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 개인진 - 블루

블루의 시학

사물, 세계의 표면, 존재의 그림자가 블루를 둘러싼 신비이다. 블루는 은유의 머리이고 몸이고 꼬리이다. 이 블루는 깊은 푸른색이거나 단정한 파랑색 또는 녹색이나 보라로 넘어가기 직전의 모호한 블루일지 모른다. 무수한 스팩트럼을 보여주는데 결코 19세기 인상파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유통되는 수학자나 화학자의 표준화된 블루가 아니다. 이 블루는 디지털영상 미디어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보편적인 결핍을 채워줄 구원자로서의 블루이다. 결핍이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이상한 이야기가 점점 자주 들리는 시기에 작가 김병직이 바라보는 블루는 사실 작가가 의도했다기 보다는 그 블루가 작가를 호명했다고 보여진다. 위대한 미디어의 세계에서 발원지가 불투명한 소문 또는 장광설과 호언장담과 무수히 마주하고 무한히 변주될 때 한 순간 작가의 뇌리에 빛이 비추었으니 곧 블루다. 블루는 칼라가 아니다. 블루는 영상언어, 이미지, 기표들을 실어 나르고 마법을 부리며 변신시키는 테크놀로지로서의 블루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도 기계도 아니다. 블루는 하나의 은유이고 신비일 것이다.

분명 김병직의 블루는 현대미술이라는 심해를 가리킨다. 그 블루는 작가를 삼켜버리고 또 다른 무엇을 토해낸다. 영상미디어예술 소위 비디오아트를 하나의 색채심리학으로 만들고 또 심미적 비평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의 블루는 프랑스의 미술가 이브 클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클라인은 기상천외한 작업과 퍼포먼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라는 물감을 온몸에 바르고 캔버스에 몸도장을 찍었었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는 해괴한 해프닝이고 가십거리이며 대단한 볼거리였다. 그런데 그 블루는 비평적으로는 현대미술의 경계를 흩뜨려 놓은 블루였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는 어제의 현대미술이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현대미술이 내일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브 클라인의 시대에 현대미술은 일반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되었는데 이브 클라인의 블루가 그 이상한 정점에 있는 것이다.

김병직 또한 자신의 블루로 자신을 지워내기를 반복하는데, 내게 그의 블루는 어제의 김병직과 오늘과 내일의 김병직이 다르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병직의 블루를 둘러싼 퍼포먼스는 이브 클라인의 초현실적 멋이 사라진 보다 회색의 사물들처럼, 일상적이고 사무적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 양자의 블루는 어떤 공통적인 지점을 향하는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제의나 부두교 등과 같은 종교적 제의에서 사용하는 광적狂的 블루와 비교해보면 더 뚜렷해진다. 제의적 블루는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 세계와 인간을 묶고 인식하고 이해하게 하는 어떤 입문入門과정에 사용된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몇 날 며칠을 블루를 온 몸에 칠하면서 신, 자연, 조상 등 다른 존재와 만난다. 그 과정에 제의 참여자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넘나들며 대지의 흙과 땀과 오물과 배설물로 뒤섞이고 범벅이 된다. 저 끝없는 세계의 바닥으로 또는 저 끝없는 세계의 지붕으로 비상하고 추락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이 과정에 인간과 자연과 신과 기타 모든 것이 다른 질서와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세계와 영혼의 왕국을 만든다. 이브 클라인의 블루, 김병직의 블루는 그런 점에서 조형적 색채의 문제를 어떤 원형적 신비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블루의 의미는 현대미술이 조형적 세계에 머물지 않고 삶과 현실의 문제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블루는 색채학이나 비평의 수사학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도달하고 직관이 된다. 블루는 다른 세계로 부터의 호출이며 손짓이고, 작가에게 아니 세계의 모든 사물들에게 블루는 블랙홀이며 화이트홀이다. 이 과정에 세계의 결이 드러나고 해체되고 다시 교직交織된다.

세계의 구멍

블루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들이 있다. 블루, 블루벨벳, 블루라군, 청연… 심해를 오르내리며 불가사의한 대양大洋의 중력을 빛과 소리에 담아낸 영화들. 일상에 가려진 가혹과 비정의 세계, 심오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보여준 기이한 영화 이미지들.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미래의 인간들과 변종생물체들을 그린 묵시적 애니메이션. 최초의 여류 비행사의 꿈과 사랑과 좌절을 다룬 영화. 그 밖에도 무수히 많은데 어째든 이 영화들의 대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 깊은 정서의 운동과 심미의 세계, 또 현실의 어느 지점에 유기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를 은유하곤 한다. 그래서 블루를 제목으로 하는 영화들은 보고 난 후에 결말이 분명치 않고 보는 이에게 한걸음 현실에서 물러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여운을 남기곤 한다. 이 분명치 않은 이야기의 단절과 여운은 일종의 빛의 세계와는 반대편에 존재하는 어두운 구멍과 같다.

그 곳은 세계의 끝이거나 존재의 사람짐 혹은 나타남의 종착지이고 곧 블루의 세계이다. 여기서 김병직의 블루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욕망하는 그래서 다시금 세계의 시작, 작가 자신의 탄생의 순간, 원형적 구멍,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의 시학이 된다. 블루가 상징하는 심해深海는 지구 생명체가 탄생하는 자리이고 곧 생명의 자궁이 아닌가. 김병직은 블루를 통해 자연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이러한 시놉시스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원현상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이 경계에서 등장한다. 괴테는 1790년부터 1810년까지 약 20년간 색채의 문제를 연구하여 1810년 5월 18일 “색채론”을 세상에 내놓는다. 괴테는 색채가 관찰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객관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아이작 뉴턴에 반대하였다. 그에게 색채현상은 밝음과 어둠의 양극적 대립 현상이며 무엇보다 관찰자인 인간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세계는 빛과 밝음의 원현상과 암흑과 어둠의 원현상의 대립이고 이것이 인간이 직관할 수 있는 색채현상의 두 기둥을 이룬다. 여기서 블루는 암흑과 어둠의 원현상으로 나타난다. 밝음의 원현상은 황색으로 나타나는데 이 두 원현상 사이에 흐림이라는 원현상이 존재한다. 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세계의 대결이 색채의 세계에서 펼쳐지며, 여기서 색채는 자연과학자의 손에서 벗어나 화가와 시인들의 심리학이 되고 미학이 된다. 데카르트, 갈리레이, 뉴턴의 자연과학이 풀어내는 색채의 세계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 신의 무한한 세계가 기계의 사유로 환원되는 위험을 괴테는 경고한다.

무한無限

나는 괴테가 일찍이 열어놓은 색채의 사유를 김병직의 블루에서 떠올렸다. 김병직의 블루는 자신을 사물들의 질서의 연쇄에서 지워버리거나 회화와 사물의 관계를 재설정한 현대미술의 사과를 다시 호출하는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던 이전의 세계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블루의 성찰은 존재론이나 미의 형이상학의 문제로 나아가는 길을 향하는 듯하다. 또 거기엔 사물, 존재, 세계의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두 대립하는 현상이 무한의 문제로 나아간다고 보여진다. 김병직의 세계에 거대한 쓰나미가 덥치듯 이 무한의 세계가 강림한 것일까? 그가 서있는 정교한 대지는 일순간 푸른 대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작은 섬처럼 변모한다. 작가는 일상과 우주의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를 모두 꿰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의 설계도에 푸른 잉크 한방울을 떨어뜨리는 데, 그것은 설계도를 위 아래로 가르며 명쾌하게 조직하는 것들을, 현재와 미래의 ‘메트릭스’의 세계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끈끈하게 삼켜버리는 것이다. 아트스페이스 휴 기획팀.

- 전시기간 : 2006.3.2 ~ 2006.3.21

- Opening 2006.3.4(토) pm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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