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아개인전 DoGmatism01 / Collection - 01. Bones

원형적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영상보고서

1. 이 여인은 누구인가? 아니 여성이기나 한 것일까? 마치 남성과 여성이 나눠지기 이전의 존재처럼 연출되는 이 정체는 무엇인가? 여신과 같은 성스런 존재인가?

조영아의 영상은 저예산 B급 영화이미지로 다가온다. 그의 영상은 자칫 조악해질 수 있는 신화적 키취 혹은 패러디를 대단히 진지한 영상과 사운드로 보여주는데, 원형적인 제의적 분위기는 너무나 진지하여 비극적이기까지 한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세상의 종말의 징후를 알아챈 종교적 직관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는. 여하튼 조영아의 영상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이 여인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영상의 도입부는 몇 겹의 뼈 무더기를 지나쳐 여러 차원의 혹은 여러 겹의 경계를 거쳐 들어간 후, 한 여인이 마치 물에 둥둥 떠있듯이 줄에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줄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물에 떠있는 것이라면 이 장소는 황금가지의 디아나의 호수이거나 혹은 화서씨華胥氏가 복희伏羲를 잉태하게 되는 뇌신雷神의 호수일지도 모른다. 또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면 이 줄은 이 여성의 존재를 지탱해주고 가능하게 실현시킨 존재의 밧줄일 것이다. 물론 이 밧줄은 탯줄과 오버랩 된다. 조영아의 영상은 거의 제의적 과잉 또는 주술적 이미지의 과잉으로 가득하다.

이 여신으로 보이는(대지의 여신 혹은, 가이아?) 존재를 둘러싸고 수많은 손들이 그녀의 하복부로부터(추측컨대) 그녀를 둘러싸는 금줄(?)을 친다. 혹은 금줄로 보이기도 하고 생명을 생산하는 탯줄로 보이기도 하는 줄을 사방으로 걸쳐놓는다. 일종의 금줄이 신성한 영역과 세속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라면 이는 성역과 세속의 나눔이자 동시에 상호 개방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 여신을 사방으로 갈기갈기 성 聖과 속俗으로 찢어놓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또는 존재의 나눠가짐(일종의 분유)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원형적 거인신의 몸이 찢어지며 그 살덩어리에서 인간들이 생겨난다는 잘 알려진 신화를 떠올린다. 여기서 금줄은 새로운 의식 혹은 새로운 공간의 열림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 열림은 자연의 한 사물로서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순간을 각성시킨다. 자연과 문화의 분리를 상징하는 듯 하다.

조영아의 영상은 깊은 존재의 심연에서나 가능한 침묵의 소리가 웅웅 이명처럼 울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신이 등장하여, 세상의 창조와 인간의 탄생을 기억하는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인간종족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이 여신은 무수한 갈래의 생명의 동아줄 또는 존재의 탯줄을 사방으로 뻗어내며 생명의 활력이 사라져버린 뼈무더기 가운데에서 새로운 존재하기를 보여준다. 여신에게 나타나는 존재의 동아줄, 줄기, 생명의 끈은 인간 탄생이전의 신과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불분명한 시기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여기서 이 여인의 정체는 일단 원형적 어머니 신(大地母神)으로 여겨진다. 이는 조영아의 영상이 대지모신의 기억을 재현한 메타포로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여신은 남자 신이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이끌기 이전의 시조모始祖母로서 성녀이자 동시에 마녀의 기운을 모두 지닌 존재로 보여진다. 이 신성한 존재의 뿌리는 수많은 죽음의 흔적들 사이에서 되살아난다. 한편 생의 잉태와 불모의 죽음이 상호 몸을 맞대고 등장한다. 이는 신화에 흔히 나타나는 이원성의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캘트 신화에 나오는 다누(아누)라는 지모신 혹은 겨울의 여신은 자신의 딸인 봄의 여신 브리이트(대장간의 여신이자 불을 관장하는 여신)와 대조적 관계를 갖는다. 모녀라는 혈연관계이자 혹은 존재론적 위상이 갖은 그러나 그 본질이나 성향이 정반대인 이 이상한 관계. 아마도 이러한 비극적 혹은 부정의 관계성이 신화의 중요한 특질을 이룬다. 이러한 이원성의 동거관계가 신화의 드라마적 형식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2. 온갖 형태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뼈무더기들은(뼈무더기는 일반적으로 금기 혹은 타부로 작용하는데, 흔히 죽음은 인간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자 무엇으로서 작용하는데, 그것은 원형적 두려움일 것이다.) 여러 층으로 여신을 덮고 있다. 죽음은 시간의 규율을 운영하는데, 시간이 예정한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조율한다.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 속에 자연의 모든 사물과 인간은 한갓 거품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러한 영원한 운동 중심에 이 여인이 있다. 죽음은 현대나 원시 혹은 고대의 야만적 폭력과 공포를 기록한 죽음이며 이는 인간 존재의 깊은 무의식으로 자리한다. 최초의 존재의 운동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이러한 뼈들의 무덤은 인간 삶의 근원적 운동 혹은 질서의 냉엄함을 또한 재현하는 기묘한 그로테스크의 텍스트로 작용한다. 과도한 뼈무더기의 해학적 요소와 묘한 대조효과를 일으키는데, B급 장르영화 이블데드 씨리즈의 우수꽝스런 뼈무더기들과 또 이와는 대조적인 2001스페이스오디세이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대단히 우아한 왈츠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동물의 뼈를 연상시킨다. 또한 무수한 손들이 사방에서 등장하여 여신을 에워싸고 줄을 엮어나가는 모습은 아주 느린 영상과 심미적 사운드의 효과와 함께 조영아의 영상이 연상시키는 앞서의 B급 장르영화들의 아이러니한 이미지 효과를 반전시킨다. 이러한 연출효과가 조영아의 기묘한 패러디의 영상을 매우 독특한 위상을 지니게 된다. 20세기 초의 표현주의의 심미성과 부조리한 존재와 시간의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표현을 다시금 패러디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버전의 신화라는 거대담론의 패러디일 것이다.

신화의 세계는 아주 선명한 묵시론적 세계이자 비유의 세계이다. 조영아의 영상작업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하는 시간의 두터운 마술적 효과와 신화적 모티브가 잘 연출된 한편의 영상으로 제시하는 신화의 보고서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미세한 시간의 차이에 의해 벌어지는 마법적 메타포의 징후가 흔히 잘 연출된 영상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굳이 편집이나 몽따쥬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폴 리꾀르는 일반적으로 신화가 이야기 형식이나 드라마 형식을 취하는 것을 매우 본질적인 이유에 의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데, 신화에 나타나는 시간과 사건들은 처음부터 원형적 드라마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조영아의 영상 또한 대단한 보편적인 신화의 드라마로 연출되어 짧은 영상 안에 세계의 시작과 끝을 함께 보여주는 원형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조영아의 영상에는 조영아의 개체성은 애초에 조금도 등장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신화담론의 드라마가 꽉 들어찬 영상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영아 개인이 사라진 텅빈 보편적 이야기는 개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현대예술의 방향과 역행하는 듯하다.

여하튼 조영아의 작업에서 우리는 신화는 신화일 뿐이고, 대지모신의 이야기는 다만 한 신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공허한 반복형을 본다. 한 개체가 사라져버린 텅 빈 그러나 과잉된 신화 담론의 영상을 보면서 오히려 현대예술과 이미지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여전히 살아 작동하는 신화의 권능을 생각하게 된다. 조영아의 영상에서 우리는 이미 인류가 문명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끝장나버린 모계사회의 기묘한 노스텔지어가 투사되는데, 너무도 유연하고 부드러운 연출로 포장된 21세기 버전의 카니발적 그로테스크영상이자 영상으로 담은 제의적 제스처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 서문에 관한 작가와 서문필자의 이견 *

작가 : 조영아
서문필자 :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조영아(이하 조) : 경험적인 것을 중시하는 저에게 있어서 ㅡㅡ;;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전체적으로 작업을 너무 노말하게 읽으신 것 같은데요…
전체적으로 망각과의 연결이 없습니다.
요는 상실, 망각된 것이거든요…
그것은 곧 저, 개인의 경험과 맞닿아있고 그것을 압축시켜 표현한 것이지요.
시처럼…

김노암(이하 김) : 노말하게 읽은 것이 맞습니다.
영상시임에 틀림없습니다. 상실과 망각에 대해서는 사실 주체와 대상이 불분명하고 물론 작가 자신이거나 관객일 수 있겠지요. 저는 상실과 망각의 문제는 굳이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요? 이미 신화적 모티브나 이야기들이 현대에서는 의식적 차원보다는 망각의 영역인 무의식적 차원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신화적 논의에는 항상 망각의 역사 혹은 망각의 현대인이 설정된다고 봅니다.

조 : 문제는 너무 광범위하게 혹은 익히 알려진 것들에서 범위를 잡은 것, 작업의 의도가 전혀 다르게 해석된 것이 우려돼서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삭제된 상태에서의 서문은 아무래도 다른 의미의 이해의 폭을(또 다른 삼자) 주입 또는 제한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작업할 때 관객을 별로 중요 대상으로 삼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고에 있어, 약간이나마 제가 깔아놓은 메타포를 저의 설명 없이 캐취하는 관자가 몇이나 될까요… 물론 저는 설명적인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딱히 가이드적인 텍스트는 서문일 테니까요…

조 : 내용을 신화적인 요소로 너무 강하게 끌고 가신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읽을 때 소스가 신화에 있을 거라고 단정 짓기 쉽죠…
저는 절대, 신화를 패러디한게 아니거든요…
실제로, 거대담론에서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미시담론에 가깝죠…
개인의 이야기를 이러한 장치를 통해 표현 한 것인데…
분위기를 그렇게 읽으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마치 신화에서 모티브를 딴 것처럼 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의 관심은 언제나 경험적인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신화라고 한다면 개인적 신화라고 할 수 있고… 그게 머 외부와도 이어지는 것일 테니까…

실제가 드러나지 않게…하는 작업으로서 이해해주시면 될 듯…

김 :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은 실상은 대우주와 소우주의 관계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대서사의 논의 선상에서도 미시적 관점이 노출되지요. 그것을 확연히 구분하지는 않습니다.

모티브를 딴것은 작가가 아니라 글쓴이 혹은 한 관자觀者가 영상을 보면서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감상, 해석하거나(혹은 오독)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모티브를 신화에서 따왔을 거라는 관자의 한 가설 위에 글이 진행된다고 보시면 맞을 거 같습니다.

개인의 경험이 개인적 표상으로 그리고 그것이 모여 집단적 표상화 된 것이 신화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서문은 작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삼자의 외부의 관점에서 접근한다고 보시면 될거 같은데요. 또 신화적 담론이 개인의 경험적 면을 거세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조 : 물론 그 말은 지당한 말씀이지만,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는 작업의 시작점이라는 거죠… 모티브의 이야기는 위에 쓰신 이런 해석 없이는 판독이 불가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글의 전체적인 포커스가 일정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변형되기까지 하니까요…
가설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 즉 어떠한 제시 등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바램입니다.

조 : 제 작업은 무지 솔직하고 직관에 의존하는 작업인데…
01. 저의 작업은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사고와 trauma를 표현한 것임(알려지지 않은)
소스를 부러 구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작업을 함에 있어 살아가면서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것을 가장 중요시함)
‘상실, 망각된 것과 만나다’라는 텍스트는 현재 저의 상태와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저의 존재, 상황이 일부러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고요.
(영상에서 나오는 그 줄들은 ‘상실, 망각된 것들’과 조우하는 역할로서의 끈입니다.)

김 : 작가의 작업과 영상에 투사된 개인적 체험(심리적 내상과 같은)과 직관적 면을 서문에 다루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개인사가 물론 작품에 절대적 영향을 주리라는 것은 명확하지만, 제 3자로서 필자가 그러한 측면을 배재한 채 작업을 살펴보고 이해하고자 한 것은 메타비평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관점과 비평의 방법론의 취행 혹은 선태군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작가와 작품을 어느 정도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형식주의적 비평의 입자은 아니지만.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품이 단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의 기록으로 한정한다면, 사실 다양한 생산적 혹은 창의적 오독誤讀이나 감상이 원천 봉쇄되겠죠.

조 : 쓰신 서문에서는 작가의 분리는 완전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거의 제 상태가 작업에 녹아 있다고 보시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상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서문을 쓰시는 필자의 어떠한 전제를 내세우는 작업은 제 작업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해의 소지는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오독의 범위를 어느 정도 합의 하에 약간이나마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 때문에 그 전에 약간의 텍스트들을 드린 거구요… 글을 잘 못 쓰는 저로서는 그 작업도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거든요…

조 : 02. 신화에 포커스를 너무 맞추신 게 아닌가요?
작업의 모든 소스를 신화에서 건져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작업에 있어서 그것은 표현하는데 있어 형태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그 안의 내용 인데요.
시리즈(?)인 DoGmatism에 관한 텍스트를 주목해 주세요…
DoGmatism이란 단어를 굳이 선택한 것을 비추어 본다면, doctrine의 패러독스라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형태적인 느낌 때문에 패러디라는 단어를 자주 쓰신 것 같은데, 단순히 형태적인 느낌에 따르기에는… ㅡㅡ;; 글쎄요…
음…어떠한 신화에 관한 패러독스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싶습니다.
물론 공허하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요…
패러디라는 단어는 “20세기 초의 표현주의의 심미성과 부조리한 존재와 시간의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표현을 다시금 패러디 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버전의 신화라는 거대 담론의 패러디일 것이다.” 이 문구에만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요…

김 : 신화에 포커스를 맞추어 쓴 것은 맞고 그 것은 감상자(서문을 쓴)의 상상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화적 담론 혹은 비평적 맥락에서 일관된 개념과 용어를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도그마티즘 씨리즈의 연장선에서 서문을 기획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작가의 이번 영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기 완결적인 형식을 지닌 작품이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영상을 둘러싼 여러 설명들과 텍스트를 배제한 상태에서 서문을 썼습니다.

패러디 용어를 자주 쓰는 것은 제가 현대미술 작품들을 볼 때 주요하게 적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는 형용사는 아니고, 문화적 맥락에서 상호참조가 하나의 자연 상태가 된 현대문화의 측면을 염두한 용어입니다. 패러디(모방 혹은 창조적 인용)를 빼면 실상 현대 미술가들이 창작 상에 사용할 마땅한 것(유용한 것)들이 별로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 : 자기 완결적인 형식을 지녔다는 문구는 상당한 과찬이십니다. 불완전한 작업을 좋게 봐주셨다는 점에서 우선 감사를 드리지요. 하지만 제 작업 또는 작업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이 두렵군요…(반응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ㅡㅡ;;) 때문에 우려되는 바, 약간의 언급(친절?설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작업을 할 때 현대미술의 잣대를 재고 작업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시공간에서 제가 작업하고 있는 위치를 따져서 현대미술의 기준에 들어간다고 하면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어떻게 보면 제 작업은 모던한 면이 넘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문을 보면 모던한 요소를 현대미술에서 쓰이는 용어로 풀이하시고자 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이 시점 즈음에 저의 영상작업을 해석하시는 데에 있어 오류가 발생하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의 결론이 다른 형식의 해석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정확하게는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뿐인,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개인적인 사고의 작업입니다. 다만 개체성을 굳이 드러내놓고 강조하지 않은 것뿐이지요.

조 : 03. 뼈를 모아온 과정도 중요한데, 그것들을 찾아다니고 씻고 말리는 과정…
지금껏 모아온 뼈의(분류된 뼈들) 집단들일 이번 설치물에 있어서 뼈무더기의 해학적요소 란 부분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키취라는 단어대신… 컬트가… ㅡㅡ;;

김 : 해학적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는 블랙유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B급 영화들이 붉은 피와 하얀 뼈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경우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염두한 느낌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컬트 또한 오늘날 대단히 상투적인 미적 취향 혹은 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컬트 보다는 키치가 보다 현대의 일상적 경험과 세계에 더 폭넓게 적용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 어감의 차이가 확연하니 블랙유머라는 단어로 바꾸신다면 그것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 작업의 폭이 그렇게 넓게 퍼져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틀을 만들어서 작업을 하고 있는 편이지요…
컬트라는 의미는 좀 더 국한된(키취보다는?) 범주의 단어로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려운 단어라 생각됩니다. 머리보다 가슴, 즉 숨겨진 심부에 다가간다는 점 등에서 컬트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특히나 개인적인 작업임을 강조하는 저로서는 컬트가 더 합당한 말일 것입니다.
비교적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선택한 오브제 때문에 B급 영화처럼 보이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B급영화처럼 굳이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지요..(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좀 더 오버해서 연출했을 것인데, 제 작업은 자제가 많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작업을 하는 데에는 약간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음.. 밝히지 않아도 될 듯하군요.

조 : 04. 이번 작업은 딱 두 컷으로 이루어진 영상입니다.
다른 작업과는 달리 편집에 있어서 몽타쥬를 거의 하지 않은 작업…
시간의 조작은 약간 있지요… (좀 더 느리게)

김 : 작품이 몽따쥬기법을 썼다는 것을 말하려고 쓴 것은 아닙니다. 수사적 효과를 위한 비유라고 보시면 되겠는데요.

조 : 그렇게는 생각했었습니다. 단지 이번 영상의 제작과정을 설명하는 입장에서 사족을 썼을 뿐입니다. ^^

조 : 05. 여성성 또는 모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사실, 나뉘는 성(생물학적)의 정체성에는 그다지 관련이 없지요.
단지 어떠한 하나의 존재로서 영상에 등장하는 퍼포머를 인식해주셨으면 하는 바램.
금줄 또는 탯줄이라는 이미지 같은 확실하고 단정적인 해석보다는 연결하는 선, 조우하는 줄 정도가…
primitive한 내용이 너무 강조되었습니다.
물론 주술적이고 묵시적이며, 제의적인 요소는 제 작업의 곳곳에서 느낄 수는 있는 거겠죠.

김 : 이 부분은 전적으로 신화적 맥락에서 필자가 끌어온 부분입니다. 작가의 영상의 내용이나 창작과 무관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금줄 혹은 탯줄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줄 혹은 선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 것에 어떤 경험적 내용을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의 세계관 혹은 인생관과 관련된다고 봅니다.

조 : 음… 중복적인 내용이 될 거 같아서 생략…합니다.
그 단어들을 보고 최근 득녀하신 상황과 연관을 짓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조 : 거대담론에서 시작하는 듯이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에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삭막한 개인적 기억과 감정, 느낌 그리고 숨겨진 메타포…
단지 어떠한 기억, 사건에 관한 현 상태의 보고서정도…

모호한 상태…

김 : 제가 쓴 서문은 전적으로 작가의 이번 영상 작업에만 국한하여 직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글입니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느낌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 혹은 투사 문제는 이번 서문에서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서문과 작업의 관계와 제가 생각하는 관계성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것은 상호 참조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이번 서문을 둘러싼 작가와 필자의 관점의 비교는 매우 생산적인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 이 글은 서문의 내용에 따른 작가의 반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
(서문을 받은 2005년 1월1일 새벽에 이메일로 주고받은 내용이며, 수정한 부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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