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개인전 - 서.른.에.꿈.을.꾸.다 _ 프롤로그

낯선 천사의 방문

김수지의 인형은 어둡다. 어눌하다. 침묵하고 있다.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시선은 결코 강렬하지도 또 어떤 의식의 흐름도 보이지 않는다. 표정과 마찬가지로 그 인형이 만일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의식 또한 잠시 정지한 채 방향을 상실한 상태일 것이다. 정지. 무언가 큰 사건을 겪은 후 망연자실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점점 거대해지는 자아의 한없이 어둡고 긴 그림자를 보는 듯 하다. 추측해보면 김수지의 인형은 인형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기념비적이다. 그러나 타인을 향하기보다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한 내면에 충실한 기념물인 것이다.

첫 개인전 이후 끊이지 않고 표현되어온 것, 작가 자신의 초상을 한 인형들이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복제, 자기 자신을 복제하기이다. 한 때 즐겁고 한 때 감상적이며 한 때 슬픈 표정들이 인형에 새겨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 거대한 인형만이 작가의 무표정한 초상을 한 채 공간에 놓여져 있다. 공간이 정말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언가 거기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지의 인형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텅 빈 허공에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면에서는 결코 인형의 표정처럼 무의미를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은 작업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미술가라면 한번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보지 않은 이는 드물다. 또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찬찬히 음미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얼굴과 표정의 변화에 보다 민감하다. 세상의 변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자신의 얼굴에서 읽는다. 자기 자신의 얼굴은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얼굴은 결코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구속의 징후로 읽을 수도 있다.

김수지의 작업은 일종의 자기애의 독특한 반영으로 읽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운 관계를 갖는 것은 인류의 이상이다. 또 많은 예술가들과 종교인들의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궁극의 자유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 외에도 세상에는 많은 것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김수지에게 그러한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작업만으로는 그렇다. 외골수로 보일 정도로 하나의 주제에 몰두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주제가 분명 개인적이지만 어떤 보편적인 체험과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김수지에게 자신의 얼굴을 한 인형은 유일한 세계와의 또는 타자와의 소통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린다. 말이 없다. 등 에는 하얀 날개를 달고. 날개는 너무도 작고 창백하다. 아서 단토의 말처럼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분명 자의식의 문제에 깊이 몰두한다. 김수지 또한 그러하다. 그녀의 작업에 느끼는 것은 더욱 거대해진 자의식이다. 그것이 오늘날 너무나 자연스런 내면의 풍경이 아닐까?

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 속에 살다가 자신이 요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떤 심리적 충격을 겪은 후 인간들로부터 완전이 단절된 어는 여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녀는 수도원장이라는 직분에 충실하다 강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다 고난을 겪는 와중에 자신이 인간 세계에 어떤 의도에 의해 던져진 요정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휴머니티를 상실한 채 강도들을 살해하고 홀연히 숲 속으로 사라진다. 이 이상한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김수지의 인형은 말 그대로의 평범한 인형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의해 우리에게 던져진 존재이다. 우리는 그 인형에 어떤 인성人性을 투사하지만 그것은 소통과 이해불가능이라는 반향만을 돌려줄 뿐이다. 인형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우리에게 던져 놓은 장치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코 작가 자신은 아닌. 김수지라는 개체와는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역동적이며 불같은 예측 불허의 운동을 보여주는 <이드>처럼 그렇게 김수지의 인형은 김수지 자신조차 콘트롤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무생물이자 날개 달린 신神이기도 하다. 검고 우울한 어떤 아우라를 내뿜으며 한 개인의 내면의 세계가 불가능한 형태로 표현된 듯하다. 누군가 그 세계로 들어가 이해의 생명수를 떠온다면 그것은 어떤 약호 어떤 상징의 비밀은 푸는 자에게 허용될 뿐이다. 하지만 누가 그 물을 떠올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 만연한 일종의 전염병과도 같은 이념이 바로 소통의 이념이다. 그런데 결코 소통이란 실재하지 않는 어떤 허구가 아닐까? 거대한 세계를 속에 지닌 이 불가능한 마음이라는 존재를. 대우주와 함께 비밀을 나눠 갖은 소우주의 세계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느끼는 것은 느끼는 것이고 느끼지 않는 것은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러할 뿐이다. 어쩌면 작가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우울하며 무표정한 또 어눌한 한 천사가 우리에게 던져졌다. 그는 내려온 것인가 아니면 창공으로 날아오르려는 것인가? 결코 날렵하지도 세련되지 않은 누추한 모습으로. 김수지에게 헤르메스 신은 그렇게 강림한 듯 하였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0.21 ~ 2005.11.02

- Opening 2005.10.22(토) pm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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