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개인전 - 세크리파이스_Sacrifice

1. 요즈음 세상은 무척이나 험하게 돌아간다. 신문의 사회면 소식을 찬찬히 읽다보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기 일쑤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아니면 그냥 모르는 사람을 죽여대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나 되는 대로 죽으라고 불까지 질러댄다. 국제면으로 넘어가면, 더욱 가관이다. 한두명 정도로 끝나지 않고서, 더러운 전쟁에 휩쓸려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이 한꺼번에 죽어나간다. 온갖 종류의 죽음의 굿판이 방방곡곡 얼씨구절씨구 벌어지는 것이다. 이따금 생각해 본다. 여기가 과연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인지, 도대체 사람이 살만한 곳인지. 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암만 해도 너무나 의심스럽다. 시끌시끌하고 복잡다난하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일상을 떠올리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이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일상의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란 어렵지 않다.
아이의 세계가 대표적으로 방증한다. 오늘날 그네들의 세계는 지옥 같은 정도를 넘어서 지옥 자체다. 어른의 세계와 전혀 다를 게 없다. 똑같이 죽음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 어쩌면 훨씬 강도가 높은 지도 모른다. 도덕 같은 규칙이 확립되지 않은 탓에 벌거벗은 폭력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꿈나무니 순수한 동심의 세계니 하는 것은, 모두 다 옛날이야기다. 사회가 꿈꾸었던 행복한 꿈인 것이다. “어린이의 교육형태 속에 사회는 그 꿈을 감추고 있으며, 반대로 성인들에게 부과하는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한 사회 속에서 실제 현재와 불행들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푸코) 문제는 오늘날 사회가 꿈조차 꾸지 못하고, 불행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보호’는 역설적으로 보호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형성된 구호가 아닐까. 적어도 사회가 보호할 여력을 상실한 징후로 보는 게 적절하다.
예를 들어, 아이의 세계를 까맣게 물들인 왕따를 생각해 보자. 왕따란 한 사람에게 모든 죄악을 전가하는 것이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는 모든 재앙의 근원으로 설정된다. 접촉도 금지되고 대화도 거부된다. 왕따된 사람은 살아있는 금기가 된다. 그러므로 왕따현상은 일종의 희생제의다. 옛날에 희생양을 요청했던 존재는 그래도 신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재난의 대가로 희생양을 요구했기에, 요청 자체도 지명 자체도 얼마간 정당하게 수용됐다. 어느 누가 신에게 대적하며 정당성 운운하겠는가. 현대 사회는 물론 신의 존재를 제거했지만, 오늘날 자행되는 수많은 더러운 전쟁에서 확인하듯, 거대한 폭력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서 희생양을 똑같이 요구한다. “희생물은 그러므로 상상적인 신에게 봉헌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폭력에 봉헌되는 것이다.”(김현) 그런데, 문제는 들통이 났다는 것이요, 더불어 정당성도 잃었다는 것이다. 왕따는 정확히 그것을 재현한다. 질서란 폭력 위에 세워지고, 질서를 유지할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들은 정확히 알고서 실천하는 셈이다. 사회는 수많은 희생양으로 세워진 핏빛 집인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나도 하는 것이다.    

2. 박은선의 작업들은 흥미롭게도 음식의 형상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떤 것은 배추를, 어떤 것은 인삼을, 어떤 것은 사슴을, 어떤 것은 생선을, 저마다 띠고 있다. 당연히 얕잡아 보이기 쉬운 형상들이다. 모두 다 하강한 존재들인 탓이다. 하강이란 존재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작은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웃기지도 않게도 전혀 우스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어쩐지 조금은 숭고한 느낌에 엄숙할 정도다. 이 같은 아이러니의 정체는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희생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태도도 공손하기 짝이 없다.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이고, 기꺼이 바친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에게 바치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네들의 의도는 분명히 감지된다. 그것들은 기도하며,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은선의 작업들 사이에 발생하는 미묘한 차이가 확실해 진다. 작업들을 분류하면, 첫 번째 계열은 (대체로) 기도하는 식물형상으로, 두 번째 계열은 공양하는 동물형상으로 갈라진다. 알다시피, 예부터 희생제의는 순수한 피를 요구했다. 차마 사람을 요구하진 못할지라도, 동종의 존재를 받쳐야 한다. 즉 동물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계열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오며, 기괴한 느낌을 강화시킨다.
앞서 지적했듯, 현대 사회 역시 희생양을 대가로 세워진 거대한 폭력덩어리다. 폭력만 생각하면, 현대의 합리성이란 전쟁의 합리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어쩌면 불행하게도 신화의 시대보다 훨씬 강력해 졌는지도 모른다. “계몽은 과격해진 신화적 불안이다.”(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박은선의 작업들은 이 같은 희생양을 드러내는 은유이자 폭로이며, 우리네 현실이다. 또한, 그러한 희생양에게 받치는 기도이며 공양이요, 우리네 재현이다. 그러니, 형상들이 살갑기보다 징그러울 수밖에.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12.13 ~ 2005.12.28
- Opening : 2005.12.17 (토) pm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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