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잔디 개인전 -한남 방문기-

사라진 배우의 무덤

고대 풍요로운 도시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던 거대한 강의 색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강은 깊은 푸른색의 빛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빛이 없어지면서 서서히 검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검은 색은 두개로 나뉘어진 도시의 어떤 사람도 건너기 힘들 정도의 두려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기이한 일은 도시의 모든 생명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죽음은 기묘한 사라짐이었다. 모든 생명들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하나하나 사라지는 그런 죽음이었다. 시민들은 죽어가는 도시를 살리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갑자기 빛이 변해버린 강은 점점 더 검은 색으로 변해갔고, 도시의 동물과 식물들이 모두 사라지자 사람들도 증발해버리듯 하나하나 사라져버렸다. 도시의 모든 것이 사라지자 그 곳에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고, 그 곳에는 바람을 타고 전해진 검은 강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벙어리 배우가 나타난 것은 그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후였다. 그는 단지 배우였고,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등장은 무엇인가를 예감할 수 있는 묘함이 있었다. 그는 검은 강이 놓여진 옛 도시의 한 가운데 작은 무대를 만들었고, 몇 날 며칠을 그 무대에서 알 수 없는 몸짓으로 무엇인가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동안 계속 되었던 벙어리 배우의 연극은 배우의 사라짐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는 무덤 한 켠에 놓여져 있는 작은 무덤으로 들어가 스스로 자물쇠를 잠근 후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배우가 사라진 뒤, 기적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검은 강은 어느새 깊은 푸른색으로 돌아왔으며, 도시에서 사라졌던 모든 생명들이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도시 가운데에 작은 무대와 무대위에 자물쇠가 걸린 무덤이 생겼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그 무대와 무덤은 곧 잊혀졌고, 도시는 일상의 반복 속에 조용히 묻혀졌다. 이따금씩 어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을 때, 무녀(巫女)들이 그 무대 근처를 배회하곤 했다.
-사라진 배우의 무덤 中에서-

1. 2004년 봄, 국철을 타고 한강변을 지나던 그녀는 을씨년스러운 강물과 다리의 풍경에 매료되어 한남 역에 내렸다. 한남 역 용산 방향 옥외역사 끝에서 아래로 연결된 계단, 그 계단을 내려가니 단과 무대 벽까지 완벽히 갖춘 흡사 고대 희랍의 야외극장 같은 모습과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장방형의 기둥이 있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춰버린 비밀스런 기억을 간직한 무대였다. 시간의 마법사가 저주를 내려 망각의 늪 속에 던져놓은, 혹은 의도적으로 외면하여 잊혀지기를 강요한 장소였다.
묻혀버리고 잊혀졌던 야외극장과 자물쇠가 채워진 장방형의 기둥, 비석 뒤에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두개골, 쇠꼬챙이가 잔뜩 꽂힌 초소 그리고 ‘사라진 어떤 무언극의 배우’를 발굴해내자 한참동안 중지되었던 연극의 영상이 마법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 자물쇠로 비석을 걸어 잠그고는 다시는 나오지 않는 배우’를 만났노라는 그녀의 독백과 함께 멈춰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가 문득 도달한 한남풍경, 이 장소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한남 역 옆을 흐르는 한강은 풍요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화, 산업화, 정보화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서울의 변화에 있어, 그 힘의 중심에 한강이 흐르고 있다. 그 엄청난 변화를 생산해 낸 한강은 또 그만큼의 배설물-아무도 돌보지 않는 구조물들, 기억의 폐허들-을 잔뜩 쏟아내었다. 서울의 국철구간은 서울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가장 서울답지 못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서울이 토해낸 잔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나 알 수 없는 외압에 의해 어쩐지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어 서울이 아닌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모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시간의 배설물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한강과 국철구간의 접합점인 한남 역의 이러한 이미지는 그녀가 매료되었던 만남이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다. 다만 그곳은 투명하게 숨겨져 있다는 것일 뿐.

2. 그렇다면 묻혀버린 한남의 유적지에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말? 그녀는 지극히 말을 아낀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게다가 말을 하려 했다 해도 그녀의 의도는 위에 줄줄이 써놓은 한강과 국철구간의 모습에 대한 회상과는 전혀 무관할 지도 모른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단절된 사건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개인역사를 가진 젊은 그녀에게는 이 묻혀진 공간이 가진 숨겨진 역사적 사건과 기록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그녀는 이곳의 방문을 통하여 역무원이 철로에서 열차에 치어 숨졌고 어떤 고위직의 관리가 그 부근의 강물에 뛰어 들었다는 현재의 사건과 기괴한 건물, 흩어져있던 동물의 사체(死體), 무속인(巫俗人)들을 관찰함으로써 과거의 사실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상세계를 만들어내었다. 표면적 현상을 만들어내던 과거의 투박했던 이미지 생산시스템은 이제 어떤 비판을 가하기도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져, 자신의 상상을 이 이미지 생산 메커니즘에 억지로 적용시켜 정해진 상상력의 생산품만을 만들어내는 요즘의 상황 속에서 그녀는 실제와 허구의 경계마저 불분명해보이는 기막힌 연극 한 편을 만들어 보였다. 이렇듯 뻔하게 흘러갈 수 있는 구도에서 그녀의 상상은 이를 슬쩍 배반한다. 오로지 방문에 의해서 경험이 유추되고 다시 이야기가 구성되어 창조된 가상의 연극 시나리오가 내러티브를 갖던 갖지 않던,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여기서 화두가 되는 것은 그냥 쉽사리 지나쳐가는 그래서 아무도 쉽게 방문하지 않던 장소를 그녀가 방문했다는 것과 그곳에서 만난 인물과 사건, 풍경을 통해 그녀만의 상상력으로 가공물을 만들어낸 것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설정을 통해 또 하나의 숨겨진 공간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설정유희(주어진 공간에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 즐기는 놀이)를 즐겼다는 그녀는, 특히 사물의 용도에 대한 정보가 없을수록 그것에 대해 가하는 상상의 영역은 더 커졌었고, 그 상상의 공간은 그야말로 비일상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한남에서 만난 네모난 구조물을 야외무대로, 자물쇠가 달린 사각기둥을 무대 위에 있었던 배우의 무덤이라 마음대로 설정한 뒤, 그 외의 어느 것도 그 장소에 대한 명확함을 조사하지 않고 이곳의 기록자로서 방문하여 기이한 에피소드를 경험하고, 이 무대를 둘러싼 공간의 다양한 감정을 투사하고 또 느끼게 된다. 이렇게 최소화된 설정은 오히려 그곳에서 이리저리 차오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좁은 입구를 통해 서로 먼저 나오려는 듯이 상황을 더욱 극적이게 만드는 장치로서 역할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가지 수의 상상의 수형도(樹形圖)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실제와 가상을 오고가는 경험은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오백년 넘은 느티나무아래서 무속인(巫俗人)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마저 그녀의 상상력에 의해 환원된 모습인 듯싶을 정도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녀는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나서 최면 상태의 기록자 내지는 매개자를 자처하며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을 계속 즐기려는 듯 보인다.

직접적인 말을 아끼고 있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이러한 전개방식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실제 작품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전시의 주를 이루는 구조물 오브제는 실제 한남 역에 있는 구조물을 미니어쳐 형식으로 제작한 것인데 이는 색을 잃어버린 듯한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누군가 일부러 지운 하얀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오브제 자체가 또 하나의 빈 공간의 역할을 하여, 최소한의 말로써 끊임없는 설정의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설정이 가져다주는 환상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사진 리터치나 드로잉, 캐스팅한 두개골 역시 실제의 색이 아닌 거의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져 보는 이로 하여금 한남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뿐만이 아닌 또 다시 덧칠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이야기의 결말을 한없이 유보시켜 구체화된 공간을 더욱 더 텅 비어버리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3. 전설의 유적지를 발굴하여 그 곳에 묻혀있던 이야기를 재생시키는 것 같은 이러한 설정유희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 역시 우연한 장소에서 문득 고대신화의 잊혀졌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굳이 전설과 신화를 꺼내지 않더라도 잠자고 있던 개인의 기억을 꺼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전혀 새로운 공간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혹은 기록자가 되어 결말이 없는 시나리오 작가가 될 수도 있다.

도시의 어떤 곳에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 야외무대가 있다. 그 옆에는 검은 강이 흐르고 음산한 갈대울음소리가 왕왕 들린다. 사라진 배우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뒤에는 짐승의 두개골과 이리저리 흐트러진 쌀알, 그 무대를 감시하는 듯한 쇠꼬챙이가 달린 초소가 있다. 그곳에서 당신은 낚시꾼을 보게 되고, 절을 하고 꽹가리를 치고 쌀을 뿌리는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자, 이러한 낯선 풍경 앞에서 당신은 좀 더 이야기를 만들어야한다. 작가가 발견해낸 연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한남의 풍경에 시선을 보내는 몸짓은 당신에게 객석에 같이 앉아 결말을 알 수 없는 상상의 연극에 동참하자고 유혹하는 속삭임으로 들린다. artspace Hue -상상력 발전소 기획팀-

- 전시기간 : 2005. 03. 15 ~ 03. 27
- Opening. 2005. 03. 15. pm 06 :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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