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순철 개인전 - Eye To I

타자를 경유해 나를 향한 눈

- 변순철의 <짝-패>와 사진에서 시선의 경로

작가가 자기 작품의 주제를 ‘작가 자신과 타인들의 삶을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영’하는 매개체로 여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견 예술을 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그럴 것 같은 이 예술에 대한 입장이 의외로 드문 이유가 있다. 많은 작가들이 주제를 통해 타인에 대한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몰입하지, 그 주제를 일종의 거울로 삼아 작가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성(reflection)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선명히 알고 작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삼 자신의 작품을 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는 작가 변순철은 그렇게 한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그는 어떻게 자신의 작업 주제와 결과물로서의 작품들을 통해 스스로를 되비춰보는가? 우리가 이제부터 디테일하게 더듬어보려 하는 것은 그 시선의 경로이다.

우리 앞에 놓인, 우리가 흔하게 마주치는, 그리고 우리 눈에 띄는 수많은 사진에서 진정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대자연이나 대도시의 장관? 그럴싸한(photogenic) 풍경이나 인물? 결정적인 순간(the decisive moment)? 굶주린 이의 리얼리티? 그도 아니면 싸이 월드나 블로그를 위한 셀카 용 얼굴들? 물론 그렇다. 어떤 사진에서든 우리가 보는 것은 거기 찍힌 피사체이다. 그 피사체는 때로 망망대해일 수도 있고, 빌딩 숲일 수도 있으며, 아프리카의 기아에 허덕이는 노파일 수도 있다. 또는 고인 물 위로 우연찮게 떨궈진 사람의 그림자이거나 소위 ‘얼짱’ 각도의 소녀 표정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장의 이미지로 드러난 피사체라는 표면을 살짝 걷어내면,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욕망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 또는 그녀가 이러저러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잡은 각도로, 요모조모의 양태로 해석해서, 딱 카메라의 뷰파인더만큼만 절단해서 보는 특정한 세계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진은 사진 찍은 이의 바깥에 있는 타자의 세계를 ‘피사체’라는 대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보여주기’는 타자를 경유해 언제나 사진 찍는 사람 그 자신의 욕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시선’, ‘관점’으로 말 바꿀 수 있고, 사진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 ‘지향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이 사실은 일테면 자기도취나 자기 가면의 얼짱 사진만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을 주창한 브레송(H. C. Breson) 또는 ‘다큐멘터리’를 추구하는 살가도(S. Salgado)의 예술 사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변순철의 사진을 논하기 위해, 나는 ‘사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다소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결국 사진 찍는 이의 욕망’이라고 스스로 답변하면서 일종의 우회로를 걸었다. 그런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사진가 변순철이 자각하고 있고 기꺼이 인정하는 사진의 정체가 바로, 사진이 사진 찍는 이의 욕망을 재현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줄곧 ‘타인’을 찍어 왔는데, 작가 자신은 그 사진들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사진들이 나의 또 다른 초상(self portrait)이 아닐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의 생각이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사진에 현상된 피사체가 단순히 ‘타인’이라는 점에서 더 나아가 그 타인이 ‘다인종 또는 게이 커플’이거나 ‘20대 젊은이’라는 데 있다. 변순철의 <짝-패>와 를 보자.

<짝-패>라는 타이틀로 흑인-백인 커플, 서양-아시아인 커플, 게이 패밀리 등을 찍은 사진 시리즈 작업을 했을 때, 변순철은 유학생으로 미국 뉴욕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는 한창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사회적 위치가 모호한 20대 젊은 남녀를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 찍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자기 일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고 있는 30대 중반 작가이다. 이 객관적 사실들에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작가가 자신이 찍는 타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음을 자명하게 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작가의 말을 염두에 둘 때, 그가 심리적으로는 미국 사회 속의 소수자나 한국의 익명적 청춘에 스스로를 투사하고 있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요컨대 타인이라는 피사체에서 자기의 다른 얼굴을 본다는 작가의 생각에 따른다면, 변순철은 사진을 통해 자신을 강력한 주체 ―서구, 백인, 남성, 이성애 가족, 성공한 어른― 중심의 사회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소수자’이자 그런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익명인’으로 정의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변순철 사진의 ‘사회성’ 내지는 ‘공공성’이 획득된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 사회가 시스템의 논리에 따라 ‘예외적 존재’로 규정하거나 ‘비가시적 존재’처럼 취급하는 타자들을 자신이라 여기며 찍음으로써, 피사체를 한갓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과 개인성에 동의하고, 공감하고, 존중하는 공공적 사진을 찍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순철 사진 속 여러 개별자들은 ‘타인인 동시에 나’인 사회적 주체들의 모습이 된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는 “한 인물의 성격이란 그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보이며 파악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을 우리가 생산적으로 수용한다면, ‘사진가의 피사체가 된 주체의 성격은 그 사진 찍는 이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보이며 파악되는 것’이 될 듯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변순철 사진의 인물들은 변순철의 시선에 따라 드러나고 포착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미의 변곡(variation)이 한 번 더 일어난다. 그 변곡은 이제까지 논했듯이 작가가 자신이 찍은 인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는 생각을 변곡점으로 한다. 즉 동일시의 방향이 주체→타자의 일방향이 아니라 주체→타자→주체로 향하는 순환인 것이다. 결국 변순철의 시선은 타자를 경유해 나를 향한 눈이고, 그런 한 그의 사진은 타자에 대한 주체의 폭력적 ‘동일화’가 아니라 타자에 영향 받는 주체의 ‘변화 가능성’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변순철이 찍은,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그 사이에 앉은 여자아이가 미국 중산층 가정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포즈를 취한 <짝-패> 사진 중 하나를 보면서, 작가가 그 사진을 찍기 이전과 이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는 없다. 이 사진은 그저 아주 차분한 톤으로 그들의 깔끔하고 안정적인 삶의 단면을 중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변순철이 20대 남녀 각자를 동일한 바위 위에 세우고 찍은 의 여러 사진들을 보지만, 거기서 우리가 느끼거나 읽어 내거나 유추하는 것은 그 피사체가 된 사람들의 포즈, 패션, 분위기, 기질 비슷한 것이지 작가의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 변순철이 ‘타자를 경유해 나를 반성하는 사진’을 지향한다는 점은 우리의 사고를 통해 동의 가능한 부분이고, 실제 그의 사진작품 속에서 체감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모델과 엄격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말과는 달리 작가가 그 타인-모델의 개인성, 주체성을 피사체의 기능으로 고정시켜 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사진이 단순한 기계적 재현을 넘어 대상의 내면을, 좀 더 거창하게 말해서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려 욕망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 한에서 피사체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보고자 하는 변순철의 사진에 대한 욕망도 그리 간단하게 성취되기는 어려울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그런 욕망의 실현을 포기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피사체-타자로 향해가는 실천을 할 수 있을 뿐이고, 우리는 변순철의 그런 시도가 멈추지 않기를, 그렇게 해서 언젠가 그가 찍은 타자의 얼굴 속에서 작가 본인을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사진이라면 우리 또한 거기서 우리 자신의 눈이 깊어진 얼굴을 볼 것이다.

강 수 미 (미학)

 

전시일정 2008 07.05-07.26

전시 오프닝 2008.07.05 sat 6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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