리트 조각과 오래된 간판에서 느껴지는 조형적 감상 정도에 머무르게 한다. 작가는 실제로 동두천과 인천 등지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나 공터에서 작업의 소재들을 발견하였으나 이를 곧장 장소나 사물에서 발현되는 기억이나 연민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본래의 필요와 목적에서 탈각한 장소나 사물이 갖는 조형적 특성만이 작가에게 미적 가치를 갖는다.

 

또한 작가가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는 전시 방식은 캔버스를 단순히 벽에 거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눕히듯이 던져놓거나 프레임을 제작하여 평면인 캔버스에 설치물과 같은 부피감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 같은 방식은 회화 경계의 입체적인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업 과정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동선을 제시하여 전시를 보다 입체적으로 감상하도록 한다. 이서인의 이러한 전략적 장치는 원색적이거나 구호적이지 않은 타협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에 보다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한다.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무겁고 오래된 주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이를 유순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제안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