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정 개인전

<길들여지기_to be tamed> : 어렸을 적 ‘앞으로 나란히’1. 초등학교 입학식 광경을 보노라면, 일대 장관이 벌어진다. 따스한 부모의 품을 벗어나, 아이들이 처음으로 공적인 규율에 맞추려니, 그렇지 않아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 제곱된 몸뚱이가 발작을 해댄다. 낯설어 징징대는 놈은 고사하고, 일이야 어찌 됐든 헤헤거리는 놈은 어떠하며, 사방팔방 안방마냥 헤집고 댕기는 녀석 등등, 당해낼 도리가 없다.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정신이 쏙 빠지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아이들도 나름대로 난관이 닥쳤으니, 앞으로 나란히, 구호에 맞춰 줄서는 게 문제다. 선생님이 참을성 있게, 앞으로 나란히 외쳐도, 듣는 놈 따로 있고 하는 놈 따로 있으니, 일찍이 줄이라곤 서 본적 없던 개구쟁이는 그들대로 어리둥절한 몸짓을 남발하고, 이놈의 녀석들을 제대로 줄을 세워야 하는 선생님은 그들대로 난감한 실랑이를 치르기 일쑤다. ‘주목,’ 이때 선생님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말씀이시다. 한시도 쉬지 않던 눈동자는 이때부터 선생님의 눈짓, 손짓, 몸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이때부터 그들은 조금씩 ‘인간’으로 단련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간이 되는 길이란, 멀고도 험하기 마련, 그들은 마르고 닳도록 선생님의 주의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의 말씀을 졸업할 때가 되면, 군대에 가서 상관의 질책을 (유형의 폭력과 함께) 신물 나도록 받아야 하고, 군대를 제대하면, 상사의 주의가 (무형의 압력과 함께) 그를 평생 기다리고 있다. 아, 언제나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험난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영웅은 성배를 찾아서 모험을 떠났건만, 오늘날 인간은 인간이 되고자 하염없이 고개만 돌리고 주의만 하는구나. 그렇게 해서, 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 되고야 만다.

2. 생각할수록 어떻게 버티어 냈는지 신기할 정도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무려 12년 동안 줄기차게 줄을 맞추고 살았던 셈이다. 특히, 어렸을 적 들었던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어찌나 길었고 얼마나 지루하던지, 지금도 아찔하다. 하지만, 정작 놀랄만한 일은, 그토록 오랫동안 지겹고 지루한 일을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길을 걷더라도 어쩐지 똑바로 직선을 유지해야 하고, 어디라도 앉으려고 할라치면 반드시 정한대로 바르게 앉아야 하는 등등, 어렸을 적 ‘앞으로 나란히’는 여전히 우리의 육체 깊숙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 ‘육체의 무의식’이라고 해야 정확하리라. 생각하고 숨쉬지 않는 것처럼, 육체의 몸짓은 사유의 손길이 만지기 앞서서 ‘알아서’ 기어가고 돌아간다. 당연히, 이 육체의 무의식은 여러 종류의 바깥이 노니는 마당이 되기 마련, 권력일 수도, 이념일 수도, 담론일 수도 있다. 무엇으로 명명하든, 사유하지 않는 곳에 육체가 운동한다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고약하다. 윤현정의 <길들여지기>는 이 같은 육체의 무늬를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생각해보고 반성해볼 거리조차 마련하기 힘든 몸짓을 경험하게 해준다. 구조는 단순하다. 공간에 들어서면, 전방에 화면이 한가득 들어온다. 한명씩 한명씩, 줄맞춰 나란히, 앞으로 나란히, 좁다란 복도를 채워간다. 마치 복도를 위해 존재하는 사물 같다. 게다가, 모두 까만 봉지를 뒤집어 쓴 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는 탓에, 더욱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네 얼굴을 봐, 얼굴을 갈음한 까만 봉지에 쓰여 있는 글을 읽는 순간, 관객은 어느새 화면에 등장한 인형으로 변신하고, 공간은 곧바로 복도처럼 일변한다. 관객과 현실을 끌어당기는 비디오작업 형식이 장기를 발휘하는 대목이다.

3. 잘 알려져 있듯이, 비디오작업은 지루한 경우가 많다. 내용 때문에 지루한 것이 아니다. 비디오형식 일반의 시간성 때문이다. 왜 그런지, 다른 영상언어들과 비교하면 손쉽게 알 수 있다. 비디오는, 영화처럼 시간을 잘라내 서사를 체계 있게 분배하지 않으며, 광고처럼 짧은 시간에 정보와 영상을 압축하지도 않는다. 길지도 짧지도 않는 시간에, 하염없이 반복의 기제가 작동한다. 특히, 현실과 관객을 끌어오는 작업은 더욱더 지루해진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실이야말로 온몸이 진저리칠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담론은 강렬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대’라는 형용사가 자주 사용된다. 놀랄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 기대할 만한 대상을 갈구하기 때문이다.”(다자이 오사무) 현실이 연극보다 극적이라고 하지만, 그랬던 시절은 주체가 현실과 모험을 벌이던 저 옛날 옛적의 일이다. 세상과 화해하기란 애저녁에 글러버린 오늘날의 주체는, 방바닥에서 뒹굴며 매체와 영상을 끌어안고 꿈이나 꾸는 수밖에 없다. 바깥으로 나가봐야, 주체를 소외시킨 세상이 ‘한없이 지루한 일상’의 가면을 쓰고, 되풀이 되는 탓이다. 주체를 무력하게 만든 지루한 일상이란, 결국 학교를 위시한 근대 규율체제의 효과일 텐데, 흥미롭게도 윤현정의 작업에서 지루함과 규율체계의 공모를, 즉 형식과 내용의 공명을 매개시키고 있다.  시계처럼 째깍대며 주의할수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루함이라는 결과인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0.06 ~ 2005.10.18
- Opening 2005.10.06(금) pm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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